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唐楊貴妃

8. 두 번이나 “야단을 맞아” 황궁에서 쫓겨나다

마장골서생 2009. 11. 9. 22:56

穆渭生 著 / 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唐楊貴妃>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첫번째 역서*

 

8. 두 번이나 “야단을 맞아” 황궁에서 쫓겨나다


당명황은 양옥환이 입궁한 후로 “삼천 궁녀에게 갈 총애를 한 사람에게 주었다(三千寵愛在一身).” 천보 4년(745) 8월, 양옥환이 귀비로 책봉되면서 사실상 후궁의 최고 책임자가 되었다.《장한가》에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承歡侍宴無閑暇,  기쁨 받들어 잔치 시중드느라 한가한 틈 없고,

春從春遊夜專夜.  봄이면 봄 따라 놀고 밤이면 밤을 함께 했네.

金屋妝成嬌侍夜,  금빛 침실 단장하고 교태로 모시는 밤이면,

玉樓宴罷醉和春.  잔치 파한 옥루엔 취기와 춘심이 무르녹누나


이처럼 혼자서 모든 총애를 독차지한 양귀비는 총애를 믿고 교만해지면서 기고만장해졌다. 당명황이 다른 비빈들에게 은총을 베풀면 양귀비는 바로 질시하고 불손한 말을 하여 황제의 심기를 건드렸다.

천보 5년(746) 7월, 양귀비는 “질시하고 불손해서(妬悍不遜)” 당명황을 노하게 하였다. 당명황은 그 책임을 물어 흥경궁 밖 숭인방(崇仁坊)에 있던 오빠 양섬(楊銛)의 집으로 양귀비를 돌려보내 버렸다. 그러나 양귀비가 궁을 나간 후 당명황은 마음이 편치 않고 불안하였으며, 정오가 되었을 때 밥조차 먹으려고 하지 않았다. 당명황은 곁에 시중들고 있던 태감과 궁녀들이 어떻게 봐도 마음에 들지 않아 아무런 이유 없이 몇 사람에게 곤장을 치고 화풀이를 하였다.

이때 충직하고 부지런한 “충복(忠僕)” 고력사는 속으로 당명황이 귀비를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귀비원(貴妃院)의 휘장、기물、창고의 식물을 수레에 실어 양섬의 집으로 보내주자고 떠보듯 주청하였다. 당명황 역시 고력사의 의도를 알고 어선(御膳)의 일부분을 나누어 함께 보내도록 명했다. 오후에 궁중의 태감들이 100여 대의 수레를 호위하며 양섬의 집에 오자 마침 놀라 당황하고 있던 양씨 남매들은 이때서야 눈물을 거두고 크게 웃었다.

저녁 무렵, 고력사는 또 귀비를 궁으로 다시 불러들일 것을 주청하였다. 저녁에 당명황은 경위금군(警衛禁軍)에게 궁문을 활짝 열어 귀비를 영접하도록 명을 내렸다. 양귀비는 당명황을 보자 땅에 무릎을 끓고 눈물을 흘리며 용서를 구했다. 이때 당명황의 노기는 봄날에 눈 녹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자신도 모르게 따뜻한 말로 귀비를 위로하며 더욱 총애하였다.

다음날, 양귀비의 세 언니들이 함께 입궁하여 정성스럽고 맛있는 음식과 술을 올렸다. 당명황은 연회를 베풀어 귀비 자매들과 함께 악무와 잡희를 감상하였다. 그전 날 아무런 이유 없이 곤장을 맞았던 시종들은 이때 많은 상을 받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연회는 끝났고, 궁중은 온통 기쁨으로 가득했다. 이 풍파가 지나간 후, 환갑을 넘긴 당명황은 귀비가 없이는 하루라도 못살 것만 같았다. 이로부터 귀비에 대한 그의 총애는 더욱 더 융성하였고, 후궁 비빈들 중 어느 누구도 당명황의 총애를 받기 어려웠다. 

