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양(漁陽)의 북소리가 지축을 흔들다
안록산은 천보 원년(742) 정월에 평로(平爐)절도사에 임명된 후 지위가 상승일로를 걸어 천보 10년(751) 2월에 그는 평로、범양(范陽)、하동(河東; 지금의 山西省 太原)절도사와 하북도채방처치사(河北道采訪處置使; 행정과 財賦權을 관장함)를 겸임하여 지금의 동북、하북 및 산서에 해당하는 광대한 지역의 군정대권을 지휘하였다. 안록산이 통할했던 군대는 모두 20만으로 전체 변방지역 10개 절도사 총병력의 40%를 점하였고, 보유했던 군마의 수량은 ⅓을 점하였다. 안록산의 군정권력은 당조가 건립된 이래로 어떤 장수에게도 없었던 것이었다.
안록산 권력의 빠른 팽창은 성당(盛唐)시기 변방의 군사형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찍이 무측천(武則天) 시기에 동북 변방의 해족(奚族)이나 거란족(契丹族)이 끊임없이 내지(西南)로 침입하여 소요를 일으키는 통에 유주(幽州)는 변방의 요충지가 되었다. 개원(開元) 20년(732) 이후는 청장(靑藏)고원의 토번(吐蕃)왕국이 강성해지면서 동쪽으로 쳐들어와 검남(劍南)과 농우(隴右)라는 두 도(道)를 유린하고 북쪽으로는 서역을 빼앗았다. 중앙아시아의 대식(大食; 아랍제국)도 동방으로 확장해왔다. 당 왕조는 국방전략의 중점을 서방으로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동북지역은 방어만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천보 초년부터 안록산이 변방의 군공으로 상도 받고 영전도 했다는 것은 명황이 그의 힘을 빌어 효과적으로 변방을 지켰다는 것과 서로 통하는 것이다.
성당시기에 이르면서 개국 이래로 실행했던 교대로 복역하는 부병제도(府兵制度)는 이미 유명무실해졌고, 직업군인 성격의 모병제(募兵制)가 이를 대체하게 된다. 전국의 군사형세는 안을 중시하고 밖을 경시하는 것(內重外輕)에서 밖을 중시하고 안을 경시하는 것(外重內輕)으로 전환되었다. 동북변방은 다민족이 뒤섞여 사는 지역이라 절도사가 거느리는 변방군대의 병사들은 주로 현지의 소수민족에서 왔다. 이것은 산천의 형세나 민족의 상황을 잘 알고 전쟁에도 익숙했던 이민족 출신 안록산에게 좋은 기회로 제공되는 결과를 낳았다. 안록산 외에 선후로 절도사에 임명되었던 “이민족 사람(胡人)”으로는 안사순(安思順)、가서한、고선지(高仙芝) 등이 있다.
객관적으로 말해서 안록산에게 모반의 야심이 싹튼 것에는 양적 변화에서 질적 변화까지의 과정이 있다. 안록산이 여러 차례 입조하러 경성에 왔을 때 본 낙양(洛陽)과 장안(長安)의 풍요롭고 눈부신 황궁、황제의 지고무상한 권위 및 더없이 화려한 생활 등등은 그를 침을 흘리게 할 만큼 부럽게 만들었다. 조정의 정치가 부패하고 장안과 낙양의 군비가 느슨한 것을 안록산도 손금을 보듯이 훤히 꿰뚫어보았다. 천보 10년(751) 이래로 당 중앙은 몇 차례에 걸쳐 남조(南詔; 治所가 지금의 雲南 大理에 있었음)를 정벌하려다 참패를 당하면서 조정 내 장군 재목의 결핍과 “관군”의 전투능력 부재를 드러내고 말았다. 동시에 안록산도 권력투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양국충이 재상에 임명된 후 권력을 독점하며 안록산을 억눌렀다. 두 사람 사이의 모순이 갈수록 격화되면서 안록산의 모반도 그 발걸음을 서두르게 된다.
옛 사서에서는 안록산의 반당(叛唐) 속에는 또 하나의 원인이 있다고 했는데, 바로 양귀비의 빼어난 미모를 부러워해서라는 것이다. 이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간주해도 된다. 그러나 “안사의 난(安史之亂)”이라는 이런 지극히 중대한 역사사건을 미녀 탓으로 돌리는 것은 고대 유심주의사관인 “여화가 나라를 어지럽혔다(女禍亂國)”는 낡은 생각일 뿐이다.
