穆渭生 著 / 李商千*權容浩*姜秉喆 共譯 <唐楊貴妃>
*포항동양문학예술연구회(POLAS)의 첫번째 역서*
五、마외역(馬嵬驛)의 넋이 영원한 한을 남기다
1. 양국충이 권력을 농단하고 조정의 기강을 어지럽히다
천보(天寶) 11년(752) 11월에 양국충은 숙환으로 죽은 이림보(李林甫)를 대신하여 외조의 재상이 되어 대권을 장악하였다. 게다가 이때 양국충이 장악한 권력은 이림보가 생전에 누렸던 것보다 더 커져 행정、재정、인사권 외에도 일부분의 병권을 장악하였다. 양국충이 이처럼 큰 권력을 쥘 수 있었던 것은 그에 대한 명황(明皇)의 총애 외에도 중요한 원인이 하나 더 있는데 바로 일흔 살에 가까운 이융기(李隆基)가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나라를 걱정하는 경계심을 상실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천보 10년(751)에 이융기는 환관의 우두머리 고력사(高力士)에게 “짐은 나이가 많은 데다 기력도 한계가 있으니 조정의 정무는 재상에게 맡기고 변방의 전쟁은 장수들에게 맡기면 더 이상 아무 근심도 없을 게야”라고 한 적이 있다.
양국충이 재상 대권을 장악한 지 겨우 3년 만에 “안사의 난”이 폭발하였다. 그래서 이림보의 폐정(상하를 기만한 것、권력을 독단한 것、언로를 막은 것、반대자를 배척한 것 등)을 지속하고 격화시킨 양국충이 정치적으로 이림보보다 더욱 독단적이고 문란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양국충은 경솔하고 억지를 잘 쓰는 성격의 소유자로 품위가 부족한 사람이었다. 재상에 임명되자 주저하지 않고 과감하게 정치적인 기밀을 처리했지만 아무렇게나 처결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조당에서 소매를 걷어올리고 손을 맞잡은 채 공경 이하의 백관들에게 턱이나 얼굴빛으로만 암시하는 등, 정치적으로 벼락출세한 자의 오만한 태도 그 자체였다. 좌재상(左宰相) 진희열(陳希烈)은 양국충의 권력에 눌려 무조건 순종했을 뿐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양국충은 진희열이 그 자리에 오랫동안 있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림보의 추천으로 재상이 된 때문이었다. 천보 13년(754)에 양국충은 진희열을 재상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신을 따르고 통제하기도 쉬운 이부시랑(吏部侍郞) 위견소(韋見素)를 그 자리에 앉혔다.
선례에 따르면 재상은 아침 일찍부터 대략 오후 두시 반까지 정무를 보고 퇴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림보가 권력을 전횡할 때 천하가 태평무사하다는 이유를 들어 오전 11시쯤에 퇴청하여 모든 사무를 자신의 집에서 처리하였다. 양국충도 이런 나쁜 선례를 답습하여 자신의 사저를 조당으로 바꾸었다.
인심을 농락하기 위해 패거리를 키우면서 양국충은 우재상(右宰相)을 맡은 지 한달 후에 “이부에서 인재를 선발할 때 현명한지 그렇지 못한지를 물을 것 없이 자격이 되는지 안 되는지에 따라서 자리가 있으면 관직을 주자”라고 제의하였다. 이 덕에 예전 관직에 정체되어있던 평범한 무리들이 승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자들은 감격한 나머지 이구동성으로 양국충을 칭송하였다.
원래 관리를 선발하는 선례는 다음과 같았다. 구체적인 일은 이부시랑 이하의 관원들이 책임을 졌다. “3주3창(三注三唱; 당나라 때 6품 이하의 관리를 선발하는 제도로, 1차는 필기시험으로 書法과 文理를 보고, 2차는 면접시험으로 말과 생김새를 살피고, 3차는 적성에 맞을 관직을 평가함--옮긴이)”의 엄격한 과정을 거친 후에 다시 문하성(門下省)으로 보내어 심사를 하는데, 봄부터 시작하여 여름에 이르러서야 끝낼 수 있었다. 양국충이 이부상서를 겸하면서 일 처리에 아주 민첩함을 과시하기 위해 먼저 자신의 집에서 하급관원인 서리(胥吏)에게 선발할 사람들의 명단을 미리 정하게 한 다음 좌상 및 급사중(給事中)、각 사(司)의 장관을 소집해서 관공서인 상서도당(尙書都堂)에서 과거시험에 합격시킬 자들을 표명하도록 하여 하루만에 처리하였다. 양국충은 “오늘 좌상과 급사중이 자리했으니 문하성이 심사한 셈이오”라고 선포하였다. 이후로 관리를 선발하는 권한은 양국충 혼자서 좌지우지하였다.