천보 9년(750) 2월, 양귀비는 또 “성지를 거슬려(忤旨)” 당명황을 진노하게 하였다. 당명황은 고력사에게 그녀를 치병거(輜輧車)1)에 태워 양섬의 집으로 돌려보내도록 명을 내렸다.

양귀비가 다시 야단을 받아 궁을 나가자 양씨 남매들은 큰 화가 곧 닥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양국충은 몹시 두려워하며 초조해했다. 급박한 상황 하에 그는 친한 친구 호부랑중(戶部郞中)(종5품) 길온(吉溫)이 생각났다. 이 길온이라는 사람은 이해타산에 밝은 사람으로, 궁중의 태감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는 양국충이 처가 때문에 당명황의 신임과 중용을 받아 이림보를 대신할 것임을 알고 극력 비위를 맞추고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 양국충은 길온을 찾아가 빨리 귀비를 다시 궁으로 보낼 방법을 생각해줄 것을 요청했다. 길온은 태감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즉시 입궁하여 당명황을 알현하고 말을 올렸다. “귀비는 부인으로, 식견이 짧아 폐하의 뜻을 어겼나이다. 하오나 귀비께서 오랫동안 은총을 입은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옵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지위가 아까워 귀비를 궁중에서 죽게 하지 않으시고, 모질게도 집에서 욕을 받게 하시나이까, 사람들이 비웃지 않겠습니까?”

길온의 이 말은 먼저 귀비를 나무라고 다시 당명황을 자극하는 양쪽의 입장을 잘 고려한 아주 적절한 말이었다. 당명황은 들은 후 자신도 모르게 감동을 받아 즉시 환관 장도광(張鞱光)을 보내 양섬의 집으로 어선을 보내 위로하였다.

장도광이 오자 양귀비는 구세주라도 만난 듯 눈물을 줄줄 흘리며 장도광에게 자신이 잘못을 뉘우치고 있음을 전해 줄 것을 청했다. “저는 황상의 뜻을 거슬려있으니, 정말 백 번 죽어도 마땅하옵니다. 저의 모든 장신구와 보물은 모두 황상께서 하사한 것이옵니다, 궁중에 올려 황상께 드려야 하니 기념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오로지 몸만 부모님이 주신 것입니다.” 말을 하다 가위를 들고 머리카락 한 줌을 잘라 장도광에게 주며 황상에게 올리라고 하였다.

옛 사람들은 몸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에 몸을 해치는 것은 불효로 여겼다. 머리카락을 잘라 남기는 것은 결별의 뜻을 나타냈다. 장도광이 궁으로 돌아와 사실대로 보고했다. 당명황은 듣고 크게 놀랐고, 그 머리카락을 보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너무 안타까워 즉시 고력사에게 명하여 친히 양섬의 집으로 가 귀비를 궁으로 불러오도록 하였다.                        

머리카락을 잘라 잘못을 크게 뉘우친 양귀비의 행동은 66세의 당명황에게 큰 감동을 주엇을 것이다. 두 번째 궁궐에서 쫓겨난 이 풍파가 지나간 후 양귀비에 대한 그의 총애는 더욱 더 깊어졌다. 양귀비는 두 차례나 궁궐에서 쫓겨나는 우여곡절을 겪고 다시는 시비 거리를 만들려 하지 않았고, 당명황을 더욱 공손하고 조심스럽게 모셨다. 고희에 가까워 머리가 희어진 당명황은 연로해지자 내심에 숨겨져 있던 장생불사의 욕망이 나날이 강해졌다. 그는 “도인(導引)”술을 익혀 몸을 건강하게 하고 병을 물리쳤으며, 단약(丹藥)을 복용하여 장수를 구했다. 정신적으로 늙고 죽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허약한 응석받이 영아가 달콤한 모유를 떠날 수 없듯 당명황은 대낮에도 곱게 화장을 한 후궁 미인들의 곁에 에워싸였고, 그녀들의 아리따운 얼굴과 미소에서 역동적인 생명의 기운을 느꼈다. 저녁에는 양귀비의 따뜻한 위로를 받으며 노년의 번거로움과 고독감을 없애주었다.

