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80년대 초기, 햇살이 부서지는 봄날이었다.
열차가 기적소리를 울리며 덜컹덜컹 바람처럼 숭산의 준령들 사이를 거대한 한 마리의 용처럼 뚫고 지나간다.
북적이는 좁은 통로를 류스는 흔들리며 한 칸 한 칸씩 객차를 뚫고서 사람들 소리로 떠들썩한 식당 칸에 도착하였다.
식당 칸은 사람들로 들어차서 빈자리가 없었다. 복무원들은 식탁으로 음식을 나르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소리를 질러대었고, 자리를 잡지 못한 많은 여객들은 하는 수 없이 북적이는 통로에 서서 차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류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돌아가려 했지만 좁은 통로는 이미 사람들로 막혀버렸다. 마침 몸 가까이 차창가의 한 손님이 식사를 마치고 몸을 일으켜 자리를 뜨자 류스는 용을 쓰며 비집고 들어가 앉았다.
자리 맞은편은 아름답고 얌전한 한 아가씨였다. 가슴에는 “베이징광뽀쉬에위앤(北京廣播學院;북경방송전문대학)”의 뺏지가 붙어있고, 손에는 두꺼운 소설책 한 권을 들고서 무의식중에 고개를 들어 류스를 쳐다보았다.
류스도 아가씨의 청순하고 아름다움에 끌리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마치 둘 다 얼굴이 익은 듯하여 의식적으로 가볍게 머리를 까딱하며 웃고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앞쪽의 한 사람이 먼저 왔느니 뒤에 왔느니 우기며 떠들어대었다.
류스는 차가운 시선으로 시끌시끌한 식당 칸과 낯선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무심하게 메뉴판을 만지작거렸다. 두리번거리는 시선은 이따금씩 앞에 앉아 열심히 책을 보고 있는 아름다운 아가씨 쪽을 휘둘러보곤 하였다. 그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아가씨의 손에 든 소설의 겉면이 마침 류스 쪽으로 향하자 화려한 책의 겉면에 눈에 띄는 몇 개의 큰 글자로 <류스소설선집(劉什小說選集>)이라고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류스는 미동도 않은 채 웃으며 시선을 아가씨에게 고정하고 바라보았다.
아가씨는 남자의 시선을 의식한 듯 몰두하던 얼굴이 붉어졌다. 그녀는 고의적으로 개의치 않는 듯 조용히 책을 속표지 쪽으로 덮었다. 작자인 류스의 사진이 그녀를 향하여 웃고 있었다.
아가씨는 약간 흥분한 듯이 고개를 들고는 용감하게 눈앞의 명성이 대단한 청년작가를 바라보며 가볍게 물었다. “선생님이 작가 류스 동지죠? 미안합니다만 제가 잘못 보지 않았다면......”
류스는 조심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끄덕이고는 그녀를 친근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아가씨가 내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을 지켜봤는데, 맘에 드나요?
아가씨는 책을 받쳐들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아주 좋아해요! 선생님의 소설에는 사람을 깊이 감동시키는 힘이 있어요. 전 거의 매 편을 다 읽었고, 일부 근사한 단락과 경구는 다 외울 수 있어요. 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너무 기뻐요......흥분돼서 말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에요.”
“고마워요. 아가씨는 어디에서 일하세요? 대학생?”
“아, 전 왕창(王暢)이라고 하는데, 시 텔레비전 방송국의 아나운서예요.”
“오, 내가 어째 어디에선가 본 것 같더라니, 우리 정말 인연이 있는 것 같군요! 아가씨를 알게 돼서 아주 기쁩니다.” 류스는 깔끔한 매너로 고개를 끄덕이고 미소를 지으며 왕창의 작은 손과 악수하였다.
