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文史哲/韓國歷史

5. 좌우합작은 김규식이나 여운형이 주도했다?

마장골서생 2009. 7. 26. 23:42

 좌우 합작운동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좌우 합작운동이 김규식 혹은 여운형이 민족주의적 동기에서 발의한 것이며, 그것이 성공했으면 남북통일이 되었을 텐데 이승만과 한민당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1946년 5월부터 시작된 남한에서의 좌우 합작운동은 김규식이나 여운형이 민족주의적 동기에서 발의한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미국 정부가 자국(自國)의 한반도 정책을 원활히 집행하기 위해 남한 정계에서 이승만과 김구를 무력화하고 새로운 협조세력을 확보하려는 계획에 따라 시작한 것이다. 그에 관한 각본을 마련하고 배후 조종한 것은 미군정 당국이었다.

 

  김규식이나 여운형이 좌우합작의 필요성을 주장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니나, 1946년 5월부터 전개된 좌우 합작사업은 그들이 계획하고 발의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사실은 세 차례에 걸친 좌우 합작 예비회합을 미군정의 정치고문인 버치의 집에서 가졌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김,여 양인의 좌우합작 참여 동기도 꼭 민족주의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여운형의 경우, 좌우합작과 관련된 그의 행동은 민족주의적 동기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점들이 많다. 여운형은 좌익진영에서 박헌영의 주도권 강화로 자신의 입지가 약해지면 좌우합작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다가 입지가 회복될 가능성이 보이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또 김일성에게 좌우 합작을 발전시켜 미군정의 영향력을 감소시킨다는 내용의 밀서를 보낸 바 있으며, 남한 지역에서 좌우 합작을 하고 나서 그 토대 위에 다시 남북한이 합작한다는 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이승만과 한민당이 좌우 합작을 방해했다는 주장도 타당하지 않다. 이승만의 경우는 김규식으로 하여금 좌우합작에 나서도록 종용했으며, 좌우합작의 정신을 지지했다. 한민당도 좌우합작을 반대하지 않았다.

 

  좌우합작이 실패하게 된 주된 원인은 남한의 좌우 정치세력의 입장이 정면 대립하여 절충이 불가능했던 데 있다. 좌우 진영의 입장이 크게 대립했기 때문에 좌우 합작위가 1946년 10월 초 좌우 양측 입장을 적당히 절충한 좌우합작 7원칙을 발표했을 때 좌우 진영의 핵심부에 위치한 공산당과 한민당이 다 같이 그것을 거부했고, 그에 따라 좌우합작이 실패했던 것이다.

 

  남한에서 좌우 합작이 성공하고 그를 토대로 남북 합작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통일정부에서는 좌익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것이 분명했다. 단순한 산술적 계산을 해보면, 1945년 2월 이후 북한에는 좌익정권이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에 남한의 좌우합작체제와 북한의 좌익정권이 합작하면 그 남북통일 정권에서 좌익은 75%의 지배력을 장악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산술적 계산에 더하여 남한의 공산당은 북한 공산당에 완전히 지배되어 있었고, 여운형은 김일성과 긴밀한 내통관계에 있었다. 좌우합작 성공으로 김구계와 김규식계가 통합, 이승만-한민당계와 갈등할 것이며, 토지개혁으로 한민당의 경제적 지지기반이 약화될 것이라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한다면 남한의 좌우합작을 토대로 한 남북합작의 통일정부에서는 좌익의 헤게모니가 확고하게 보장될 것임이 분명하다.

 

  좌익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확고한 헤게모니를 장악한 정부가 통치하는 한반도는 필연적으로 사회주의화되었을 것이다. 좌우합작이 성공하여 통일이 이뤄졌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말하는 것은 한반도가 공산화 통일이 됐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해 아쉽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다.

 

  양동안 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

 

  '대한민국 건국사'(이승만 박사 기념사업 출판사업부) 중에서

입력날짜 : 2006-05-03 (1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