中文史哲/古代官制

一、先秦의 官制 4. 春秋戰國의 官制

마장골서생 2009. 4. 24. 19:27

王天有 著 / 李商千 譯, <中國古代官制>, 학고방, 2006.

 

4. 춘추전국(春秋戰國)의 관제(官制)

 

춘추(春秋)[기원전 770-기원전 476년]전국(戰國)[기원전 475년-기원전221년]시기는 중국 역사상 거대한 변혁이 발생한 시기로써, 이 시기에 노예제는 몰락하였고, 봉건제는 점차 확립되었다. 정치상에서 두드러진 점은 동주(東周)[기원전 770년-기원전 249년]왕실의 쇠퇴라는 것이다. 춘추시기에 왕은 이미 더 이상 주나라 천자의 고유 호칭이 아니게 되었는데, 남방의 초(楚)나라의 군주가 가장 먼저 왕으로 칭하자 이후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두 군주도 이를 모방하였다. 전국시기에 이르자 각 국의 군주들이 너나할 것 없이 왕이라 칭하였다. 주 왕실은 이미 중소 제후의 지위로 격하되었다. 왕권의 변화는 각 국 관제에도 새로운 영향을 가져왔다.

 

(1) 춘추(春秋)의 관제

 

춘추(春秋)시기 각 나라의 관직은 일반적으로 세관(世官)이 맡았다. 춘추 때의 세관은 주로 세습작위(世襲爵位)였으며, 작위에는 경(卿)、대부(大夫)、사(士)의 세 등(等)이 있었고, 매 등은 상、중、하의 세 급(級)으로 나누어졌다. 각 나라의 가장 중요한 관직은 세관(世官) 경이 맡았다. 그래서 “세경집정(世卿執政)”은 이 시기에 가장 두드러진 관제의 특징이었다.
“집정(執政)”은 정무를 총괄하고 이끈다는 의미이며, 나라마다 관직의 설치 또한 다 같지는 않았다. 동주 왕실의 초기에는 여전히 경사(卿士)를 두었는데, 나중에는 태재(太宰)가 집정하였다. 초나라에서는 처음에 막오(莫敖)라고 하다가 후에 영윤(令尹)이라고 칭하였다. 진(秦)나라에서는 서장(庶長)이라고 하였다. 제(齊)나라에서는 한 때 상(相)이라고 했는데, 관중(管仲)이 바로 당시에 유명한 상이었다. 송(宋)나라에서는 대윤(大尹), 정(鄭)나라는 당국(當國), 오(吳)나라는 태재, 진(晉)나라는 중군장(中軍將)으로 불렀다. 이는 진(晉) 문공(文公) 때에 상、중、하의 삼군(三軍)을 설치하고, 각 군에 장(將)、좌(佐) 두 사람을 두었는데, 경이 맡았기 때문에 중군장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집정에 있어 국군(國君)을 대신하여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최고 정무장관이었다. 집정관(執政官)에게는 또 좌조관(佐助官)이 있었다. 예를 들면 우경사(右卿士)에게는 좌경사(左卿士) 좌조(佐助)가 있고, 우상(右相)에게는 좌상(左相) 좌조가 있고, 태재(太宰)에게는 소재(少宰) 좌조가 있고, 영윤(令尹)에게는 좌(左)、우윤(右尹) 좌조가 있고, 당국(當國)에게는 청정(聽政)、소정(少正) 좌조가 있었던 것과 같다.
집정관아래에 여러 정무관(政務官)이 설치되어 있다. 어떤 나라에는 여전히 서주의 옛 제도를 사용하여 사도(司徒)、사마(司馬)、사공(司空)、사구(司寇) 등의 관을 설치했지만, 어떤 나라에는 변화가 발생하였다. 제(齊)나라의 사도는 예사도(銳司徒)、벽사도(辟司徒)로 나누었는데, 모두 군직(軍職)으로써 전자는 군사작전을 이끌고, 후자는 진영과 후방병참업무를 책임지며, 민사의 처리、토지의 관리는 별도로 대사전(大司田)을 두었다. 