왕창은 겸연쩍은 듯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덧붙였다. “저는 방송국에서 일한 시간은 길지 않아요. 군대에서 제대한 후 일정기간 인턴 아나운서로 있다 후에 베이징광뽀쉬에위앤 뽀인씨(播音系;방송학과)의 전문대학과정에 들어가 2년을 수료하고 지금 막 졸업하고 방송국으로 돌아가는 중이에요......”
“아가씨가 군인이었다고?” 류스는 약간 의아해하며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왕창은 약간 치기 어린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며, 자신만만하면서도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그렇게 안보여요? 전방에 있었던 걸요!”
류스의 눈빛이 번쩍였다. “그래요? 어느 부대에 있었죠?”
“64군에요......” 왕창은 낯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류스는 자신도 모르게 아가씨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64군? 내 막내 동생도 64군에서 근무했는데, 들은 적이 있나요? 리우커(劉克)라고, 어릴 적 이름은 미커(咪克)였는데, 자위반격전 중에......”
왕창의 눈가는 이미 붉어졌고, 고개를 떨구고는 잠시 아무 말도 않다가 가볍게 말했다. “전 미커를 알고 있어요. 예전에 선생님과 뿌얼스웨이커 형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기도 했죠......”
“그랬군요......” 류스는 이미 아가씨와 미커 사이의 모종의 특수한 관계임을 알아챘다. 두 사람은 동시에 침묵으로 빠져들었다.
방송 스피커에서 꾸안무춘(關牧村)의 우울하고 슬픈 노래 소리가 흘러나왔다.
식당 칸의 복무원이 마침내 음식을 날라 오고는 메뉴판을 거두어 갔다.
류스는 얼굴에 친근한 미소를 띠고는 요리접시를 중간으로 밀면서 말했다. “자, 우리 함께 듭시다.”
왕창은 눈가를 훔치고는 약간 겸연쩍은 듯이 류스를 향해 억지로 미소짓고는 묵묵히 젓가락을 들었다. 열차는 야간운행으로 접어들었고, 열차바퀴의 소리가 리듬감 있게 덜컹거렸다.
침대 칸의 등은 이미 소등되고, 바닥에 가까운 작은 등만이 남아 희미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여객들은 이미 각자의 침대에 들었고, 여기저기 코를 고는 소리만 울렸다.
류스와 왕창은 아직 통로의 작은 탁자 곁에서 낮은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왕창은 고통스런 기억에 잠겨서 끊어질 듯 이어가며 말했다. “저와 미커는 입대한 후로 군의 선전대(宣傳隊)에서 알게됐어요. 같은 도시에서 왔기 때문에 접촉이 자연스럽게 많았는데, 특히 그와 뿌얼스웨이커 형제의 고난과 역경을 듣고 난 후에 전 급속히 그에게 감정이 생겼어요......아시다시피 군대는 병사들 간의 연애를 금지하잖아요? 그래서 둘의 관계를 극도로 조심하여 저의 가장 친한 여자 친구 한 명 외에는 아무도 이 일을 아는 사람이 없었지요......우리는 함께 창작하고, 함께 연출하고, 함께 공연했어요......미커의 하모니카는 정말이지 대단했어요! 그의 하모니카 소리는 간혹 절 꿈결같은 환상 속으로 데려가곤 했고, 눈물을 흐리게 했지요. 전쟁 전에 그는 단호하게 연대에 전출되기를 요구하였고, 연대로 가자 몇 일되지도 않아 황급히 전방으로 가게되었어요......”
왕창은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감싸고서 낮게 흐느꼈다.
류스는 어둠 속에서 묵묵히 담배를 피우며 깊이 한숨을 쉬고는 낮게 말했다. “눈 깜짝할 새에 미커가 희생된 지 벌써 3년이 넘었어요. 세월이 정말 빠르군요......미커는 대단한 애였어요! 어려움 속에서 소침해하거나 타락하지도 않았지요. 미커는 우리 뿌얼스웨이커 형제의 영광이자 자랑이지요! 미커를 잊어요. 창창. 만일에 아가씨가 진정으로 미커를 사랑한다면 미커처럼 영원히 미소를 머금고 인생에 부딪혀 가야하겠지요. 아가씨는 이렇게 과거의 그림자 속에서 하염없이 훌쩍거리며 살수는 없어요. 아가씨의 삶은 이제 막 시작이에요. ‘사람이 살다보면 어디에서건 만나지 못하겠어요?’ 다만 아가씨의 삶의 신념과 인생의 추구만 확고하다면 일과 성공, 그리고 사랑과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내 말 믿어요? 더 용감하세요!”