북송(北宋)의 대사학가 사마광(司馬光)이 편수를 주관했던《자치통감(自治通鑒)》중 ‘재앙의 근원’이라는 의미의 “화수(禍水)”라는 말은《비연외전(飛燕外傳)》에서 취한 것이다. 조비연(趙飛燕)은 서한(西漢) 성제(成帝; 劉驁)의 총비(寵妃)로서, 몸이 날렵하고 춤과 노래를 잘했다고 해서 ‘날렵한 제비’라는 뜻의 “비연(飛燕)”으로 불렸다. 황궁 중에 선제(宣帝; 劉詢) 때의 피향박사(披香博士; 宮廷의 敎習) 요방성(淖方成)이라는 여자가 있었는데 요부인(淖夫人)이라고 불렸다. 한번은 요부인이 성제의 뒤에 서있는 조비연을 발견하고는 침을 뱉으며 욕을 하였다. “저 년은 재앙의 물이니 반드시 불을 끄고 말 것이야!(這是禍水,必定會滅火的.)” 소위 “불(火)”이라는 것은 한(漢)나라를 가리킨다. 전국(戰國) 이래의 “오덕종시(五德終始; 음양학적으로 금、목、수、화、토 오행이 상극상생의 순서로 순환하는 것--옮긴이)” 이론에 따르면 서한(西漢) 왕조는 화덕(火德)으로 흥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자가 재앙의 근원’이라는 의미의 “여인화수(女人禍水)” 전고의 유래이다. 고대의 사서 속에서 대체로 역대의 사관들에 의해 “화수”로 비난당하는 여인으로는 달기(妲己)、포사(褒姒)、여희(驪姬)、조비연자매、장려화(張麗華)、양옥환(楊玉環) 등과 같은 여자들인데, 하나같이 경국지색의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천지의 조화인 듯 부모가 그녀들을 낳은 목적이 바로 아무 탈 없던 왕조를 난장판으로 만들고 종국에는 철저하게 붕괴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특히 미녀)가 나라의 멸망과 정권이 바뀌는 화근을 초래한다고 여기는 관념은 절묘하고 비열한 역사관념인 것이다. 그것의 유독은 널리 스며들어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안록산이 반당(叛唐)에 마음이 동한 주요 원인은 첫째가 그의 끝없는 욕망에서 비롯된 정치야심이다. 그 다음이 명황 조정 내 권력투쟁이 복잡하게 첨예화되면서 관리들이 부패하여 나라의 정치가 악화되고 중앙의 군비가 심각하게 허약해지는 등의 얽히고 설킨 사회요소이다. 대략 천보 9년(750) 쯤 안록산은 모반할 야심을 밖으로 군사적 역량을 적극적으로 확충하는 행동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군수물자와 비용을 준비하였다. 천보 10년(751)에 안록산은 범양(范陽) 경내의 웅무성(雄武城)을 계속 수축하여 무기를 저장하도록 명하였다. 또 북방의 유목민족 부락으로부터 수만 마리의 군마를 사들이고, 5만 마리의 소와 양을 사육하였다. 안록산은 암암리에 “호상(胡商)”을 이용해 각 도에서 장기간 사용할 군수물자와 보물들을 사두도록 하였다.
둘째는 군대의 확충이다. 안록산은 동라(同羅)、해(奚)、거란(契丹) 등 부족의 투항자 8,000여 명을 용병부대라 할 수 있는 “예락하(曳落河)”(장사)로 삼아 양성하였고, 그것에 그의 100여 명의 가노(家奴)를 더했는데, 전부 전쟁에 능한 일당백의 전사들이었다. 안록산을 도와 계책을 짜내었던 문사들로는 엄장(嚴莊)、고상(高尙)、장통유(張通儒)、이연망(李延望)、평렬(平冽)이 있었다. 무장으로는 안수충(安守忠)、손효철(孫孝哲)、최건우(崔乾祐)、하천년(何千年)、전승사(田承嗣)、윤자기(尹子奇)、고막(高邈) 등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손발과 같은 심복들 중에는 인재로 평가될 만한 이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장서기(掌書記) 고상 같은 사람은 원래 재학이 넘쳤으나 빈곤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후에 안록산의 막부로 들어가 수하가 되었다. 또 전승사와 같은 사람은 군대집안 출신으로 안록산에 의해 선봉장 격인 전봉병마사(前鋒兵馬使)에 발탁되었다. 그는 군대를 엄격하게 잘 다스려 안록산의 깊은 신임을 얻게된다.
장사들을 끌어들여 마음대로 부리기 위해서 안록산은 자기 부하 중의 유공전사들에 대해 상규에 구속되지 않고 포상하게 해달라는 주청을 하였다. 고신(告身; 위임장)을 먼저 쓰고 자신이 부대로 데리고 가서 아무 때나 상을 주었던 것이다. 안록산은 전후로 자신의 부하에게 맡겨 장군(종3품)이 된 자가 500여 명、중랑장(中郞將; 정4품)이 2,000여 명이었다. 천보 14년(755)에 안록산이 또 번장(蕃將) 32명으로 한장(漢將)을 대체하게 해달라고 주청하자 명황도 비준을 해주었다. 이렇게 하여 평로(平爐)、범양(范陽)、하동(河東) 3진(군사구역)의 변방군은 실제로 이미 안록산의 개인 군대가 되었다. 안록산은 공개적으로 기병하여 모반을 감행하기 전에 이미 한 지역을 할거했던 군벌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안록산이 비록 장수의 자질이 있다고는 하나 필경 정치적 식견은 보잘것없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수하로 의탁해 온 뜻을 이루지 못한 한족 문사들은 그를 위해 계책을 짜내고 조직과 기병에 대해 안배하는 한편 그를 위해 도참을 해석하여 천명에다 갖다 붙이는 등 모반을 선동하였다. 고상、엄장、장통유가 바로 주요한 책략을 기획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안록산을 선동하여 비자포(緋紫袍)、금은어대(金銀魚袋)、요대(腰帶) 등 조관의 복식을 만들어 반당한 후의 쓰임에 준비하였다. 안록산을 위해 목숨을 바칠 그런 “호상”들이 알현할 때마다 그는 흡사 호인 황제의 위엄을 한껏 뽐내었다. 그는 “호복(胡服)”을 몸에 걸치고 있고, 사방에는 향촉이 타고 있고 진귀한 보석이 진열되어 있다. 수백 명의 호인들이 양쪽에 시립하고 있고 탁자 위에는 소와 양의 제사 물품들이 즐비하게 놓여있다. 남녀 무당이 당 앞에서 북을 두드리며 춤을 추는데 날이 저물 때까지 떠들썩하였다.