진(晉)나라에서는 사마、사공을 삼군장(三軍將)、좌(佐)의 아래에 두었는데, 사마는 군기(軍紀)를 책임졌고, 사공은 도로의 보수 정비를 책임졌다. 이밖에 또 군위(軍尉)가 있어 군정(軍政)을 주관하였고, 후암(侯庵)은 군사 정보를 책임졌다. 송(宋)나라는 사마를 사무(司武), 사공을 사성(司城)이라 불렀다. 초(楚)나라에서는 사마와 영윤의 다음으로 최고 무관이었다. 초나라의 고급 관원으로는 또 좌도(左徒)가 있는데, 왕의 좌우에서 계책을 내었다. 굴원(屈原)이 초 회왕(懷王)의 좌도가 된 적이 있다. 정(鄭)나라는 사구 외에 또 야사구(野司寇)를 두었는데 도성과 도성 이외의 형옥과 소송을 나누어 관리하였다. 그러나 초(楚)나라는 사구(司寇)를 사패(司敗)라고 불렀다. 각 나라는 종종 심문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직위를 설치했는데, 동주 왕실에 위씨(尉氏)가, 노(魯)나라에 사사(士師)가, 제(齊)나라에 대리(大理)가, 초(楚)나라에 정리(廷理)와 같은 것이 있었다. 각 국은 전송과 영접을 책임지는 관리를 행인(行人)이라고 했는데, 초나라만 연윤(連尹)이라고 하였다.
사(師)、부(傅)、보(保)와 사(史)、복(卜)、축(祝)에도 변화가 생겼다. 각 국은 보통 태보(太保)、태사(太師)、태부(太傅)를 설치하지도 않았고 집정도 하지 않았으며, 단지 관원에 대한 일종의 영예로운 칭호였을 뿐이었다. 동주 왕실의 사관에는 태사(太史)、내사(內史)가 있었고, 각 국에는 내사를 두지 않았으며, 태사(太史)가 기사(記事)를 관장하고 책명(冊命)을 관할하였다. 중국 고대 사관(史官)에게는 사덕(史德)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었는데, 춘추 때 사관의 태도가 특히 두드러진다. 예를 들면 제(齊)나라의 최저(崔杼)가 권력을 전횡하여 국군인 제 장공(庄公)을 살해하자 태사가 그 일을 기록하려 한 그를 살해하였다. 태사의 두 동생이 여전히 형의 뜻을 바꾸지 않자 역시 살해하였다. 태사의 가장 어린 동생이 계속 붓을 잡고 기록하려하자 끝내 최저가 임금을 시해한 일을 천하에 공포했던 것과 같다. 이러한 예와 같은 것은 아직 많이 있다. 종축관(宗祝官)을 노나라에서는 종백(宗伯)이라 칭했고, 다른 나라에서는 종인(宗人)이라 칭하였다. 임금의 궁중에는 악관(樂官)이 있었는데, 악사(樂師)、태사(太師)、무사(舞師)라고 칭했다. 부인(府人)은 임금의 진귀한 보배를 관장하였고, 늠인(廩人)은 창고를 관장하였다. 사궁(司宮)은 후궁(后宮)을 관장하는데, 항백(巷伯)、사인(寺人)、수(竪)등이 있으며, 내시인 엄인(閹人)이 담당하였다.
춘추 시기 각 나라의 지방 조직의 변화는 현(縣)、군(郡)의 출현으로 나타난다. 각 국의 군주는 비교적 작은 나라를 겸병하거나 자기 나라 대부(大夫)의 채읍(采邑)을 합병한 후에 종종 현이나 군을 행정구로 설치하곤 하였다. 기원전 493년에 조간자(趙簡子)는 군대에 맹서하는 말에서 “적을 이긴 자 중에 상대부는 현을, 하대부는 군을 받는다(克敵者, 上大夫受縣, 下大夫受郡)”[《좌전(左傳)․애공이년(哀公二年)》]고 했는데, 당시에는 현이 군보다 높았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현에는 현대부(縣大夫)를 두었는데, 초나라는 현윤(縣尹)、현공(縣公)이라고 칭했다. 현대부의 아래에 현사(縣師)、사마、사구가 있어 민사、군대、형옥을 분담하였다. 현의 각급 관원은 국군(國君)이 임명하였고 군대 역시 국군이 통일적으로 배치하였다.

