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唐國史補

14. 모반을 꿈꿨던 안록산

마장골서생 2009. 12. 1. 10:43

[당] 이조 지음 / 이상천 옮김 《당국사보(唐國史補)》, 학고방출판사, 2006.

 

14. 모반을 꿈꿨던 안록산(安祿山心動)


안록산(安祿山)은 은총이 점점 깊어지자 임금 앞에서 응대할 때에도 농담을 섞어 하였고, 양귀비 또한 항상 곁에 앉아 있었다. 현종이 영을 내려 양씨가의 세 부인들을 안록산과 의형제를 맺도록 했는데, 이때부터 안록산은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양귀비가 마외(馬嵬) 역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수일동안 탄식했다고 한다. 비록 이림보(李林甫)는 안록산을 용인해 주었다고는 해도 양국충은 안록산을 격노하게 하였다. 그러나 안록산이 모반하려는 뜻은 일찍부터 그 근원을 가지고 있었다.

(安祿山1)恩寵寢深2), 上前應對, 雜以諧謔, 而貴妃3)常在坐. 詔令楊氏三夫人4)約爲兄弟, 由是祿山心動. 及聞馬嵬5)之死, 數日嘆惋. 雖林甫6)養有之, 而國忠7)激怒之, 然其他腸8)有所自9)也.)


1) 안록산(安祿山; ?-서기757년)은 영주(營州) 유성[柳城; 지금의 요녕성(遼寧省) 조양시(朝陽市)] 사람으로 북방의 소수민족에 속한다. 본성은 강(康)이고 이름은 알뢰산(軋牢山)이다. 어머니가 돌궐(突厥)사람 안연언(安延偃)에게 개가하여 안록산으로 개명하였다. 그는 싸움에 능했고,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장수규(張守珪)의 양자가 되면서 평로병마사(平盧兵馬使)와 영주도독(營州都督)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훗날 갖가지 수단으로 현종과 양귀비의 환심을 사서 마침내 평로(平盧), 범양(範陽), 하동(河東) 세 개 진(鎭)의 절도사를 겸하게 되었다. 천보(天寶) 14년(755년) 겨울,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키고는 “대연황제(大燕皇帝)”라고 칭하였다. 이듬해에 장안을 공격해 들어가 노략질과 살인을 일삼다가 3년째 되던 해에 그의 아들 안경서(安慶緖)에게 살해되었다.

2) 침(寢): “浸”과 같은 “점점”의 뜻이다.

3) 귀비(貴妃): 바로 양귀비(楊貴妃; 719-756)이며, 포주 영락[蒲州永樂; 지금의 산서성 예성시(芮城市) 서남쪽] 사람으로 어릴 때의 자는 옥환(玉環)이었다. 원래 현종의 아들 수왕(壽王) 이모(李瑁)의 비(妃)였다. 입궁하여 후에 현종의 총애를 받아 귀비로 봉해졌다.

4) 양씨삼부인(楊氏三夫人): 양귀비의 세 자매로서 각각 한국부인(韓國夫人), 괵국부인(虢國夫人), 진국부인(秦國夫人)에 봉해졌다.

5) 마외(馬嵬): 마외역(馬嵬驛)을 말한다. 지금의 섬서성 흥평(興平) 서쪽에 있었다. 안사(安史)의 난이 발발한 지 2년째에 현종이 서쪽 성도(成都)로 도망칠 때 군대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 양귀비를 죽이라고 현종을 압박했는데, 그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6) 림보(林甫): 이림보를 가리킨다. 이림보는 절도사들이 공을 세운 뒤 입조하여 재상이 되면 자신의 지위에 위협이 미칠까 두려워하여, 호인(胡人)을 이용하여 변방을 수비토록 적극 건의한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안록산이 대군을 소유할 수 있었고 반란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이다.   

7) 국충(國忠): 양국충(楊國忠)으로 양귀비의 사촌 오빠가 된다. 양귀비와의 관계로 당 현종의 총애와 중용을 받게되어 어사(御史)에서 재상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는 안록산과의 마찰 때문에 여러 차례 현종에게 안록산이 반란을 도모하려 한다고 주청했으나 현종이 믿지 않자 현종으로부터 신임을 얻기 위하여 사람을 놓아 안록산이 파견한 경성의 염탐꾼을 잡아죽임으로써 안록산이 분노하여 하루 빨리 반란을 일으키도록 충동질하였다. 

8) 타장(他腸): “다른 마음(異心)”과 같다.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가리킨다.

9) 소자(所自): 근거, 원인, 이유, 까닭, 내력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