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莊子淺說

4. 절친한 벗 혜시

마장골서생 2009. 2. 6. 13:06

4. 절친한 벗 혜시

 

장자의 이런 활달한 심경은 부귀영화를 헌신짝처럼 보았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의 고상한 생활정취는 자연스럽게 일반대중과 사회집단을 초월하였다. 그의 눈에 “도에 대해 더 이상 더불어 이야기 할 수 없을 정도로 천하가 혼탁해진 것(以天下爲沈濁, 不可與莊語)”으로 비친 것도 이상할 것 없다.(《天下》) 기왕에 이렇게 여기고 있었다면 “홀로 천지의 영묘한 정신과 더불어 행동할(獨與天地精神往來)”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자와 같은 이런 총명한 사람은 한 두 사람의 지기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다. 평소에 말이 통하는 친구로 惠子 외에는 아마 더 이상 없을 것이다. 그들 두 사람은 변론을 좋아하여 그 말솜씨가 비할 수없이 날카로웠다. 또 두 사람은 박학다식하여 토론에 강한 열성을 보여주었다.
혜자는 나무 아래에 등을 기대고 펼치는 고상하고 오묘한 담론을 좋아하였고, 그러다가도 피곤하면 곧장 거문고를 베고 누워 쉬었는데(“倚樹而吟, 據槁梧而暝”), 이런 태도에 대해 장자는 어색해했지만 그도 늘 혜자에게 이끌려 오동나무 아래에서 학문을 논하기도 하였고(“惠子之據梧也……”), 들판으로 나가 거닐기도 하였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변론이 바로 그들이 산보할 때 생긴 것이다.

 

장자와 혜자가 濠水의 다리 위에서 산보하고 있었다.
장자가 말하기를 “피라미가 한가로이 헤엄쳐 다니고 있군. 저게 녀석들의 즐거움이겠지!”라고 하였다.
혜자가 묻기를 “자네는 물고기도 아니면서 어떻게 물고기가 즐거워하는지를 아는가?”라고 하였다.
장자가 대꾸하기를 “자네는 내가 아니거늘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를 거라고 여기는가?”라고 하였다.
혜자가 따지기를 “내가 자네가 아니기 때문에 물론 자네를 모르네. 이를 기준으로 유추해본다면, 자네는 물고기가 아니네. 그렇다면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은 분명할 걸세!”라고 하였다.
장자가 대답하기를 “얘기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생각해 보세. 자네가 방금 내게 ‘물고기가 즐거워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는 말을 한 것은 바로 나의 뜻을 알고 내게 물었던 것일 테니 내가 호수의 다리 위에서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 수 있다는 것이네”라고 하였다.(《秋水》)

 

