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文史哲/韓國歷史

≪三國志≫卷三十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 三韓條(번역)

마장골서생 2009. 7. 1. 13:53

 ≪三國志≫卷三十 魏書三十 <烏丸鮮卑東夷傳第三十>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한(韓)은 대방(帶方) 남쪽에 있고 동서 간으로 바다에 막혀 있다. 남쪽으로 왜(倭)와 접하고 사방 4천리이다.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세 종류가 있다. 진한(辰韓)은 예전의 진국(辰國)이다.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그 백성은 정착하여 농경을 하는데 누에치는 법을 알고 면포(綿布)를 만든다. 각각 우두머리(長帥)가 있는데 큰 것은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고 성곽(城郭)이 없다.


有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國、臣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路國、兒林國、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卑離國、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古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 凡五十餘國.

원양국, 모수국, 상외국, 소석색국, 대석색국, 우휴모탁국, 신분고국(臣沽國), 백제국(伯濟國), 속로부사국, 일화국, 고탄자국, 고리국, 노남국, 월지국(月支國), 자리모로국, 소위건국, 고원국, 막로국, 비리국, 점리비국, 신흔국, 지침국, 구로국, 비미국, 감해비리국, 고포국, 치리국국, 염로국, 아림국, 사로국, 내비리국, 감해국, 만로국, 피비리국, 구사오단국, 일리국, 불미국, 지반국, 구소국, 첩로국, 모로비리국, 신소도국, 막로국, 고랍국, 임소반국,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 초산도비리국, 일난국, 구해국, 불운국, 불사분야국, 원지국, 건마국, 초리국 등 모두 50여 개 나라가 있다.(나열된 것 총 55개국)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辰王治月支國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支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큰 나라는 만 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 호(戶)수가 총 십여 만이다. 진왕(辰王)이 월지국(=목지국)을 다스리는데 신지(臣智)를 때로 우대하여 호칭하였고(加優呼) 신운국(신운신국)의 견지(遣支) 보(報-인명?), 안야국(변진안야국)의 축지(支), 분신리아국(신분고국?)의 불례(不例), 구야국(변진구야국)의 진지(秦支) 염(廉-인명?)이 그것이다.(원문이 난해해 해석이 분분한데, 이병도의 설에 따라 특정 소국들의 군장(신지)을 우대해서 부르는 특별한 명칭이 견지, 축지, 불례, 진지라는 의미로 풀었습니다) 그 관직으로는 위솔선 읍군(魏率善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장(伯長)이 있다.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1)

조선후 준(準)이 왕을 참칭한 후 연나라 망명인 위만에게 공격당해 왕위를 탈취 당했다.


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2)

좌우 측근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한(韓)의 땅에 거처하게 되었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불렀다.


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3)

그 후 절멸(絶滅)했으나 지금 한인(韓人)들 중에는 여전히 그를 받들어 제사 지내는 자가 있다.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속하게 되어 사시(四時)로 조알(朝謁)했다.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建安中, 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 是後倭韓遂屬帶方.

환제, 영제 말에 한(韓), 예(濊)가 강성하여 군현이 이를 제압하지 못하자 백성들 다수가 한국(韓國)으로 유입(流入)했다. 건안(建安:196-220) 중, 공손강이 둔유현(屯有縣)을 나눠 남쪽 거친 땅에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고,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해 유민(遺民)을 수습하여 병사와 더불어 한, 예를 토벌하니 예전 백성들이 점점 (한, 예로부터) 나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왜(倭), 한(韓)은 대방군에 속하게 되었다.


景初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 下戶詣郡朝謁, 皆假衣, 自服印綬衣千有餘人.

경초(景初:237-239) 중에 명제는 은밀히 대방태수 유흔(劉昕), 낙랑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바다를 건너 2군을 평정하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관원이 착용하는 사슴가죽 끈)를, (신지의) 아래 군장들에게는 읍장(邑長)을 가사(加賜)했다. 그 풍속이 의책(衣 )을 좋아하는데 하호(下戶)들도 군으로 나아가 조알하여 모두 의책을 빌리니 스스로 인수와 의책을 갖춘 자가 천 여 명이나 되었다.