젊어서 부부가 되어 늙어서도 함께 한다. 이 말은 보통 사람들의 부부생활을 말할 때 사용하지만 군왕인들 어찌 이 범주를 넘어설 수 있겠는가. 양귀비에 대한 당명황의 감정과 총애는 16년 간이나 이어졌으니 고대 제왕 중에서 이런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래서 백거이가《장한가》에서 칠석날 밤 당명황이 귀비와 장생전(長生殿)에서 하늘에 영원히 부부가 되겠다고 맹세하는 극적인 장면을 노래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천년이 지났어도 당시 양귀비가 견책을 받아 궁궐에서 쫓겨나갔을 때의 두려움과 공포는 후인들이 역사를 읽을 때 복잡한 이야기로 전해졌다. 역사를 연구하던 감상하던 사람들은 양귀비가 두 번이나 궁궐에서 쫓겨나게 된 원인을 철저하게 규명하려고 한다. 사서를 보면, 양귀비가 처음 궁궐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질투” 때문이었다. 두 번째 궁궐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성지를 거슬렸기” 때문이었다. “질투(妬)”는 후궁의 비빈들이 서로 총애를 다투며 싸우는 것을 말하고, “사납다(悍)”라고 한 것은 언행이 거침없고 불손했던 것을 말한다. “성지를 거슬린” 것은 황제의 뜻을 거역한 것으로, “사납게 질투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행동이었다.

양귀비가 “질투”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남송 때 지어진《매비전(梅妃傳)》이라는 책에는 대략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개원 연간 환관 고력사가 남방에 사신으로 나가 보전(莆田)의 미녀 강채빈(江采蘋)을 뽑아 입궁시켰다. 그녀는 미모가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시부(詩賦)에도 뛰어나 당명황의 총애를 받아 비(妃)로 책봉되었다. 강비(江妃)는 매화를 아주 좋아하였기 때문에 당명황은 그녀를 놀리며 “매비(梅妃)”로 불렀다. 양옥환이 입궁한 후로 두 사람은 서로 원수 대하듯 질투하였다. 결과적으로 매비는 냉대를 받아 별궁으로 옮겨야 했다. 안록산이 군사를 일으키자 당명황은 촉 땅으로 떠나면서 낙양과 장인이 함락되자 매비는 반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그러나 매비의 행적에 대해 당대 사서에는 기록이 없다.《매비전》역시 이미 학자들에 의해 위서(僞書)로 판명되었으니, 그 내용을 믿을 수가 없다.

북송 사람 악사(樂史)의《양태진외전(楊太眞外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천보) 9년 2월, 임금(당명황)께서 옛날 오왕장(五王帳)에서 긴 베개와 큰 이불을 만들어 형제들과 함께 그 안에 지냈다. 귀비가 아무렇지 않게 영왕(寧王)의 옥 피리를 훔쳐 불었다. 이 때문에 시인 장호(張祜)가 시를 지었다. ‘배꽃 핀 고요한 정원에 보는 이 없으니, 한가로이 영왕의 옥 피리 가지고 부네.’ 이 때문에 또 성지를 거슬려 쫓겨났다.(九載二月, 上舊置五王張, 長枕大被, 與兄弟共處其間. 妃子無何竊寧王紫玉笛吹. 故詩人張祜詩云: ‘梨花靜院無人見, 閑把寧王玉笛吹.’ 因此又忤旨, 放出,)” 그러나 사서에는 영왕(이헌)은 개원 29년(741)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다. 귀비가 영왕이 아끼는 물건을 가지고 놀았다 해도 당명황은 그러한 일이 체면이 서지 않는 예절을 벗어난 행위로 여기고 그녀를 황궁에서 쫓아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악사가 말한 것은 소설가들이 허구로 지은 이야기에 불과하지 역사적 사실로 보기 어렵다.