아마도 청년작가의 시와 같이 뜨거운 언어와 진솔하고 친근한 어조 및 저음의 듣기 좋은 남자의 저음이 아가씨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켰다. 왕창은 천천히 반짝이는 눈을 들어 어둠 속에서 류스의 보일 듯 말 듯한 얼굴과 반짝이는 눈빛을 묵묵히 바라보노라니 갑자기 익숙한 듯 하면서도 낯선 청년 남자에 대한 특별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이 마음 밑바닥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냉정하게 자신의 감정적 충동을 억제하면서 상대방에게 잡힌 손을 가볍게 뽑았다.
열차는 굉음을 내면서 캄캄한 터널 속으로 진입하자 순식간에 미친 듯한 바람이 울고, 창가의 커튼이 흩날렸다. 힘차게 덜컹거리는 기차바퀴 소리가 순간적으로 천둥소리처럼 울리기 시작하였고, 하얀 전등의 빛은 간간이 금방 서로 알게 된 청춘 남녀의 얼굴에 번쩍였다. 순간, 사람들에게 갑자기 무대 위의 햄릿 왕자와 아가씨 오필리아가 밀회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떠올리게 하였다......
날이 밝았다. 열차는 즐거운 듯 녹색 초원을 달려간다.
여객들은 이미 일어나 각자의 짐을 챙기고 있다. 열차의 방송인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종착역 산청(山城; 重慶)의 개황과 환승열차를 안내하고 있고, 객차 안에는 즐거운 분위기로 넘쳤다.
류스는 간단한 짐을 들고서 객차로 오자 친구처럼 왕창을 불렀다. “헤이! 도움이 필요해요?”
왕창도 친근하게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괜찮아요. 아버지와 작은 이모가 역으로 절 마중오시고요, 짐도 많지 않아요......”
“어머니도 오시나요?” 자상한 류스가 느닷없이 물었다.
왕창의 얼굴에 한 자락의 그늘이 스치며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어머닌 안 계세요. 재작년 여름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류스는 급히 낮은 소리로 사과하였다. “오, 미안해요......”
기적소리를 길게 울리며 열차는 속도를 늦추어 산청의 역사로 진입하였다.
왕창은 갑자기 류스에게 한 장의 쪽지를 건네고서는 얼굴을 붉히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만일에 개의치 않으신다면 스토우 오빠라고 불러도 되겠어요? 이것은 저의 집과 직장의 전화번호인데, 자주 연락했으면 해요......”
류스는 마음이 약간 흥분되었고, 조심스럽게 그 쪽지를 집어넣었다.
두 사람은 서로 말없이 아쉬운 듯 바라보았다.
왕창은 입술을 깨물면서 류스의 소설 선집을 꺼내어 건네자 류스는 마음속으로 알아차리고는 만년필을 꺼내어 용이 날고 봉황이 춤을 추듯이 격려의 말과 서명을 하였다.
“고마워요!” 왕창은 격려의 글을 보고는 얼굴이 붉어졌다.
열차는 경쾌한 음악소리 가운데 천천히 역사로 들어섰다.
왕창은 갑자기 몸을 돌려 창문 쪽으로 굽히고서는 호들갑스럽게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아빠! 작은 이모! 저 여기 있어요!”
그녀는 아이처럼 머리를 돌려 류스에게 생긋이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빠와 이모가 오셨어요. 스토우 오빠, 잘 가세요!”