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유주)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이 본래 낙랑이 한국(韓國)을 통치했다 하여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붙이려 했는데 관리가 통역하여 전하는 과정에 잘못이 있어 신지가 격분하여 한(韓)이('臣智激韓忿'의 해석문제-다른 판본에서는 '臣沾韓忿'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이를 '臣沽韓忿'의 오자로 보아, 마한 소국의 하나로 위에서 거론된 신분고국을 기리영 공격의 주체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했다. 이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을 일으켜 토벌했는데 궁준이 전사했으나 2군(낙랑, 대방)이 마침내 한을 토멸했다.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 無拜之禮. 居處作草屋土室, 形如, 其戶在上, 擧家共在中, 無長幼男女之別. 其葬有槨無棺, 不知乘牛馬, 牛馬盡於送死. 以瓔珠爲財寶, 或以綴衣爲飾, 或以縣頸垂耳, 不以金銀錦繡爲珍.

그 풍속에 기강이 부족해 국읍(國邑)에 비록 우두머리(主帥)가 있으나 읍락에 잡거(雜居)하여 서로 제어하지 못하고 궤배(拜-무릎꿇고 엎드려 절함)의 예법이 없다. 초옥토실(草屋土室)을 만들어 거처하는데, 그 형태가 무덤과 같고 문을 위로 내는데 모든 가족이 그 안에 함께 거주하여 장유(長幼)나 남녀의 구별이 없다. 장례를 치를 때 곽(槨)은 있으나 관(棺)은 없다. 우마(牛馬)를 탈 줄 모르고 장례를 치를 때 우마를 함께 묻는다. 영주(瓔珠)를 보물로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거나 목과 귀에 걸기도 하지만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其人性彊勇, 魁頭露, 如炅兵, 衣布袍, 足履革. 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勇健者, 皆鑿脊皮, 以大繩貫之, 又以丈許木之, 通日呼作力, 不以爲痛, 以勸作, 且以爲健.

그 인성(人性)이 강용(彊勇)하고 상투를 트는데 경병(炅兵?)과 같다. 베로 만든 두루마기(布袍)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나라에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하면 여러 건장한 젊은이가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줄을 꿰고 또 1장(丈) 정도되는 나무를 매달고(지게를 사용하는 모습으로 추정)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며 힘을 다하여 이를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데 작업을 독려하며 또한 이를 강건함으로 여긴다.


常以五月下種訖, 祭鬼神, 群聚歌舞, 飮酒晝夜無休. 其舞, 數十人俱起相隨, 踏地低, 手足相應, 節奏有似鐸舞.十月農功畢, 亦復如之.

항상 5월이 되어 씨 뿌리기를 끝내면 귀신에게 제사 지내고 무리지어 모여 음주, 가무하는데 밤낮으로 그침이 없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땅을 얕게 또는 높게 밟고 손발로 서로 호응하며 가락이 있는데 탁무(鐸舞)와 유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또한 이와 같이 한다.


信鬼神, 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 名之天君.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 諸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

귀신을 믿어 국읍에 각각 한 명을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니 그를 천군(天君)이라 한다. 또 여러 나라에 각각 별읍(別邑)을 두고 이를 소도(蘇塗)라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긴다. 여러 도망자가 여기에 이르면 모두 돌려보내지 않으니 도적질을 좋아하게 되었다.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浮屠-사리를 안치한 불탑)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선, 악을 행하는 점에서 다른 점이 있다.


其北方近郡諸國差曉禮俗, 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 無他珍寶. 禽獸草木略與中國同. 出大栗, 大如梨. 又出細尾鷄, 其尾皆長五尺餘. 其男子時時有文身.

그 북쪽에 군(郡)과 가까운 여러 나라들은 다소 예속(禮俗)에 밝았으나 멀리 떨어진 곳에선 죄수처럼 노비가 서로 모여 산다.(?) 다른 보물은 없다. 짐승, 초목은 중국과 같다. 큰 밤(大栗)이 산출되는데 크기가 배(梨)만 하고, 또 꼬리가 가느다란 닭(細尾鷄)이 있는데 그 꼬리 길이가 5척 남짓 된다. 남자는 늘 문신(文身)을 한다.