<그림> 화청궁 용석방(龍石舫) 안의 구룡지(九龍池), 백성들이 어찌 자주 갈 수 있었겠는가


근년에 출간된 당명황 전기에는 또 당나라 사람의 시문 중에는 괵국부인이 총애를 얻으려고 했다는 부분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 주된 근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 양귀비의 셋째 언니 괵국부인은 용모가 아름답고 성격이 방탕하여 일찍이 촉 땅에서 과부 살이 할 때 사촌오빠 양쇠(楊釗)(국충)와 간통하였다. 경성에 온 후 양귀비의 세 언니 중에 그녀가 당명황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았다. 풍류천자 당명황은 매혹인 자태를 뽐내는 이 “셋째 처제” 앞에서 분명히 마음을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부정한 관계를 맺은 곳은 바로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가 잘 어우러진 화청궁 내의 전각누대 안이었으며, 시기는 대략 천보 8~9년쯤 당명황이 여산으로 행차한 3개월 여 사이였을 것이다. 둘째, 양귀비가 두 번째로 궁중에서 쫓겨나는 풍파가 가라앉은 후 당명황은 특별히 양국충과 “여덟째 처제” 진국부인(秦國夫人)의 집에 들러 두 집에 엄청난 돈을 하사하고, 괵국부인은 회피했다는 점이다.

당대 사서를 자세히 읽어보면, 괵국부인이 총애를 얻으려고 했다는 설은 성립되지 않는 것 같다. 봉건시대 제왕이 후비를 총애하는 정도는 늘 변하고 일정치 않았기 때문에 자연히 감정과 총애가 한결 같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제왕의 후궁 중에 자매가 총애를 다투며 서로 해치는 일 역시 자주 있어왔다. 당명황의 조모 무측천의 경우, 고종(이치)에 의해 황후로 책봉된 후 무씨 집안은 더욱 크게 황은을 입었다. 무측천의 같은 어머니 소생인 언니가 남편이 죽고 혼자 있을 때 한국부인(韓國夫人)에 봉해졌고 자주 궁궐을 출입하였다. 한국부인에게는 자태가 빼어나고 용모가 아리따운 딸이 하나 있었는데 고종은 모녀 두 사람을 함께 총애하였다. 한국부인이 사망하자 고종은 그녀의 딸을 위국부인(魏國夫人)에 봉했고 동시에 빈어(嬪御)로 들이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무측천의 반대로 머뭇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무측천은 이에 대해 큰 증오를 품고 위국부인을 독살하였다.

양귀비는 무측천처럼 잔인하고 방자하며 포학하지 않았으나 “사납게 질투하고 불손하였다.” 당명황의 춘심은 여전했고 은택을 마음대로 베풀어 괵국부인과 정을 통했지만 양귀비가 어찌 언니가 미모를 이용하여 총애를 받으려고 한다는 것을 듣고 속수무책으로 가만히 있기만 했으며, 황제 부군에게 돌아와 “울며 소란을 피우는” 것만 알았겠는가? 임금의 용안은 건드리기 어렵지만 언니는 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간단한 도리를 “지혜와 계산에 밝은” 양귀비가 어찌 몰랐겠는가.


<그림> 흥경궁 안의 흥경호(興慶湖). 호수의 물이 맑아 비춰져있다.


당명황이 괵국부인과 정을 통한 일은 푸른 소나무와 잣나무가 잘 어우러진 화청궁 내의 전각누대 안에서 일어났는데, 이는 현대사회에서 혼외 연애를 하는 사람들이 공원에서 몰래 만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황제가 되어 궁궐을 나가 밖으로 행차할 때에는 반드시 금군의 호위를 받았고, 궁궐 내에서 움직이면 반드시 시종들이 따라다녔다. 괵국부인이 아주 방탕해서 자신의 몸을 바치길 원했다고는 하나 그녀의 신분은 “외명부”에 속했기 때문에 여동생인 양귀비와 총애를 다툴만한 기본적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그녀가 입궁하여 어가를 보았을 때 수많은 궁정예절에 제약을 받아야 했으니 어디 현대인처럼 자유롭게 밀회에 갈 수 있었겠는가.

