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莊子淺說

7. 오고 가는 것과 같은 삶과 죽음

마장골서생 2009. 2. 8. 21:16

7. 오고 가는 것과 같은 삶과 죽음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이것은 영원히 풀지 못할 수수께끼로 어두운 장막 속에 몸을 숨긴 것처럼 신비롭다.
삶이 있으면 반드시 죽음이 있는 법, 죽음은 인생의 종결이다. 인생은 바로 이 종결로 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생명의 과정에서 죽음의 요소는 언제나 사람의 몸에 잠복해 있다가 일단 나타나면 사람의 생명은 종지를 고하게 되고, 그 사람은 외재하는 세계 및 다른 인류의 모든 관계와도 이로부터 단절된다.
사람이 늘 죽음을 얘기하면서 사망을 두려워한다지만 이것은 “다른 사람의 죽음”에 대한 느낌일 뿐 자신은 겪어보지 못한 것으로, 살아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동시에 죽는 경험은 영원히 없다는 것이다. 죽음은 개인의 일로서 어떠한 사람도 대신할 수 없고, 누구든 반드시 죽음에 직면하게 되며,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없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완전히 도움이 전혀 없는 고립된 경계로 빠지게 된다. 이 때문에 한 사람이 자신의 존재가 종점으로 향해 가는 것을 보았을 때 두려움에 떠는 마음을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사망에 직면하는 두려움을 장자는 대범한 심경을 길러 제거하였다.
먼저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할 만한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할 가장 큰 원인은 사후의 고통에 대한 걱정보다 더한 것은 없다. 그러나 사후의 상황은 도대체 어떤 모양일까? 변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라지는 것일까? 만약에 변한다면 신학자들이 말한 것처럼 영혼은 장차 이 세상에서 피안으로 인도되는 것이고, 만약에 사라지는 것이라면 죽음은 곧 무의식의 일이다.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보면 사후에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면 죽음은 행복한 일이 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고통이 끝났음을 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사후에 내세가 있다면 죽음은 여전히 행복한 일에 속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그가 내쫓기거나 사형에 처해지는 소란을 받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은둔사상을 지녔던 소크라테스는 후자의 주장에 동의하여 플라톤의 대화록《파이돈phaedon편》에서 그는 더욱 힘주어 영혼은 환생할 것이라고 해명하였다. 이와는 반대로 에피쿠로스(Epikuros) 학파는 영혼불멸설을 힘써 타파했는데, 그들은 모든 불후의 사상을 제거하면 죽음에 대한 공포감도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죽음이란 하찮은 것이어서 우리가 살아있든 죽었든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다고 말이다. 만약 ‘살아있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여전히 우리들에게 소중하기 때문이다. 만약 ‘죽었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역시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공포는 곧 살아있는 자의 의식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죽음은 곧 존재하지 않게 되고, 때문에 우리는 죽음과 영원히 만나지 않을 것이다.
장자의 관점은 우리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는 소크라테스처럼 현실세계에서 받는 자신의 재난을 보완하기 위하여 내세를 생각하며 ‘阿Q’ 식의 만족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그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주장에 접근하는 편으로, 죽음은 두려울 것이 못된다고 여겼다. 그러나 에피쿠로스 학파는 죽음이 단지 “꿈이 없는 수면”을 닮았다고 여겼고, 장자는 그것을 “꿈속의 수면”으로 여겼다. 인생이 꿈속에 있는 것과 같다면 사후에도 여전히 의식활동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과 같다. 이를테면 莊周가 나비로 화한 후 “훨훨 날아다녔다(栩栩然而飛)”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후에도 의식활동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단지 문학가의 상상일 뿐으로 사람들에게 공인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장자도 문학가의 상상에 그쳤을 뿐 결코 종교가의 환상, 즉 천국을 날조하여 자신을 속이거나 대중을 미혹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장자가 사후에 나비로 화했다는 우화의 경우, 가장 큰 의도가 바로 죽음의 고통에 대한 사람들의 걱정을 제거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모습을 바꾼 나비를 빌어 죽음을 미화했던 것이다.
장자의 의식 중에 죽음은 “아무런 구속 없이 갔다가 자유자재로 오는 것(翛然而往, 翛然而來而已矣)”에 불과할 뿐이다.(《大宗師》) 그래서 우리는 구애되지 않는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런 관점을 장자는 진일(秦失; 秦佚이라고도 하며, 노담의 친구이다)이 老聃의 죽음을 조문했던 이야기를 빌어 생생하게 나타내었다.