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 其人差短小, 言語不與韓同, 皆頭如鮮卑, 但衣韋, 好養牛及猪. 其衣有上無下, 略如裸勢. 乘船往來, 市買韓中. 

또 주호(州胡-제주도인 듯)가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다소 몸집이 작고 언어가 한(韓)과 다르다. 모두 선비족처럼 머리를 깎고 가죽옷을 입는데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 옷은 윗도리는 있으나 아랫도리가 없으니 대략 알몸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과 교역한다.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有城柵. 其言語不與馬韓同,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진한(辰韓)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진한의 어느 노인이 대대로 전해지는 바를 말했는데, 옛날 망명인이 진(秦)의 사역을 피해 한국(韓國)으로 왔고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나눠 주었다고 한다. 성책(城柵)이 있고 그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다. 국(國-나라)을 방(邦), 궁(弓-활)을 호(弧), 적(賊-도적)을 구(寇), 행주(行酒-술을 권하는 것)를 행상(行觴)이라 부른다.


相呼皆爲徒, 有似秦人, 非但燕、齊之名物也. 名樂浪人爲阿殘;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爲秦韓者.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서로 부르기를 모두 도(徒)라 하여 진(秦)나라 사람과 비슷한 점이 있는데 연(燕), 제(齊)의 명칭은 아니다. 낙랑 사람을 불러 아잔(阿殘)이라 하고 동방인(東方人)은 스스로를 아(阿)라고 했으니, 이는 낙랑 사람이 그들의 잔여인(殘餘人)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지금 진한(秦韓)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 6국이었는데 점점 나뉘어져 12국이 되었다.


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

변진(弁辰) 또한 12국이다. 여러 작은 별읍(別邑)이 있고 각각 거수(渠帥)가 존재하는데 큰 것은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험측(險側), 그 다음은 번예(樊濊), 그 다음은 살해(殺奚), 그 다음은 읍차(邑借)가 있다.


有已國, 不斯國, 弁辰彌離彌凍國, 弁辰接塗國, 勤耆國, 難彌離彌凍國, 弁辰古資彌凍國, 弁辰古淳是國, 奚國, 弁辰半路國, 弁[辰]樂奴國, 軍彌國(弁軍彌國), 弁辰彌烏邪馬國, 如湛國, 弁辰甘路國, 戶路國, 州鮮國, 馬延國, 弁辰狗邪國, 弁辰走漕馬國、弁辰安邪國, 馬延國, 弁辰瀆盧國, 斯盧國, 優由國.

이저국, 불사국, 변진미리미동국, 변진접도국, 근기국, 난미리미동국, 변진고자미동국, 변진고순시국, 염해국, 변진반로국, 변(진)낙노국, 군미국, 변군미국, 변진미오사마국, 여담국, 변진감로국, 호로국, 주선국, 마연국, 변진구야국, 변진주조마국, 변진안야국, 마연국, 변진독로국, 사로국, 우유국이 있다.(26개국이나 마연국 중복이고 군미국=변군미국으로 본다면 24개국)


弁,辰韓合二十四國,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4)

변한과 진한은 모두 24개 국인데 대국은 4-5천 가(家), 소국은 6-7백 가(家)로 총 4-5만 호이다. 그 12국은 진왕(辰王)에 속한다. 진왕은 항상 마한사람이 맡아 세세토록 계승한다. 진왕은 스스로 즉위하지는 못한다.


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 曉蠶桑, 作布. 乘駕牛馬嫁娶 禮俗男女有別. 以大鳥羽送死, 其意欲使死者飛揚.5) 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

토지가 비옥하여 오곡과 벼농사에 적합하고 누에치는 법을 알아 겸포(布-비단의 일종)를 만든다. 결혼할 때 우마(牛馬)를 타고 예속에 남녀의 구별이 있다. 장사 지낼 때 큰 새의 깃털을 쓰는데 죽은 자가 날아오르도록 한다는 뜻이다. 철(鐵)이 산출되는데 한(韓), 예(濊), 왜(倭)에서 모두 와서 취한다. 시장에서는 모두 철을 사용하는데 중국에서 전(錢)을 쓰는 것과 같으며 또한 2군(낙랑, 대방)에도 공급한다.