또 분명한 것은 “안사의 난” 이후, 당명황과 귀비의 이야기는 문인들이 시문을 짓는 주된 소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문인학사들은 개원、천보 시기의 번영된 국면을 회상하기도 하고, 흥망성쇠의 원인을 연구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당명황에 대해서는 은근히 풍자를 했고, 양국충에 대해서는 자연히 “외척으로 정치에 간섭하여(外戚干政)” 국가를 혼란에 빠뜨린 것을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양귀비의 세 언니 특히 괵국부인에 대해서는 더욱 모진 말로 비난하였다. 이렇게 전대 문인학사들이 교묘하게 작품에 반영하여 역사적 진실을 더욱 알기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후세 학자들은 이런 시가、필기소설에 근거하여 역사적 사실을 고증하였고, 또 지금의 잣대로 옛날의 역사적 사실을 헤아렸으니 자연히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양귀비가 머리카락을 잘라 잘못을 뉘우친 행동에서 두 번이나 궁궐에서 쫓겨나게 되는 심각성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양귀비가 다른 비빈들과 서로 질투하며 총애를 다투었던 언니 괵국부인과 “질투하며” 사랑을 다투었던 간에 모두 “성지를 거슬려” 쫓겨나는 결말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황궁의 후비 사이에 총애를 다투어 득세하는 사람은 황제의 은총을 크게 많고 총애를 독점하였다. 실패자는 냉대를 받으며 폐해져 궁중에서 은밀히 죽어갔다. 그러나 양귀비처럼 두 번이나 견책을 받고 궁궐에서 쫓겨나고 두 번이나 다시 돌아와 더욱 크게 총애를 받는 현상은 드물었다. 이로 보면, 양귀비는 확실히 총애를 믿고 교만했으며, 당명황이 그녀에게 얼마나 깊이 빠져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당명황과 양귀비의 이야기를 전체적으로 봤을 때, 그녀는 죽어서도 후궁 여성들 중에 최고직위인 황후 자리를 얻지 못했다.

당나라 초기 여러 황제들에서 당명황에 이르는 사적을 돌이켜 보면, 후궁에서 황후는 이름만 있고 자리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고조 이연이 칭제했을 때 첫 번째 부인인 두씨(竇氏)가 이미 사망한 관계로 황후로 책봉하지 않았다. 태종 이세민의 장손 황후가 병사한 후에도 새로운 황후를 책봉하지 않았다. 예종 이단(李旦)(당명황의 부친)이 복위한 후에는 이미 작고한 비 유씨(劉氏)를 숙명황후(肅明皇后)로、두씨(당명황의 생모)를 소성황후(昭成皇后)로 추증하였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당나라 전기 여러 황제들의 후궁에는 왜 황후가 장기간 공석이 되는 현상이 나타났을까?

봉건왕조에서는 적장자가 황위를 계승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후궁의 비빈이 일단 황후가 되면 그가 낳은 아들(일반적으로 장자)은 바로 황태자가 되었다. 원래 황후가 아닌 비빈들도 모친으로 인해 자식이 귀해지기 때문에 아들은 먼저 태자가 되고 후에 자신은 황후로 책봉을 받았다. 모든 황후는 자신이 육궁에서의 지위와 황제의 총애를 지키려고 갖은 방법을 동원해 자신의 아들이 폐해지지 않도록 보호하였다. 그래서 태자의 폐립은 국가의 근본과 연관되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고, 직접적으로 태자와 그 생모의 존망과 연관이 있었으며, 더 더욱 태자의 모친 쪽 가계의 부귀영화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역대 왕조에서 황제의 후궁들 사이에 오랫동안 끊임없이 총애를 다투는 비극이 벌어졌던 원인이었다.