인사말을 마치자 짐을 챙겨 들고는 빠른 걸음으로 객차의 문 쪽으로 걸어갔다.
류스가 차창 밖을 내다보니 시 위원회 부서기 겸 부시장 왕뢰이와 조선소의 여기사 꾸야훤이 열차를 따라 잰걸음으로 쫓아와서는 다급한 듯이 객차 쪽으로 머리를 내밀어 살피는 것만이 보였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류스는 왕뢰이와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듯이 의식적으로 얼굴을 돌려 짐을 챙겨 객차의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콰당”하는 진동소리와 함께 열차가 완전히 멈추었다.
왕창은 플랫폼에서 아버지와 이모를 만났고, 온가족은 다정하게 서로 짐을 들고서 이야기를 나누며 여객들의 대오를 따라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왕창은 걸으면서 망망한 인파 속에서 류스의 그림자라도 찾을 듯이 몇 번이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류스는 차창 안에서 묵묵히 여객들의 대오 속으로 묻혀져 가는 왕창의 아리따운 모습을 눈으로 배웅하노라니, 갑자기 생각이 착잡해지고 뭔가 잃어버린 듯 허전하였다. 그는 갑자기 아내와 어린 아들이 두리번거리며 인파 속을 헤치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급히 짐을 들고 텅 비어버린 객차를 지나 내렸다.
“아빠!” 아들의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아버지의 품으로 달려와 안겼다.
류스는 아들을 안고 뽀뽀를 하였다. “아빠 보고싶었니?”
“그럼요!” 아들은 아빠의 얼굴에 힘을 주어 뽀뽀를 하고는 흥분한 듯이 소리쳤다. “아빠,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아빠를 봤어요!”
허웨이는 약간의 화장을 한 것이 분명했다. 진정으로 기뻐하는 것이 얼굴에 역력했다. 애정 어린 그윽한 눈길로 남편을 바라보며 토라진 듯이 말했다. “당신 어떻게 구식 군복을 입고서 단상에 올라 상을 받을 수 있어요? 꼭 맹한 시골사람 같았어요......맞아, 당신 그 양복은요?”
류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먼 곳을 바라보며 아무렇게나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렇고 그런 일이잖아. 쟈쟈, 아빠랑 집으로 가자.”
그는 아들을 머리 위로 들어 목덜미에 앉히고는 부자간에 웃으며 여객들과 함께 빠져나갔다.
허웨이는 이미 남편의 냉담함과 마음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녀는 더 이상 깊이 생각하지 않고, 뒤따라가 남편의 팔을 잡고 걸으며 그에게 말했다. “웨이웨이가 대학을 졸업해서 돌아왔어요. 몇 군데 회사에서 서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마지막으로 전자계기 계통에 배치되었어요.”
시 정부 청사 안은 사람들의 왕래로 긴장되고 바쁜 분위기였다.
학생 복장을 한 리우웨이는 경쾌하게 계단을 뛰어 올라가 시 인사국의 사무실로 들어서자 배속을 기다리는 일군의 대학 졸업생들과 각 단위의 인사 간부들이 마침 검은 뿔테 안경을 걸친 여자를 둘러싸고 왁자지껄 흥정을 하고 있는 모습만이 보였다.
류웨이는 틈을 비집고 앞쪽에 대고 소리쳤다. “자오 과장님! 저 왔습니다.”
안경을 쓴 그 여자가 류웨이를 보더니 따뜻하게 불렀다. “마침 잘 왔어요. 잠깐만 기다려요, 바로 전화 할 테니까! 당신들은 좀 기다리세요, 서둘지 마시고......여보세요, 라오타이(老泰)세요? 그 대학생 벌써 왔습니다! 맞습니다. 리우웨입니다!......빨리 오세요, 여기에 아직 한 무리나 남아 있습니다!”