 

노담이 죽자 그의 친구인 진일이 조문을 가서 세 번 소리내어 울고 난 후 바로 나왔다.
노담의 제자가 묻기를 “선생께서는 우리 스승님의 친구가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진일이 대답하기를 “그렇다네”라고 하였다.
제자가 또 묻기를 “그렇다면 친구를 이렇게 조문해도 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진일이 대답하였다. “괜찮다네. 이전에 나는 그대들이 오랫동안 선생을 따랐기 때문에 세속을 초탈한 사람들인 줄로 알고 있었는데 오늘 보니 결코 그렇지 않았네. 방금 내가 빈소가 차려진 방에 들어가 조문을 하는데, 나이 많은 사람들은 부모가 자기 자식을 곡하듯이 하고, 젊은 사람들은 자식이 부모를 곡하듯이 하였다네. 이로부터 미루어 보건대 나이가 든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모두 이렇게도 슬프게 곡을 하니 틀림없이 망자와 정감이 아주 깊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애도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떠들어대고, 곡을 할 필요도 없는데도 곡을 하는 것일 것이네. 이런 태도는 자연에서 도피하는 것이고 실정에 어긋나는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에 장단이 있음을 망각하는 것이라네. 옛날에 사람들은 이런 태도를 자연에서 위배되는 과실이라고 하였다네. 와야할 때 그대들의 스승인 노담도 때에 맞춰 태어난 것이고, 떠나야할 때 노담도 도리에 맞게 죽은 것이라네(자연의 변화에 따라 생명도 사라진다). 천리와 운명에 만족하고 자연과 변화에 순종하면, 슬픔과 즐거움은 마음 속에 들어올 수 없다네. 옛날에는 이것을 속박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이라고 하였다네.”(《養生主》)

 

세속의 사람들 가운데 속박이라는 고통 상태에서 생활하지 않는 경우가 없는데, 가장 큰 멍에는 인류 자신이 삶과 죽음의 생각―죽음의 공포와 삶의 욕망―에 의해 갇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만약 삶과 죽음을 가고 오는 것처럼 여길 수 있다면―훌쩍 왔다가 훌쩍 가버릴 수 있다. 갑자기 갔다 갑자기 오듯이 “천리와 운명에 만족하고 자연과 변화에 순종하면서(安時而處順)” 삶과 죽음을 도외시하고 세속의 인정에 구속받지 않으면 “고통에서 해방(懸解)”되는 것처럼 곤경을 제거하는 것과 똑같다. 이러한 심경에 도달한 사람은 삶과 죽음이 하나처럼 보인다. 삶에 대해서 기뻐할 필요도 싫어할 필요도 없고, 죽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두려워할 필요도 즐거워할 필요도 없다. 사람은 천지간에서 태어나 노동과 휴식 삶과 죽음 모두 지극히 자연적인 일이니 마음 편하게 이를 대해야 할 것이다.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대지는 나에게 형체를 주고는 생존으로써 나를 수고롭게 하였고, 노쇠로써 나를 한가롭게 하였으며, 죽음으로써 나를 쉬게 하였다. 그래서 나의 존재를 좋은 일로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죽음도 좋은 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大宗師》)

 

장자는 “나의 존재를 좋은 일로 간주하는 것이야말로 나의 죽음도 좋은 일로 간주할 수 있다(善吾生者, 乃所以善吾死也)”고 하였다. 건전한 일생을 보내는 것이야말로 원만한 죽음을 누리는 것으로, 삶을 긍정하는 것이 곧 죽음을 긍정하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죽음의 가치는 삶이 긍정되는 데에 달려있고, 죽음의 의의는 삶이 부여되는 데에 달려있다. 당신이 만약 당신의 삶을 주관할 능력이 있다면 당신도 당신의 죽음을 소멸시킬 권한이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삶(生)”을 긍정하는 것이 실제로 가장 중요한 일에 속한다.
이로부터 장자의 생사관념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며, 출세적인 것은 더욱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逍遙遊》안 鯤鵬의 우언 속에서도 인간 세상에 대한 그의 심경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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