 

(2) 전국(戰國)의 관제

 

전국시대의 관제에는 두 가지의 뚜렷한 특징이 있는데, 하나는 관제가 점차 관료제(官僚制)에 의해 대체되어 갔고, 다른 하나는 관이 문무(文武)로 나뉘어진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중원 각 국의 작위는 춘추시기와 서로 비슷했지만, 경은 상경(上卿)、아경(亞卿)으로, 대부(大夫)는 상대부(上大夫)、중대부(中大夫)로 나뉘어졌다. 초(楚)나라와 진(秦)나라의 작위는 중원의 각 국과 달랐다. 초나라의 가장 존귀한 작위는 통후(通侯)、집규(執珪)였다. 진(秦)나라는 공사(公士)、상조(上造)、잠뇨(簪裊)、대부(大夫)、관대부(官大夫)、공대부(公大夫)、공승(公乘)、오대부(五大夫)、좌서장(左庶長)、우서장(右庶長)、좌경(左更)、중경(中更)、소상조(少上造)、대상조(大上造)[대량조(大良造)라고도 칭함]、사거서장(駟車庶長)、대서장(大庶長)、관내후(關內侯)、철후(徹侯) 20급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진나라의 작위와 직관의 명칭은 어떤 경우에는 하나로 합치기도 하였다. 전국시기의 작위 수여는 춘추시기와 다르고 완전히 세관(世官)의 상징도 아니었다. 세관제(世官制)의 쇠락은 각 국의 개혁에 집중적으로 반영되었다. 예를 들면, 초(楚)나라의 오기(吳起)는 “영주의 자손은 삼대가 되면 작록을 회수하여야 한다(使封君之子孫三世而收爵祿)”[《한비자(韓非子)․화씨(和氏)》]고 제기하였고, 조(趙)나라의 임중련(任仲連)은 “현자들을 뽑아 훈련시키고, 관직을 맡겨 능력을 발휘하게 해야한다(選練擧賢, 任官使能)”[《사기(史記)․조세가(趙世家)》]고 제기하였으며, 한(韓)나라의 신불해(申不害)는 “임무에 따라 관직을 수여하고 명분에 따라 실무를 책임지게 해야한다(因任授官, 循名而責實)”[《한비자․정법(定法)》]고 제기한 것과 같다. 진나라의 상앙(商鞅)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종실의 귀족 중에 군공(軍功)이 없는 자는 관직을 얻을 수 없게 해야 한다고 제기하였다. 군공과 현능함이 차츰 작위를 수여하고 관직에 봉하는 원칙이 되자 이전의 세관(世官)들이 관직을 농단하는 국면이 바뀌었다. 세관제의 쇠락에 따라서 일종의 새로운 형태의 관료제가 싹텄다. 관료제와 세관제에는 네 가지의 구별이 있었다. 첫째, 국군이 아무 때건 관원을 임면(任免)할 수 있었다. 둘째, 대소 관원들 모두 도장(璽)에 의거하는, 즉 관인(官印)으로 권력을 행사하였다. 셋째, 관원은 통상 실물의 봉록을 수령하는 것으로 과거의 채읍(采邑)을 대신하였다. 넷째, 국군은 시기를 정하여 관원에 대해 심사하였다. 전국시기에 관료제는 비록 완전치는 않았다고 하나 진나라 이후 중국 관료 메카니즘의 발전에 기초가 되었다.
관(官)은 문무로 나뉘어져 상(相)과 장(將)의 설치로 구현되었다.
국군 아래 최고의 직위는 상으로, 상방(相邦)으로도 칭했다. 1974년 섬서성(陝西省) 임동현(臨潼縣) 진시황릉(秦始皇陵) 병마용(兵馬俑) 갱에서 출토한 기물 중에 “삼 년에 상방 여 모모가 만들었다(三年相邦呂□□造)”는 명문(銘文)이 바로 그것이다.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초(楚)나라의 상 관직만 여전히 영윤(令尹)이라고 칭하였다. 상은 국군의 조수이자 백관의 장으로서 조정의 사무를 책임졌다. 상은 춘추시기의 집정관과 서로 비슷한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상은 일반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전쟁에 나아가지 않았으며 통상 문관이 맡았다. 상 아래 정무관은 주로 춘추시기의 제도를 따랐는데, 사도(司徒)、사마(司馬)、사공(司空)、사구(司寇) 등이 있었다. 초나라의 좌도(左徒)는 그 지위가 높아 중원 각국의 사도에 해당하였다. 제나라의 상 아래에는 5대 행정관이 있었는데, 이를 “오관(五官)”이라고 했다. 오관은 다음과 같았다. 대전(大田)은 농사를 관장하였고, 대행(大行)은 빈객(賓客)에 대한 예의를 주지하였고, 대간(大諫)은 군주의 득실을 규간하는 책임을 졌고, 대사마(大司馬)는 군대 일과 정벌을 관장하였고, 대리(大理)는 형옥(刑獄)과 사법을 관장하였다. 오관 외에 또 배웅과 영접을 책임지는 주객(主客)이 있었고, 사사(士師)는 궁궐 안에서의 법 집행을 관장하였다. 진나라는 정위(廷尉)가 사법(司法)을 주관하였다. 조(趙)나라는 전부리(田部吏)가 조세의 징수를 주관하였고, 중위(中尉)가 관리의 선임을 주관하였다.
