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古代官制

一、先秦의 官制 2. 商朝의 官制

마장골서생 2009. 3. 2. 19:45

王天有 著 / 李商千 譯, <中國古代官制>, 학고방, 2006.

 

2. 상조(商朝)의 관제

 

상(商) 왕조(기원전 16세기-기원전 11세기)는 은(殷)으로도 칭하는데, 하 왕조의 뒤를 이은 두 번째 노예제 왕조이다. 상조(商朝)에 왕은 여전히 최고 통치자였으며, “일인(一人)” 、“여일인(予一人)”이라고도 칭했는데, 왕권이 하조보다 강화되었다는 점을 나타낸다. 상조는 태을(太乙)[탕(湯)]에서 제신(帝神)[주(紂)]까지 모두 30명의 왕이 있었다.
상조는 관리(官吏)제도상에서 “내복(內服)”과 “외복(外服)” 두 부류로 나누었다. 내복관(內服官)은 중앙과 왕기(王畿) 안의 관리를 가리키고, 외복관(外服官)은 왕기 외 및 변경지역의 관리를 가리켰다. 대우정(大盂鼎) 명문(銘文)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殷?[邊]?田[侯甸]雩[與]殷正百辟
“은정백벽(殷正百辟)”은 내복관의 개괄이다. “백벽(百辟)”은 즉 백관(百官)、중관(衆官)이다. “은변후전(殷邊侯甸)”은 외복관의 개괄이다. “후(侯)、전(甸)”은 외복관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관(官)의 호칭이었다.

 

(1) 은정백벽(殷正百辟)

 

내복관(內服官) 중에 중요한 것은 “윤(尹)”、“재(宰)”、“경사(卿事)”와 “삼공(三公)” 등이다. 윤은 다스린다(治理)의 의미로 왕의 좌우에서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보좌한다. 상대(商代) 최초의 명신(名臣)을 이윤(伊尹)이라고 불렀다. 이(伊)는 성이고 윤(尹)은 관명(官名)이었다. 이윤은 출신이 미천했으나 상왕(商王) 탕(湯)에게 신임을 받아 재상에 올랐다. 현재 여러 학자들은 “상(相)”은 상대의 정식 관명이 아니라 전국(戰國) 이전의 “상”은 동사였을 뿐으로 보좌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에 근거하면 윤은 상왕을 보필하는 대신(大臣)이다.

그림1  대우정(大盂鼎)의 명문(銘文) [我聞殷墜命唯殷邊侯甸與殷正百辟率肆于酒]