안록산은 근거지 범양에서 모반 준비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그 시기에 양국충은 경성에서 온갖 말썽을 다 일으키며 안록산을 노하게 만들어 그가 빠른 시일에 모반을 하도록 압박하였다. 천보 13년(754) 연말에 양국충은 조정 내 안록산의 중요 인맥인 길온(吉溫)을 제거하였다. 이 사람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객이었는데 처음에는 이림보에게 붙었다가 나중에 양국충에게 빌붙었고 마지막에는 안록산과 결탁했었다. 양국충은 자신의 식객을 파견해 장안에 있는 안록산의 집을 빈틈없이 감시하였다.
천보 14년(755) 4월에 양국충은 황명을 사칭해 경성에 있는 안록산의 집을 수색하도록 경조윤을 파견하였다. 경조윤은 안록산의 식객인 이기(李起)、안대(安岱)、이방(李方) 등을 체포하여 어사대(御史臺)로 압송하고 비밀리에 심문한 다음 모조리 처형해버렸다. 안록산의 아들 안경종(安慶宗; 皇家의 宗室女 榮義郡主에게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경성에서 太僕卿에 임명됨)은 즉각 이 사실을 비밀리에 자기 아버지에게 알렸다. 안록산은 소식을 접하자 대노하여 곧장 엄장을 시켜 황제에게 해명하는 표에 양국충의 죄상 20여 가지를 열거하여 올리도록 하였다. 이 시점에 이르러서야 명황도 깨닫게되었다. 안록산이 의외의 변고를 일으킬 화근을 피하기 위해 명황은 죄과를 경조윤에게 뒤집어씌워 양국충을 대신하는 희생양으로 삼았다.
이 해 7월에 중사(中使) 풍신위(馮神威)가 명황의 친필조서를 가지고 범양에 이르러 안록산에게 10월에 입조하라고 전했다. 그러나 안록산은 성지를 마주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바로 풍신위를 관사에 연금하고 감시하였다. 풍신위가 경성으로 돌아와 명황에게 울며 “소신이 살아서 돌아와 폐하를 뵈올 줄은 몰랐습니다”라고 하소연하였다.
풍신위가 범양을 떠난 후 안록산은 즉각 엄장、공상 등의 사람들과 비밀모의를 하였다. 8월 초부터 전쟁준비를 하며 여러 차례 장수와 병사들을 술과 음식으로 위로하였다. 11월 6일에 안록산은 주연을 성대하게 베풀어 장수들을 소집해 보물과 비단을 상으로 주고 1인당 한 장씩 작전지도를 나누어주었다. 하루 후에 마침 상주할 일로 입조했던 관원 하나가 경성에서 범양으로 돌아왔다. 안록산은 곧 이런 기회를 빌어 칙서를 위조하여 장수들에게 선포하였다. “성상께서 밀지를 내려 나에게 군대를 이끌고 입조하여 간상 양국충을 주살하라 하셨소. 제장들은 바로 나를 따라 기병하시오!”
11월 9일에 안록산은 군대를 집결시켜 공개적으로 모반을 일으켰다. 다음날 새벽녘에 안록산은 계성(薊城; 지금의 북경 서남쪽) 남쪽 교외에서 양국충을 토벌한다는 조서를 받든다는 명의로 군대를 검열하고 출정식을 거행하며 전군의 장수와 병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하였다. “감히 다른 뜻을 가지고 군대의 사기를 어지럽히는 자는 그 삼족을 멸하리라!”
출정한 후 안록산은 철갑병거에 앉아 정예기병부대를 통솔하여 남쪽으로 질주하였다. 반군의 보병과 기병 15만(20만이라고도 함)이 진군하자 먼지가 자욱히 일고 북소리는 천지를 진동하였다. 지나치는 주현마다 와해되지 않는 곳이 없었다. 단 10일 동안에 선봉군은 박릉(博陵; 지금의 河北 定縣)에 이르렀다. 10여 일이 지나면서 반군은 또 황하 기슭을 공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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