전국시기의 장(將)과 춘추시기의 장에도 다른 점이 있었다. 춘추시기 진(晉)나라의 삼군장(三軍將)은 군무(軍務)와 정무(政務)를 다 관장했는데, 전국시기의 장은 최고의 무직관(武職官)으로, 보통 병법에 밝은 사람이 담당하였다. 조나라의 염파(廉頗)、연(燕)나라의 악의(樂毅)、제(齊)나라의 전기(田忌)는 모두 일세를 빛낸 명장들로서 그 예로 삼기에 충분하다. 장의 지위는 상의 다음이고, 상과 장은 국군의 좌우 팔이었다. 희극(戱劇) 중 《장상화(將相和)》에 조나라의 상(相)인 인상여(藺相如)와 장인 염파가 공동으로 조왕(趙王)을 보좌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 시기 관제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하겠다. 진(秦)나라의 장은 고정된 관직이 아니어서 군대가 출정할 때 임시로 임명되는 통수(統帥)가 될 뿐이고, 군정(軍政)을 장악하는 데에는 달리 국위(國尉)의 관직을 두었다. 그러나 조나라의 국위(國尉)는 장의 아래에 두었다. 제(齊)나라 역시 군사(軍師)를 두고서 군의 일에 조언하는 것을 책임지게 했는데, 유명한 군사가(軍事家) 손빈(孫臏)이 이 직(職)을 맡은 적이 있다. 초(楚)나라의 무관(武官)에도 주국(柱國)이 있었는데, 진(秦)나라의 중위(中尉)와 같았으며, 모두 수도의 방위를 맡던 고급 무관이었다.
전국 시기에 각 국 군주의 권력이 확대되자 군주를 위해 일하는 관직도 따라서 많아졌다. 진(秦)에는 일종의 정무관(政務官)인 장사(長史)가 있었다. 각 국 군주의 곁에는 비서 성격의 서로 다른 칭호를 가진 관원인 어사(御史)、주서(主書)、장서(掌書)、어서(御書) 등이 있었다. 이밖에 각 국에는 또 국군과 태자의 보필관(輔弼官)인 사(師)、부(傅)를 설치하였다. 초(楚)나라는 삼려대부(三閭大夫)를 별도로 두었는데, 왕족 중 소(昭)、경(景)、굴(屈) 세 성씨 자제(子弟)의 교육을 책임졌다. 삼려대부의 설치는 비교적 빨랐으며, 춘추 때의 저명한 시인 굴원(屈原)도 이 직무를 맡은 적이 있다. 각 국 군주의 고문이 되는 관원을 박사(博士) 혹은 박문사(博聞師)라고 하였다. 진(秦)나라에서는 궁정의 경위(警衛)를 관장하는 관원을 위위(衛尉)라고 칭했으며, 모의를 책임지는 관원을 중대부령(中大夫令)으로 불렀고, 거마를 관장하는 관원을 거부령(車府令)이라고 하였다. 각 국은 빈객(賓客)의 접견을 책임지는 관원을 알자(謁者)라고 칭하였다.
군현제(郡縣制)는 전국 시기에 이미 완전히 확정되었고, 군(郡)은 현(縣)보다 컸다. 군의 장관을 수(守)라하고, 한 군의 행정 및 군대와 방비를 관할하였다. 수 아래에 위(尉)를 두어 한 군의 군무(軍務)를 분담하였다. 현의 장관을 영(令)이라 했는데, 제(齊)나라는 간혹 현대부(縣大夫)라고 칭하였고, 진(秦)나라는 대색부(大嗇夫)라고도 하였다. 현령(縣令)은 한 현의 사무를 주관하였고, 그 아래에 승(丞)、위(尉)、사마(司馬)、사공(司空) 등의 관을 두었다. 현승(縣丞)은 재정과 사법을, 현위(縣尉)는 군무(軍務)를, 사마는 마정(馬政)을, 사공은 건축의 공정과 형도(刑徒)를 분장하였다. 영(令)、승、위、사마、사공의 아래에 무슨 무슨 사(某某史)라고 하는 속리(屬吏)가 있었다. 이런 “사(史)”자를 지닌 관리는 보통 문서관(文書官)이었다. 진(秦)나라는 변방 지역에 현에 해당하는 도(道)를 설치했는데, 그 장관을 도색부(道嗇夫)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