탕(湯)、외병(外丙)、중임(仲壬)의 세 왕이 앞뒤로 세상을 떠나자 이윤이 태갑(太甲)을 왕으로 세웠다. 태갑은 포학무도하여 이윤에 의해 추방되고 이윤 스스로 섭정하였다. 후에 태갑이 회개하자 이윤은 그제야 그를 맞아들였다. 윤의 직위가 높고 권세가 중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재(宰)는 내정(內廷)의 사무를 주관하는 관원으로 어떤 때는 외정(外廷)의 사무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무정(武丁)이 상왕이 되었을 때 “백관들이 저마다의 직분을 다했고 총리격인 대재의 말만으로 정치를 삼 년 간 해 나갔다(百官總己, 以聽于冢宰三年)”[《논어(論語)․헌문(憲問)》]. 경사(卿事)는 후세에 경사(卿士)라고도 했는데, 고급 관리의 범칭(泛稱)이 되었다. 삼공(三公)은 바로 사람에 따라 설치한 일종의 존귀한 관칭(官稱)이었다. 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상조(商朝)때 삼공으로 칭해졌던 이들은 문왕(文王)、구후(九侯)、악후(鄂侯)、이윤(伊尹)、부열(傅說) 다섯 사람뿐이었다.
사관(史官)、종교관(宗敎官)은 내복(內服) 중에서도 특수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사관은 문헌 중에는 사(史)와 내사(內史)가 있고, 갑골문 중에는 대사(大史)、소사(小史)、동사(東史)、서사(西史) 등이 있다. 사관은 항상 상왕의 좌우에 있으면서 기사(記事)를 관장했는데, 일이 생기면 의견을 발표할 수도 있었다. 이밖에 또 수장사(守藏史)가 있는데, 전문적으로 공문서를 관리하였다. 종교관에는 복(卜)、축(祝) 등이 있다. 복은 정인(貞人)이라고도 하는데 점복을 주관하는 관원이다. 상왕의 수명(受命) 및 제사、전쟁 등 활동에 모두 점복을 치곤 해서, 상조에는 방대한 정인집단이 있게 되었으며, 다복(多卜)이라고 하였다. 축은 제사 때 귀신에게 고하는 책임을 지는 관리이다.
상조에는 많은 관명에 사장(師長)、태사(太師)、소사(少師)、사보(師保) 등과 같이 “사(師)”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함의는 아주 달랐다. 당시에 군대는 사(師)로 편제했는데, 사장(師長)은 고급무관이었다. 태사、소사는 음률에 정통한 악사(樂師)였다. 저명한 악사를 사연(師涓)[사연(師延)이라고도 함]이라고 하는데, 주왕(紂王)을 위해 “음란한 음악(靡靡之樂)”을 만들었다. 상(商)의 주왕이 망국의 군주였던 때문에 후에 음란한 음악을 “미미지음(靡靡之音)”이라고 하였다. 사보의 경우는 오로지 이윤(伊尹)을 가리켰다. 성탕(成湯) 후로 이윤은 계속해서 몇 몇 어린 군주를 보좌했는데, 조정에서 덕망이 가장 높은 사람이어서 사보로 존칭하였다. 이윤은 또 아형(阿衡)이라고 했는데, 동한(東漢) 사람 정현(鄭玄)은 “아는 의지하는 것이고 형은 평평한 것이다. 이윤과 탕이 의지하여 평안함을 취하기 때문에 관명으로 삼았다(阿, 倚; 衡, 平也. 伊尹湯所依倚而取平, 故以爲官名)”[《시경(詩經)․상송(商頌)․장발(長發)》]고 하였다.
흔히 보이는 관명에 또 소신(小臣)이 있었다. 다른 소신은 그 지위도 달랐다. 이윤을 이소신(伊小臣)이라고도 했는데, 지위가 아주 높았다. 그러나 소적신(小耤臣)[노예(奴隸)와 경적(耕籍)을 관장]、마소신(馬小臣)[양마(養馬)를 관장] 등의 지위는 비교적 낮았다. 소신의 용법과 가까운 것으로는 또 윤(尹)、아(亞)、사(事) 등이 있다. 이윤의 윤은 상왕(商王)의 보필관(輔弼官)이었다. 다윤(多尹)에는 다른 해석이 있는데, 일반적으로 상대(商代)의 기층조직은 종교와 유관하고, 족윤(族尹)은 기층 행정관리라고 여겼다. 아는 무관인데, 흔히 보이는 것으로는 대아(大亞)、다아(多亞)、마아(馬亞)、사아(射亞)가 있다. 당시에 전쟁에는 전차를 사용했는데, 말이 전차를 끌었기 때문에 마아(馬亞)의 지위가 가장 높았고, 대아、다아는 마아의 아래에 위치하였다. 사아는 사수(射手)를 관리하는 무관이었다. 사(事)는 경사(卿事) 외에도 어사(御事)、아사(我事)、동사(東事)、남사(南事)、북사(北事)、서사(西事)、대사(大事)、소사(小事) 등이 있었다. 사직(事職)의 수는 비교적 많았으며 조정(朝廷)의 각 부문에 분산되어 구체적인 행정사무를 처리하였다.
그밖에 또 관리대상을 관명으로 하는 경우도 있는데, 견관(犬官)[화견(畵犬)、이견(夷犬) 등)같은 것으로 사냥 성격의 관원에 속하였다. 사공(司工)、사어(司魚)는 각각 수공업과 양어업을 책임지는 관원이었다.

 

(2) 은변후전(殷邊侯甸)

 

상조(商朝)에는 후(侯)、전(甸) 외에도 남(男)、위(衛)、방백(邦伯) 등이 있었다. 후는 분봉된 제후이다. 전은 “전(田)”이라고도 쓰는데, 임무는 상 왕조를 위해 “농토를 관리하여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것이었다(治田入谷)”. 남을 “임(任)”으로 쓰기도 하는데, “왕의 일을 맡은 자(任王事者)”라는 뜻으로 대부분 왕실의 잡무를 책임졌다. 위는 상왕(商王)을 위해 지방을 지키는 직분이었다. 방백은 갑골문 중에 “무슨 방백(某方伯)”、“무슨 백(某伯)”이라고 되어있는데, 독립성이 비교적 강해서 어떤 방백은 한 제후의 수령(首領) 혹은 맹주(盟主)이기도 하였다. 후、전、남、위、방백은 주로 상왕(商王)의 여러 부인、아들、공신 및 상(商)에 복종하는 부족의 수령들이 맡았다. 그들은 상왕에게 모두 일정한 의무를 졌는데, 평상시에는 상왕을 위해 변방을 지키고, 전쟁이 났을 때는 군대를 출정시키는 동시에 왕실을 위해 복역(服役)과 진공(進貢)을 해야했다. 그 중에 어떤 후백(侯伯)은 내복관을 겸임하기도 했는데, 주(周) 왕조의 조상이 후로 봉해져 주 문왕(文王) 때 서백(西伯)으로 불리는 동시에 주왕(紂王)의 삼공(三公)이기도 했던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