봄에 정식으로 등록할 때 양국충은 자신의 집에서 합격한 자들을 소집해놓자, 이부시랑 위견소와 장의(張倚) 두 사람은 고위직 관원의 자색 관복을 입고서 수하의 속관들과 함께 양국충의 임시 관원이 되어 분주하게 뜰을 왕래하였다. 양씨 자매가 주렴 뒤에서 분주한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데, 일이 끝나자 양국충은 의기양양해 하며 위견소와 장의를 비웃으며 “너희들이 보기에 일을 주관했던 자색 도포를 입은 두 관원이 무엇 하는 사람 같더냐?”라고 하였다.
선발하는 일들이 끝난 후 양국충의 심복인 경조윤(京兆尹) 선우중통(鮮于仲通) 등의 사람은 합격자들에게 양국충을 위해 성문(省門)에 비석을 세워 그 합격자를 뽑은 “공(功)”을 기리도록 하자는 내용을 주청하도록 시켰다. 당명황(唐明皇)이 선우중통이 쓴 비문인 송사(頌辭)를 몇 자 고쳐주자 선우중통은 곧장 이 몇 글자를 금분으로 채워 넣음으로써 황제와 양국충에게 아첨을 다하였다.
양국충의 장자 양훤(楊暄)은 아비의 권세를 믿고 학업을 등한시하다가 명경과(明經科) 시험에서 낙방하고 말았다. 시험을 주관했던 예부시랑(禮部侍郞) 달해순(達奚珣)은 양국충의 세도에 겁을 먹고는 우선 아들 달해무(達奚撫; 昭應縣尉를 맡고 있었음)를 양국충에게 보내 “상공의 영랑께서 시험에 합격하지 못했다고는 하나 낙방하게 할 순 없다고 가친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양국충이 이 소식을 듣자 대노하였다. “내 아들이 어떻게 부귀하지 못할까를 근심하겠느냐! 그 쥐새끼들에게 최선이나 다하라고 하라!” 달해무가 돌아와 아비에게 “양씨 가문이 양귀비의 총애와 권세를 믿고 포악하게 구는 것이 참으로 두려웠습니다. 그곳에선 아마도 그들끼리 시비곡직을 따지고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달해순은 어쩔 수 없이 양훤을 상등으로 합격시켰다. 후에 양훤이 호부시랑(戶部侍郞; 정4품 하)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했을 때 그의 주임 시험관이었던 달해순은 겨우 예부시랑(정4품 하)에서 이부시랑(정4품 상)으로 달라졌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양훤은 자신이 달해순보다 승진이 늦다고 투덜거렸다.
양국충은 양씨의 다른 형제자매들과는 달리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리는 것에 만족해하지 않고 권력을 움켜잡는 데에 치중하였다. 그는 괵국부인(虢國夫人)과 장기간 간통하면서도 남들을 의식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하나는 그들의 사생활이 음란했음을 반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괵국부인이 마음대로 황궁을 드나들며 적극적이고 자유로운 성정으로 양국충을 대신해 당명황의 희노호악(喜怒好惡)을 잘 알아내어 양국충이 정계에서 권력을 다투기에 유리하도록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양국충이 권력을 손에 넣으면서 조정에는 더 이상 그와 맞설 수 있는 신하가 없었다. 그러나 양국충과 맞설 수 있는 자는 바로 동북 변경의 대장군 안록산(安祿山)이었다. 당 초기부터 실권을 장악한 변경의 대장군은 공적이 탁월하면 조정에 들어와 재상직을 맡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었다. 당명황 개원(開元) 연간의 장설(張說)、두섬(杜暹)、소숭(蕭嵩)、우선객(牛仙客) 등이 바로 이러하였다. 천보 시기에 명황이 변방 절도사들에게 부여한 권력이 날로 확대되자 조정의 재상은 그들이 입조하여 재상이 되는 것을 막고자 애썼다. 이림보가 공이 높고 명성도 있었던 하서(河西)、농서(隴西) 절도사(節度使) 왕충사(王忠嗣)를 배척하고자 모함했던 것이 그 예라고 하겠다.
