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莊子淺說

6. 꿈에서 나비가 되다

마장골서생 2009. 2. 8. 21:10

6. 꿈에서 나비가 되다

 

《齊物論》의 결말 부분에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莊周의 나비의 꿈(胡蝶夢)이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 자신이 나비가 된 것을 보았는데,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였다. 너무도 즐겁고 흐뭇해서 자신이 본래 장주라는 것을 모를 정도였다. 갑자기 잠에서 깨어나니 여전히 장주였다. 장주가 꿈에서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서 장주가 된 것인지 헷갈렸다. 장주와 나비는 분명 구별이 있을 텐데, 이것이 사물과 나의 교합과 변화라는 것이다.

 

장자는 나비의 꿈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었다. 아주 짧은 이 우화 속에서 다음 네 가지의 개념을 도출해낼 수 있다.
1. 장주가 나비로 변했다는 사실의 함의;
2. 나비 자체가 대신하는 의의;
3. 인생이 꿈과 같다는 견해;
4. 物化의 관념.

 

1. 장주가 나비로 변했다는 것은 바로 인간이 外物과 일치하거나 교감하는 것을 상징한다.
인간이 外界와 융화하고 교감할 수 있을까? 그 사이에 필연적인 관계가 존재하고 있을까? 이것은 철학상의 오래된 문제이다. 만약에 인식의 태도로 연구한다면 이것은 인식론상에서 역대로 적지 않은 서양의 철학자들이 상반되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견해가 만약 不可知論의 범주로 떨어졌을 때는, 인간과 외계의 분리는 극복할 방법이 없게 될 것이다.
이 문제가 장자에 손에 들어오면서 방향을 바꾸었다. 그는 認知의 입장에서 묻지 않고 美感의 태도로 감상하고 있다. 감상할 때 깊은 공감을 발하여, 스스로의 감정을 투사하고, 이로써 外物과 회통교감시켜 정신이 집중되는 경지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러면 物我의 경계는 해소되거나 융화되어 혼연일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모두 미학적 인상으로 체득하는 것이지 결코 과학적 분석으로 이해할 수는 없다.
장자는 “미감의 경험”을 통해서, 나비로 변화하는 우화를 빌어 자신의 잘못된 고집을 타파하였고, 物我의 분리를 제거하여, 인간과 外在自然世界로 하여금 하나의 조화로운 存在體로 융화되도록 하였다.

 

2. 장자는 自我나 개인의 변형을 나비(蝴蝶)로 삼아 人性의 순수함과 자유로움에다 비유하였다.
반대로 현대인을 살펴보면 겹겹의 구속을 받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문학가 카프카(F. Kafka)의 우화《변신(變形記)》중에 남김없이 드러난다. 우화의 이야기는 이렇다. 하루는 그레고르가 꿈에서 깼는데, 갑자기 자신이 바퀴벌레로 변하여 침대에 누워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레고르는 출장판매원으로,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에는 열차에 올라 회사에 도착해 지시를 받아 각처로 다니며 면직물을 팔아야 했다. 상사의 얼굴과 단조로운 출장업무는 그를 지겹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아버지를 대신해 채무를 상환해야하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이 참을 수밖에 없었다. 이날 그레고르는 악몽에서 깨어나 자신이 이미 원래의 사람 모습이 아닌 커다란 바퀴벌레로 변한 것을 발견하였다. 그는 침대에서 기어 나와 아침출근기차를 타려고 갔지만 자신의 행동에 힘이 들었고, 말도 모호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 우화가 사람들에게 중시되는 이유는 그것이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무척 많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그레고르의 처지로 현대인들이 받는 시간강박감․공간구속감․외부세계와의 소외감 및 현실생활의 핍박감……을 대신하였다.
만약 우리의 시선을 현재로 옮겨 본다면, 우리는 금방 현대인들이 거대한 기계를 발명하여 스스로를 기계의 노예로 만드는 이런 자승자박의 상황을 느낄 것이다. 바로 카프카가《굴(洞穴)》에서 묘사한 것과 같다. “개인은 분명 모종의 동물로 변해 굴속에서 출구를 하나씩 만들면서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지만 영원히 굴을 나갈 수 없다”. 이것이 현대인들의 가장 깊은 비애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층 더 장자의 나비가 상징하는 깊은 의미를 체득할 수 있다.
장자는 카프카처럼 사람을 동물(나비)로 바꾸었지만 그는 나비를 빌어 인류의 “속박 없는 즐거움(自適其志)”에다 비유하였다. 나비는 팔랑팔랑 춤추듯이 이리저리 날며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유유자적하게 날며 시간의 재촉도 받지 않는다. 훨훨 날아다니는 것이 낡은 규칙의 제약도 없고 계율의 중압감도 없다. 동시에 나비가 햇빛․공기․꽃송이․과수원 속을 유유히 날아다니는 이것은 인생이 나비처럼 아름답고 즐거운 세계 속에 머물기를 상징한다. 게다가 따스한 햇살․신선한 공기․아름다운 꽃송이 및 향기로운 과수원 사이에서 마음대로 스스로 흡수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이것은 인류 의지의 자유와 부러움을 의미한다.

 

3. “인생은 꿈같다”고 하는 이 오래된 말은 실은 장자에게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이 말의 함의는 이미 장자의 原義와는 완전히 그 바탕이 변하였다.
인생은 실로 짧고 종잡을 수도 없으며 얼마간의 기쁜 일이 있다고 해도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안다. 이 때 우리는 언제나 “꿈”을 이용해 습관적으로 자기 내면의 느낌을 표현한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이 꿈같다고 말할 때 슬프고 처량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장자의 마음 속에는 이런 느낌이 조금도 없다. 장자는 예술적인 심리상태로 인류의 존재 및 그 존재의 경지를 한계가 없는 아름다움으로 변화시켰다. 이 때문에 우주가 하나의 거대한 꽃밭인 것처럼 인생은 바로 이 아름다운 경치 속에서 나비가 꽃다지 사이를 춤추듯 한껏 누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장자의 마음 속에 떠오른 것이 바로 아름다운 꿈이었던 것이다.
나비가 꽃다지 사이를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것 역시 인생의 순수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서양종교가 인간의 본성을 죄업으로 가득 찬 것이라고 보는 것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두 양상을 대조해보면 하나는 건강하고 활발한 정신으로, 다른 하나는 병적인 침체된 심리로 나타난다.

 

4. “物化”는 죽음과 삶의 견해에 대한 장자의 기본관념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사후세계에 대하여 당황해하고 공포를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장자의 입장에서 보면 죽음과 삶은 완전히 상대적인 幻滅現象이다. 정통하면 어떤 두려움도 없이 대지 위로 왔다가 흙으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인간의 시초는 본래 형체가 없었던 것이었지만 형체가 형성되었다가 다시 소멸되는 이런 변화과정은 실은 슬퍼할 것이 아니다. 사후에 나비로 변하여 물화 후의 장자처럼 훨훨 날수 있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모습을 잊어버릴 정도로 즐거울 때는 자신이 장자인 줄 모르리라!
장자는 “물화”의 관념을 빌어 죽음과 삶의 대립을 조화 속에 융화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中文史哲 > 莊子淺說' 카테고리의 다른 글

8. 붕새와 참새  (0) 2009.02.08
7. 오고 가는 것과 같은 삶과 죽음  (0) 2009.02.08
5.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하다  (0) 2009.02.06
4. 절친한 벗 혜시  (0) 2009.02.06
3. 평생토록 관직을 사양하다  (0) 2009.02.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