외부세계에 대한 장자의 인식은 늘 감상하는 태도를 지니고 있다. 그는 종종 주관적 감정을 외물에다 발양시켜 공감하는 작용을 일으킨다. 혜자는 이와 달리 분석의 입장에 서서 사리나 가치의 실재성을 분석한다. 이 때문에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장자의 소위 “참(眞)”이라는 것에 의심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장자와 혜자의 변론을 “인식활동”의 측면에서 본다면 두 사람의 논설은 충돌한 적이 없다. 사물의 아름다움(美)․즐거움(悅)․감정(情)을 감상하는 측면에서 말하자면 두 사람이 언급했던 것도 서로 간섭되지 않는다. 그리고 단지 다른 입장과 경계 위에 단언하는 것(“물고기가 즐거워하는 것을 안다”)도 있고, 의심하는 것(“자네가 물고기가 아니니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은 분명하네!”)도 있다. 그들은 인지의 태도에 현격하게 다른 점이 있다. 장자는 미학상의 감상에 치우쳤고, 혜자는 지식론의 판단을 강조한다. 이 서로 다른 인지태도는 그들 성격상의 차이로 말미암은 것이다. 장자는 예술가의 풍모를 지니고 있고, 혜자는 논리가의 개성을 가지고 있다.
장자와 혜자는 성격의 차이로 말미암아 서로 다른 기본입장을 야기하였고, 나아가 두 가지 대립하는 사고의 맥락, 즉 세속에 구애받지 않는 초연함을 초래하지만 또 사물 자체로 돌아와 그 아름다움을 감상한다. 자아를 중시하는 走向獨我論은 사람들이 어쨌든 제3자의 마음상태를 알 수가 없다.
장자와 혜자는 기본관점의 차이로 말미암아 문제를 토론할 때에 늘 서로 언쟁을 하지만 매를 맞는 쪽은 언제나 혜자인 것 같다.《逍遙遊》에서 장자는 혜자의 “큰 사물 사용의 서투름(拙于用大)”을 비웃었고,《齊物論》에서 그를 비평하여 “결코 다른 사람에게 밝혀야 할 것도 아닌 것을 남에게 강요하려고 했기 때문에 혜자는 평생 ‘堅白論’에 가려졌다”고 하였다.[“밝히지 않아야 할 것을 세상에 밝혀 이 때문에 견백론과 같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의론에 빠져 생을 마쳤다(非所明而明之, 故以堅白之昧終)”];《德充符》에도 혜자를 비평하기를 “정력을 소비해가며……견백론에 자신만만해 하였다”고 하였다. 이러한 비평들은 장자가 자신의 철학관점을 가지고 혜자를 통해 자신의 뜻을 토로하는 데에 그 의도가 있는 것들이다.
이밖에도《秋水》편은 혜자가 梁나라의 재상이 되었을 때 장자가 그를 만나러 갔는데, 장자가 혜자의 재상자리를 대신하러 온 것이라는 유언비어를 기록하고 있다. 혜자는 속으로 당황해하며 곧장 사람을 보내 3일 밤낮을 나라안에서 장자를 찾도록 하였다. 후에 장자가 혜자를 만나러 갔을 때 그에게 寓話 하나를 얘기해주면서 그의 재상 지위를 부엉이가 냄새나는 쥐를 물고서 잘났다고 여기는 것에다 비유하였다. 이 이야기는 아마도 그의 제자들이 假託했을 것이다. 그러나 장자와 혜자는 현실생활에서 확실히 큰 차이가 있다. 혜자는 통치계층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관료적 분위기에 물들 수밖에 없었으니, “부귀영화를 얻었다고 해서 마음대로 행동하지 않고, 더없이 곤궁해도 속인들처럼 행동하지 않는(不爲軒冕肄志, 不爲窮約趨俗)” 장자에게 있어 경시되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전설에 혜자가 孟諸라고 하는 宋나라의 연못을 지나가는데, 뒤따르는 수레가 百乘이나 되어 그 기세가 대단하였다. 장자가 이 광경을 보고는 곧장 자기가 낚은 물고기조차도 많다고 물에 도로 놓아주었다.(《淮南子․齊俗訓》)
그들 두 사람은 현실생활에서도 여전히 거리가 있었고, 학술상에서도 서로 대립하였다. 그러나 우정에 있어서 혜자는 확실히 장자의 일생동안 유일한 친구였다. 혜자가 죽은 후에 장자가 지은 기념사에서 그 사실을 엿볼 수 있다.

 

장자가 어떤 사람의 장례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는 길에 혜자가 묻혀있는 무덤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장자는 뒤를 돌아보며 뒤따라오는 자에게 말했다. “楚나라 郢땅의 미장이가 회반죽을 파리 날개만큼 자신의 콧등에 바르고, 친구인 목수 石에게 깎아내도록 청했다네. 석은 손도끼를 휙휙 소리가 날 정도 힘차게 휘둘러 손쉽게 미장이 콧등의 회반죽을 깎아내었지. 회반죽이 완전히 깎여나갔는데도 콧등에는 아무런 상처를 입지 않았고, 미장이도 꼿꼿이 선 채 얼굴색도 바꾸지 않았다네. 宋나라의 元君이 이 일을 전해듣고는 목수인 석을 불러 말하기를 ‘나를 위해 그 재주를 보여주겠느냐’”라고 하니, 석이 말하기를 ‘저는 전에는 깎아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저의 둘도 없는 상대가 이미 세상을 떠나버렸으니……’라고 했다네. 혜자가 세상을 떠났으니 나도 상대가 없어진 셈이지. 더불어 말싸움할 상대가 없어진 거라네!”(《徐無鬼》) 
 
혜자가 죽고 난 후 장자는 다시는 더불어 논쟁할 상대를 찾을 수 없었다. 지극히 짧은 이 우화에 순박하고도 진지한 마음이 드러나고 있다. 재미있는 우화를 설정하여 그와 죽은 자의 우정을 비유할 수 있었던 이런 신묘한 글재주는 장자가 아니면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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