당고조 이연이 처음에 세웠던 태자 이건성(李建成)은 본처 두씨가 낳은 장자였고, 후에 차남 진왕 이세민(태자와 같은 어머니이다)이 일으킨 쿠데타로 살해당하였다. 이세민은 비 적장자 출신으로 쿠데타를 통해 즉위한 후 장손황후 소생인 장남 이승건(李承乾)을 태자로 세웠다. 정관 17년(643), 승건은 같은 어머니 소생인 동생 위왕(魏王) 이태(李泰)와 서로 권력다툼을 벌이면서 부황을 살해하려고 하였다. 일이 탄로 나자 두 사람은 모두 폐해졌다. 뒤를 이은 태자는 진왕(秦王) 이치(李治)(장손황후 소생)였다. 후에 이세민은 이치의 천성이 어질고 나약하며 사사로이 당파를 조직한 혐의가 있어 양씨 소생의 아들이자 문무를 겸비한 오왕(吳王) 이각(李恪)을 태자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이치의 외숙부이자 재상인 장손무기가 비밀리에 권고하는 바람에 그만두었다. 이치는 즉위하자 대신들이 모반을 일으키려 했다는 구실로 배 다른 형 이각을 연루시켜 사형에 처해버렸다. 당명황(세 번째 항렬)은 사직을 안정시킨 공로로 태자로 세워졌다. 그가 칭제한 후 태자의 지위를 둘러싼 궁정풍파는 앞에서 이미 서술했으므로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다.

다시 당나라 초기 여러 황제들의 황후를 보도록 하자. 태종의 장손 황후는 현명한 것으로 유명했다. 고종의 왕 황후는 단정하고 장중하였지만 불행히도 아들이 없어 결국 총애를 잃고 폐해졌다. 무 황후(측천)는 원래 지략이 많고 권력욕이 강하여 천자를 대신해 섭정하며 당나라를 주(周)나라로 바꾸어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황제가 되었다. 중종의 위 황후는 무후의 전철을 밟으려고 궁정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살해되고 말았다. 현종(당명황)이 왕 황후를 폐한 것에서 태상황으로 물러나기 전까지 무혜비、양귀비가 황후의 예우를 받았지만 정식으로 책봉하지 않았다. 이것은 주로 무후、위후의 권력욕이 궁중에서 많은 일을 초래했던 교훈을 배워 새로운 황후를 책봉할 때 야기되는 정국의 불안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황위계승과 사직을 지키는 문제와 관련해서 당명황은 결코 어리석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양귀비가 두 번째 궁궐에서 쫓겨난 시간은 첫 번째 보다 약간 길었다. 당명황의 태도 역시 첫 번째보다 차분하였다. 양귀비는 도리어 통곡하며 용서를 구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때문에 머리카락을 잘라 이별을 나타내 뉘우치고 있음을 나타내 용서를 구했다. 그 원인은 양귀비의 “사납게 질투하고 불손한” 행동이 황후의 자리 혹은 핵심권력이라는 두 “뇌관”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성지를 거슬려” 견책을 당하는 심각성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상술한 여러 가지 근거가 있다고는 해도 사서에는 양귀비가 황후를 “요구한” 분명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함부로 그 시비를 속단할 수 없다. 자고로 궁중의 비사(秘史)는 밖으로 전해지지 않았고, 사관들은 이를 숨겼기 때문에 더욱 알기 어렵다. 후세 비록 그 중의 일말의 단서를 살펴볼 수 있었지만 확실한 증거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사건이 전개된 이야기에 근거해서 “추리하고 판단”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림> 흥경궁 안의 울금향(鬱金香)    


1)치병거는 일반 관리의 처첩이나 귀족의 부녀자들이 타는 수레이다. 그 등급은 귀비가 타는 수레보다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