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 건국 과정에 관한 10가지 잘못된 견해(1)라는 제목으로 월간조선에 실린 내용인데 찾아보기 쉽게하기 위해 정리한다. 1.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은 민중의 뜻에 따라 좌우의 모든 정치세력이 참여한 민족통일전선이었다? 해방 다음날인 1945년 8월16일에 구성이 발표된 조선건국준비위.. 韓文史哲/韓國歷史 2009.07.26
'미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미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선덕여왕>에서 미실로 분한 고현정 미실(美室)이라는 1400년 전 신라 여인이 브라운관을 휘어잡고 있다. MBC 사극 ‘선덕여왕’의 시청률은 미실 역을 맡은 고현정 등의 호연에 힘입어 시청률 30%를 돌파했다. 한 심리학자가 ‘치밀형(型) 리더십’이라고 분석할 만큼, 신.. 韓文史哲/韓國歷史 2009.07.17
이두(吏頭) 이두(吏頭) 이두(吏頭) ․이토(吏吐) ․이투(吏套)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호칭은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 처음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신라시대에는 쓰이지 않은 듯하며 고려시대에 들어와 점차 공문서나 관용문에 쓰이면서 생긴 명칭인 듯하다. 이두는 넓은 의미로는 한자차용표기.. 韓文史哲/韓國歷史 2009.07.15
김유신 부자의 혈통은 서로 달랐다 김유신 부자의 혈통은 서로 달랐다 "부자의 혈통이 서로 다르다"라는 말을 들을 때에, 우리는 크게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하나는 다른 남자의 친자인 줄 '모르고' 자신의 호적에 올린 경우이고, 또 하나는 다른 남자의 친자인 줄 '알면서' 자신의 아들로 입양한 경우일 것이다. 지금.. 韓文史哲/韓國歷史 2009.07.15
100년 전에 ‘한민족’은 없었다 “100년 전에 ‘한민족’은 없었다” 일제강점 후 ‘민족’ 개념 확산 · 단군도 민족의 시조로 높아져 1905년 10월 31일 황성신문은 중국 지안(集安)에서 높이 6.4m에 달하는 1500년 전 비석이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비석은 4면에 걸쳐 1750자가 넘는 글자로 고구려 광개토대왕(375~415)의 업적을 빼곡히 기록.. 韓文史哲/韓國歷史 2009.07.05
한민족은 단일민족 아니다 "한민족은 단일민족 아니다!" 특집 | '종의 기원' 150년 유전자로 본 한국인 “북방계·남방계 등 두 가지 이상 유전자가 섞인 집단” ‘북방계 남성·남방계 여성이 결합’ 가설도 급부상 <weekly chosun 2039호에 게재된 기사> 이종호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초빙과학자 한국인이 한민족의 근거지인 한반.. 韓文史哲/韓國歷史 2009.07.05
환단고기(한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환단고기 1. 환단고기(한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환단고기(한단고기)는 네 권의 책으로 이루어져있다. 환인(한인)과 환웅(한인)의 역사를 기록한 삼성기(三聖記), 단군조선의 역사가 담겨있는 단군세기(檀君世記), 고구려의 전신인 북부여의 역사를 기록한 북부여기(北夫餘紀), 마지막으로 태백일사(太白.. 韓文史哲/韓國歷史 2009.07.05
<환단고기><규원사화><단기고사>의 위서여부 솔깃하지만 믿기엔… 너무 찬란한 한민족 상고사 환단고기·규원사화 등 수십년 동안 진위 논쟁 14대 환웅으로 나온 '치우' 축구응원단 상징이 되기도 '화랑세기' 필사본이 위작이라면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오는) 미실이라는 인물은 실존의 근거가 사라진다. (본지 6월 26일자 보도) 위서(僞書) 논란.. 韓文史哲/韓國歷史 2009.07.05
≪三國志≫卷三十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 三韓條(번역) ≪三國志≫卷三十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한(韓)은 대방(帶方) 남쪽에 있고 동서 간으로 바다에 막혀 있다. 남쪽으로 왜(倭)와 접하고 사방 4천리이다. 마한(馬韓), 진한(.. 韓文史哲/韓國歷史 2009.07.01
공빈-동이열전(발해국 대야발 ≪단기고사≫ 164쪽 <부록>) 孔斌의 <東夷列傳> 공빈(孔斌)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 사람으로 위(魏)나라의 재상이었다고 한다. 위(魏)나라는 2300년전 전국시대 때 있었던 나라이다. 공빈(孔斌)은 일반책에서 찾기가 어려운데, 그 이유는 그가 젊은 시절에는 공겸(孔謙)이라는 이름을 쓰다가 노년기에 공빈(孔斌)이라는 이름.. 韓文史哲/韓國歷史 2009.0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