안록산이 점차 총애를 받아 승진하는 과정에서 하북도채방사(河北道采訪使)였던 장리정(張利貞)、하북도출척사(河北道黜陟使) 석건후(席建侯)、호부상서 배관(裴寬)과 우재상 이림보가 연이어 명황의 면전에서 안록산이 공평무사하고 법을 엄정하게 받든다고 칭송하였다. 그 중에 특히 이림보가 가장 큰 역할을 하였다. 이림보는 명황이 하찮은 번장(番將)에게 변방 절도사를 맡기는 정책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는데, 번장들이 비록 무용에는 뛰어나지만 대부분 수준들이 낮아 조정에서 지원할 당파가 없고, 또 이렇게 되면 변방의 장수가 입조하여 재상이 되는 길을 막을 수 있는 동시에 자신의 재상지위를 견고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림보는 권모술수에 뛰어나서 안록산에게 인자할 때와 엄할 때를 잘 조절한 탓에 이림보가 병사하기 전까지 안록산은 줄곧 신중하게 처신하며 오만하게 굴 생각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다.
그림 화청궁(華淸宮) 안의 한 모퉁이
이림보가 죽고 나서 명황은 태상경(太常卿) 장기(張土自)、환관의 우두머리 고력사(高力士)와 안록산을 입조시켜 재상에 임명할 일을 논의한 적이 있다. 이리하여 양국충이 이림보의 직위를 대신하면서 안록산을 누르려고 갖은 계략을 다 짜내었다. 그러나 안록산은 일찍부터 경성에 밀정을 두고서 조정의 동태를 살폈고 수시로 보고도 받고 있었다. 비록 양국충이 천보 연간의 최고 권력자였다고는 하나 그의 입신출세는 안록산보다 늦다. 양국충은 안록산의 거동에 대해 뚱뚱한 안록산이 궁중의 계단을 오르내릴 때 부축을 받아야 할 정도라고 비난을 했지만 안록산은 되려 양국충을 무시하였다. 농락과 비난이 효과를 보지 못한 상황에서 양국충은 여러 차례 명황에게 상주하기를 “안록산에게 모반을 일으킬 마음이 있다”고 하는 동시에 평소 안록산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농우(隴右)절도사 가서한(哥舒翰)으로 하여금 하서절도사를 겸하도록 주청하였다. 이로써 자신의 세력진영을 증강시켜 공동으로 안록산에게 대응하였다.
재상의 권력이 확대되면 권력남용이라는 현상은 필연적으로 출현한다. 동시에 거짓말로 권력의 남용을 감추려는 것도 필요해진다. 양국충은 여러 차례 “안록산은 반드시 모반할 것”이라고 상주하고는 “폐하께서 시험삼아 그에게 입조하라고 하시면 그는 틀림없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였다.
그러나 천보 13년(754) 정월에 안록산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입조하였다. 이것은 경성에 심어두었던 안록산의 밀정으로부터 명황과 양국충의 의도를 때맞춰 알았기 때문이고, 동시에 모반을 일으킬 조건과 시기가 아직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록산은 화청궁에서 명황을 배알할 때 울며불며 하소연하였다. “신은 본래 이방인이었으나 폐하의 은총을 입었지만 생각지도 못하게 양국충의 원한을 사게 되었습니다. 신은 언젠가 그에게 모함을 받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명황은 그의 하소연을 듣고 난 후 위로하며 막대한 상을 내려주었다. 이후로 안록산에 대한 명황의 신임은 더욱 깊어졌다. 그러나 양국충은 여전히 “안록산에게 비록 군공이 있다고는 하나 일자무식인인데 어떻게 재상의 직위를 맡길 수 있겠습니까? 만약에 임명하는 조서를 내리신다면 아마도 사방의 오랑캐들이 우리 대당왕조를 비웃을 것입니다”라는 이유를 들어 명황이 안록산을 재상으로 발탁하려는 계획을 취소하도록 하였다.
당명황 주변의 심복이자 환관의 우두머리인 고력사는 일찍부터 안록산의 군대가 너무 강성하여 이미 통제하기 힘든 기세라는 것을 알아채고는 상주하였다. “변방 장수들의 군대가 너무 강성해졌는데, 폐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통제하시겠습니까? 신은 언젠가 변고가 발생하게 되면 벗어나기 힘들까 두렵습니다!” 천보 14년(755) 여름과 가을 사이에 양국충과 위견소가 함께 다시 안록산의 모반 기미가 뚜렷하다고 상주하였다 하지만 명황은 “짐은 안록산에게 마음을 다해 대우해주었기 때문에 틀림없이 다른 마음이 없을 것이니 너희들은 걱정할 필요 없다”라고 하였다. 명황은 스스로 높은 관직에다 후한 상과 봉작으로 안록산을 충분히 구슬릴 수 있다고 여겼다. 안록산도 처음에는 명황이 죽고 난 후에 군대를 일으킬 생각이었다. 그러나 양국충은 당명황을 뒷배로 안록산과 “마찰”을 가중시켜 안록산이 조속한 시일에 반역하도록 자극하고 이로써 스스로 명황의 신임을 독차지할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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