俗喜歌舞飮酒. 有瑟, 其形似筑, 彈之亦有音曲. 兒生, 便以石厭其頭, 欲其. 今辰韓人皆頭. 男女近倭, 亦文身. 便步戰, 兵仗與馬韓同. 其俗, 行者相逢, 皆住讓路. 

그 풍속이 음주 가무를 좋아한다. 금(瑟)이 있는데 그 형태가 축(筑)과 비슷하고 또한 연주하는 음곡(音曲)이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머리를 돌로 누르는데 머리를 납작하게 만들려는 것으로, 지금 진한 사람들은 모두 편두(頭-납작머리)이다. 남녀가 왜(倭)와 가까워 또한 문신을 한다. 보전(步戰)에 익숙하고 병장기는 마한과 같다. 그 풍속으로, 길을 가던 사람이 서로 마주치면 모두 멈추어 길을 양보한다.


弁辰與辰韓雜居, 亦有城郭. 衣服居處與辰韓同. 言語法俗相似, 祠祭鬼神有異, 施皆在戶西. 其瀆盧國與倭接界. 十二國亦有王, 其人形皆大. 衣服, 長髮. 亦作廣幅細布. 法俗特嚴峻. 

변진은 진한과 잡거하고 또한 성곽이 있다. 의복, 거처는 진한과 같다. 언어와 법속이 서로 비슷한데 귀신에 제사 지내는 것은 다른 점이 있고, 부엌을 문의 서쪽에 둔다. (변진)독로국은 왜와 접한다. 12국에 또한 왕이 있는데 그 사람의 형체가 모두 크다. 의복은 청결하고 머리카락이 길며 또한 광폭세포(廣幅細布-폭이 넓고 고운 베)를 짓는다. 법속이 특히 준엄하다.


1) 魏略曰: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 其大夫禮諫之, 乃止. 使禮西說燕, 燕止之, 不攻.

≪위략≫에 이르기를 주나라가 쇠망하여 연나라가 왕을 자칭하고 동쪽 땅을 경략하려 하자, 옛날 기자(箕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 또한 왕을 자칭하고는 군사를 일으켜 역으로 연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주 왕실을 받들려 했다. 대부(大夫) 예(禮)가 이를 간언하자 그만 두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나라를 설득하자 연나라도 공격하지 않았다.

後子孫稍驕虐, 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 取地二千餘里, 至滿番汗爲界, 朝鮮遂弱.及秦幷天下, 使蒙恬築長城, 到遼東. 時朝鮮王否立, 畏秦襲之, 略服屬秦, 不肯朝會. 否死, 其子準立.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사나워지자 연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 조선의 서쪽 지방을 공격하여 이천여리 땅을 탈취하고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이를 경계로 삼았고 조선은 마침내 쇠약해졌다. 진나라가 천하를 아우르자 몽념(蒙恬)을 보내 요동에 이르는 장성을 쌓게 했다. 그때 조선왕 부(否)가 즉위했는데 진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해 대략 진나라에 복속했으나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했다. 부가 죽자 그 아들인 준(準)이 즉위했다.

二十餘年而陳、項起, 天下亂, 燕、齊、趙民愁苦, 稍稍亡往準, 準乃置之於西方. 及漢以盧爲燕王, 朝鮮與燕界於浿水. 及反, 入匈奴, 燕人衛滿亡命, 爲胡服, 東度浿水, 詣準降, 說準求居西界, (故)[收]中國亡命爲朝鮮藩.

20여 년 후 진승․항량이 봉기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했고 점점 준에게로 달아나 망명하자 준은 그들을 서쪽에 두었다. 한나라가 노관(盧을 연왕(燕王)으로 임명했을 때 조선과 연은 패수(浿水)를 그 경계로 삼았다.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에 투항했을 때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했는데 호복(胡服-오랑캐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나아가 투항했고, 서쪽 경계에 거처하게 해달라고 준을 설득하여 중국의 망명자들을 수습하여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었다.

準信寵之, 拜爲博士, 賜以圭, 封之百里, 令守西邊. 滿誘亡黨, 衆稍多, 乃詐遣人告準, 言漢兵十道至, 求入宿衛, 遂還攻準. 準與滿戰, 不敵也.

