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文史哲/韓國歷史

3.우리 민족을 위해 신탁통치를 받아들여야 했다?

마장골서생 2009. 7. 26. 23:40

 미국과 소련이 1945년 12월 모스크바 협정에서 합의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실시를 우리 민족이 수용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 민족이 신탁통치를 수용했더라면 남북으로 분단되지 않고 통일된 정부 하에서 민주적으로 발전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대부분 오스트리아가 2차대전 종전 후 신탁통치를 받아들여 민족의 분단을 방지하고 민주적 번영을 이룩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들이 우선 범하고 있는 오류는 한반도와 오스트리아의 상황이 판이했다는 점을 간과했다는 것이다.

 

  첫째, 오스트리아에 대해선 강대국들이 신탁통치를 실시한 바가 없다. 유럽에서 2차대전이 종료된 1945년 5월 오스트리아를 분할 점령한 미․소․영․불 군대는 오스트리아를 신탁통치하는 협정을 체결한 것이 아니라 점령 통제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선 미국과 소련이 신탁통치를 실시하려 했다.

 

  둘째, 외국 군대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직후부터 오스트리아의 정치세력들은 통일된 임시정부를 구성했으며, 한 번도 4개 외국 군대 점령지역별로 별개의 독립된 정치ㆍ행정기관이 구성된 일이 없었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미․소 양국 군대의 점령지역 진입과 동시에 남북한에 별도의 통치기구가 설립되어 각 지역을 상이한 내용으로 통치했다.

 

  셋째, 오스트리아에서는 각국 군대의 분할․점령지역 간에 교통․통신․상거래의 단절이 이뤄지지 않았다. 각국 군대 간에 군사분계선이 존재했지만 그 분계선은 군사 활동에 관한 경계선에 그치고 통치분계선으로 변질되지 않았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소련군이 북한을 점령하자마자 교통․통신을 차단하여 북한지역을 남한으로부터 분리함으로써 미․소 양국 군대간의 군사분계선이 통치분계선으로 변질되었다.

 

  넷째, 오스트리아의 좌익세력이 소련에 대해 자주적 자세를 취하고 좌우연합에 의한 통일정부 유지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는 우익진영에 인민당(구 기독교사회당), 좌익진영에 사회당(구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존재했다. 온건 좌익노선의 사회당은 공산당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한 당세를 유지하고 있어 좌익진영내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사회당은 사회주의 노선을 취하면서도 오스트리아가 소련의 위성국이 되는 것은 절대 피하려는 입장이었으며,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미․소․영․불 4개 외국 군대에 대응함에 있어 우익정당인 인민당과 확고한 공동보조를 취했다. 그에 반해 한반도에서는 좌익진영의 주도권을 소련에 맹종하는 극좌노선의 공산당이 장악하고 있었으며, 공산당은 우익진영과의 협력을 외면하고 소련의 한반도정책 실천에 협력하려고만 했다.

 

  어떤 민족에 대해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것이 정당성을 인정받으려면 그 민족 구성원들이 민도(民度)가 낮아 자치 역량을 갖추지 못하거나 독립을 희망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한국인은 당장 독립이 되더라도 독립국가를 유지․운영할 수 있는 민도와 자치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한국 민족은 일본에게 강제 병합되기 전부터 장기간 독립적으로 국가를 유지 운영해 왔고,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받던 기간 중에도 독립운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왔다.

 

  1945~1948년 당시 한국인의 민도와 자치(自治)역량은 그 시기에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고 독립한 인도․파키스탄․버마․인도네시아 등의 국민의 민도와 비교할 때 결코 떨어지지 않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미군정의 정치고문으로 일했던 사람도 사석(私席)에서는 한국인의 자치 능력을 인정했다.

 

  당시 한반도의 정치세력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 소련과 미국의 한반도 정책, 중국의 공산화 등을 고려할 때, 5년 동안의 신탁통치를 거쳐 독립이 됐을 경우 한반도는 전체가 공산화되지 않았으면 두 개의 국가로 분단되었을 것이다.

 

  당시 한반도의 정치세력들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를 보면,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세력이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우선 북한에서는 1946년 전반기의 토지개혁 실시 이후 공산당이 압도적 지지를 받게 됐다고 봐야 한다.

 

  남한에서는 신탁통치 반대운동으로 인해 우익세력이 좌익세력에 대한 초기의 열세를 크게 만회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좌우 진영에 대한 대중의 지지도가 거의 비슷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승만과 김구는 지도자로서 대중의 존경을 받았지만 좌익정당들의 토지개혁 공약 등에 대한 대중적 지지도가 높아서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존경이 우익진영에 대한 지지로 바로 연결되진 못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정치세력들의 대중 지지도를 고려할 때. 통일 임시정부가 구성되고 그 임시정부에 의해 선거가 실시됐다면 한반도 전체에서 좌익진영이 과반수에는 미달하지만 최다 득표를 획득했을 것이다. 우익진영은 좌익보다 약간 적은 득표를 했을 것이다. 중도파는 미미하지만 일정한 득표는 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좌익과 중도파 및 우익의 김구(金九)-임정(臨政)계가 참여하는 연합세력이 집권연합을 구성하게 되고 이승만과 한민당은 야당이 되었을 것이다. '좌익+중도파+임정계'의 집권연합은 신탁통치가 종료된 후에도 계속됐을 것이고, 그 집권연합은 북한에서 1946년에 실시된 것과 동일한 토지개혁과 산업국유화를 남한지역까지 확대 실시했을 것이며, 따라서 다른 요인들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의 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다.

 

  양동안 한국학 중앙연구원 교수

 

  이 글은 양동안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의 ≪대한민국 건국사≫(이승만 박사 기념사업 출판사업부) 중에서 정리한 것임.

   

  입력날짜 : 2006-04-24 (16: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