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을 미국의 앞잡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1)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나 고국이 해방된 후 귀국할 때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2)귀국 후 남한지역에 친미반공정권을 수립하려는 미국의 지시에 따라 남한지역에 민족을 분단하는 단독정부를 수립했다고 말한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미국 정부의 지원을 특별히 받은 것도 없지만 미국 정부와 관계가 나쁘지도 않았다. 그러나 2차대전 종전까지의 수년 간 미국 정부, 특히 미국의 한반도 정책 주관부처인 국무성은 이승만의 활동을 지원하기보다는 방해했다.
이승만과 미국무성간의 관계가 '불만족스러웠던' 원인은 미 국무성 내의 좌익관리들의 이승만에 대한 혐오 때문이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히스(Alger Hiss) 특별정치국장, 빈센트(John Carter Vincent) 극동국장 등과 같은 친소ㆍ친중공 인사 내지 공산주의자들이 2차 세계대전 말기 미 국무성에 침투해 있었고, 중국과 극동문제를 담당하는 관리들 가운데 그런 사람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이 민족 자주의식이 강하고 확고한 반공 반소 입장을 취한 이승만에게 비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을 것은 설명이 필요 없다.
이승만이 1946년 6월부터 전개한 남한지역 자율정부 수립운동도 미국의 한반도 정책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 시점에서의 미국의 한반도정책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문제와 관련해서도 이승만과 미국은 대립했다.
미국은 모스크바 협정에 입각, 소련과 합의해서 한반도 통일임시정부를 구성하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에 반해 이승만은 소련이 북한에서 일방적으로 단독 공산정권을 구성하고 토지개혁 등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조치들을 단행하고 있으며, 공산당이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통일 임시정부가 아니면 통일 임시정부 구성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려는 술책을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국의 정책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승만과 미국 정부의 이러한 입장차이로 인해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이 확정되는 단계에 이를 때까지 이승만과 미국 정부(주한 미군정)는 크게 갈등ㆍ대립했다. 이승만이 1945년 6월 ꡐ정읍발언ꡑ을 통해 남한에 독자적으로 정부를 수립할 것을 천명하자 미군정은 이승만을 강력 비난했다.
미군정은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순종적인 김규식을 중심으로 한 중도파 세력을 미군정의 협조자로 삼고 남한에 자율정부를 수립하려는 이승만과 김구를 적대시하면서 이ㆍ김 두 지도자를 한국 정계에서 퇴출시키려 노력했다.
심지어 남한 정계의 지도자들로 위촉하는 남조선 과도(過渡)입법의원의 관선(官選)의원에 당시 남한의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 지도자인 이승만과 김구를 배제했다. 미군정은 이승만이 남한지역 정부 수립에 대한 미국 내의 지지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방미(訪美) 외교활동을 떠날 때는 그의 출국을 방해했고, 그가 귀국했을 때는 정부수립 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한때 이승만을 가택 연금했다.
양동안 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
이 글은 양동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의 ≪대한민국 건국사≫(이승만 박사 기념사업 출판사업부) 중에서 정리한 것임.
입력날짜 : 2006-04-24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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