준은 위만을 믿고 총애하여 박사로 임명(博士)하고 규(圭-천자가 하사하여 제후의 권위를 상징하는 홀笏)를 하사하여 100리 땅을 봉하여 서쪽 변경을 지키도록 했다. 위만이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보내 한나라 병사가 10갈래 길로 쳐들어왔다고 거짓으로 고하며 (수도로) 들어가 숙위할 것을 청했는데 마침내 군을 돌려 준을 공격했다. 준은 위만과 싸웠으나 감당하지 못했다.


2) 魏略曰:其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

≪위략≫에 이르기를 준의 아들과 부모는 조선에 머물렀는데 성을 바꿔 한씨(韓氏)라 했다. 준왕이 바다 가운데 있을 때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3) 魏略曰: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

≪위략≫에 이르기를 당초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간언했으나 수용하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는데 이때 따라 나온 자가 2천 여 호(戶)였고 또한 조선과 공번(貢蕃-朝貢蕃客, 조공을 바치고 사신이 오고 감)을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至王莽地皇時, 廉斯爲辰韓右渠帥, 聞樂浪土地美, 人民饒樂, 亡欲來降. 出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 其語非韓人. 問之, 男子曰: “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 爲韓所擊得, 皆斷髮爲奴, 積三年矣.” 曰: “我當降漢樂浪, 汝欲去不?” 戶來曰:“可.”

왕망 지황(地皇:20-23) 때, 염사치(廉斯가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었는데 낙랑 토지가 비옥하고 인민들이 풍요하다는 말을 듣고 망명하여 투항하고자 했다. 그 읍락을 나왔다가 밭 가운데에서 참새를 쫓고 있는 남자 한 명을 보았는데 그 말이 한인(韓人)이 아니었다. 그에게 묻자 그 남자가 말했다, “저는 한인(漢人)이고 이름은 호래(戶來)입니다. 저희 일행 천오백 명이 벌목하다 한인(韓所)에게 사로잡혀 머리를 깎이고 노비가 된지 3년째입니다.” 염사치가 말했다, “나는 한나라 낙랑에 투항하려 하는데 너도 함께 가겠는가?” 호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辰)因將戶來(來)出詣含資縣, 縣言郡, 郡卽以爲譯, 從芩中乘大船入辰韓, 逆取戶來. 降伴輩尙得千人, 其五百人已死. 時曉謂辰韓: “汝還五百人. 若不者,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 辰韓曰: “五百人已死, 我當出贖直耳.” 乃出辰韓萬五千人, 弁韓布萬五千匹, 收取直還. 郡表功義, 賜冠、田宅, 子孫數世, 至安帝延光四年時, 故受復除.

염사치가 호래를 데리고 함자현(含資縣)에 도착하니 현(縣)에서는 이를 군(郡)에 보고했다. 군에서는 즉시 염사치를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에서 큰 배를 타고 진한으로 들어갔는데 호래도 함께 따라갔다. 항복한 동료 천 명을 되찾았으나 5백 명은 이미 죽은 뒤였다. 염사치가 깨우쳐 말했다. “5백 명을 돌려보내시오. 만일 그러지 않으면 낙랑이 마땅히 군사 만 명을 배에 태워 보내 당신들을 공격할 것이오.” 진한 사람이 말했다. “5백 명이 이미 죽었으니 다른 것으로 속죄하겠소.” 이에 진한에서 만 오천 명, 변한에서 포(布) 만 오천 필이 나오자 염사치가 이를 거둬 돌아왔다. 군에서 염사치의 공의(功義)를 표창하여 관책[冠: 전택(田宅)]을 하사하고 자손 여러 세대에 걸쳐 안제(安帝) 연광(延光) 4년(125년)에 이르기까지 과역을 면제받았다(復除).


4) 魏略曰: 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

≪위략≫에 이르기를 유이민이 뛰어났으므로 마한의 제어를 받았다.


5) 魏略曰: 其國作屋, 橫累木爲之, 有似牢獄也.

≪위략≫에 이르기를 그 나라가 집을 지을 때 나무를 가로 질러 묶는데 그 모습이 감옥과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