류웨이가 답답해하는 문 밖의 복도에서 전해오는 다급하고 묵직한 발자국 소리를 따라서 키가 크고 뚱뚱한 중년 남자 한 명이 황망하게 사무실 안으로 뛰어들어와 큰 소리로 물었다. “류웨이 학생 왔습니까? 어느 분이 류웨이죠?”
자오 과장은 급히 류웨이를 그의 면전으로 떠밀며 소개하였다. “소란스럽기는? 이 사람이 아냐! 리우웨 학생, 이분은 시 표준계량국의 친(秦)국장이셔, 빨리 이분을 따라 가세요. 잘 됐어요!”
친 국장은 류웨이의 손을 잡고서 말했다. “갑시다, 내 사무실로 가자고. 갑시다!” 강제 징집하듯이 류웨이를 데리고 갔다.
친 국장은 류웨이를 데리고서 계단을 내려가 길고 긴 복도를 뚫고 넓고 소박한 국장 사무실에 도착하자 방문을 닫았다.
류웨이 문을 들어서자 마자 말했다. “친 국장님,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앉아요, 앉아보라고.” 두 사람은 사무용 책상을 마주하고 앉자 친 국장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류웨이 동지, 나는 당신의 기록자료를 뽑아서 시 인사국과 검토해봤소. 지금부터 당신은 벌써 정식으로 시 표준계량국의 일을 하도록 배치되었소. 이것은 인사국이 방금 서명한 전근 명령서인데, 봐요.”
류웨이는 전근 명령서를 보고도 아직 완전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가 전자계기국 계통의 신화 과학계기 공장으로 배치된 것 아닌가요? 전 어제 이미 국에 들러 신고까지 했는데요......”
친 국장은 큰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이런 일들은 개의치 말라고. 내가 직접 나서 전자국 책임자랑 협조를 구했지. 표준 계량 일의 중요성에 관해서는 자네는 명문대학 정밀계측 계기 전공의 수재라 내가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내친김에 한마디 더하겠는데, 우린 역시 동문이지! 20년 전에 내가 자네와 같은 학교에 같은 전공을 졸업했지......인재에 대한 우리의 성의를 표하기 위해서 국의 당 위원회는 자네를 위해서 파격적으로 두 가지 결정을 했지. 첫째, 국장 주재의 사무회의를 거쳐 자네를 시 표준 계량국 공업계량과 부과장에 임명하기로 결정했다네. 이것이 임명 서류야. 둘째, 자네에게 방 두 개가 딸린 집을 분배하기로 했지. 이것이 집 열쇠네. 별다른 뜻은 아니고 자네가 전체 시의 표준 계량 관리 업무를 위해 자신의 역량을 공헌하길 바래서네!”
일장연설은 류웨이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시원시원하였고, 그는 머뭇거리며 국장의 손에서 문건과 열쇠를 받았지만 얼굴에는 곤혹스런 불안감을 드러내면서 자조 섞인 말투로 말했다. “이건 제가 정말 과분한 대우를 받는 것 같은데.....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친 국장장님, 제가 정말 이렇게 중요합니까? 공도 없으니 보수도 받을 수 없쟎습니까?”
친 국장은 가볍게 그의 어깨를 치며 정중하게 말했다. “샤오 리우, 자네는 크게될 재목이야. 듣기로 자네는 산부인과 병원의 세탁실에서 만 3년을 버텼다고 하던데, 나는 바로 이런 패기에 근거해서 자네라면 큰일을 해낼 재목이라고 여겼지! 어떤가? 여자 친구가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가?”
류웨이는 씁쓸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하였다. “여자 친구요? 지금부터 찾죠! 뭣하면 국장님께서 하나 소개해주시죠?”
친 국장도 홀가분한 듯이 웃기 시작하였다. “진짜 없어? 문제없지, 내게 맡기게. 내 마누라의 별명이 ‘중매쟁이’야, 자네를 위해 아내감을 모으는 것은 손바닥 뒤집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지! 하하......”
웃고 있을 때 갑자기 비범하게 생긴 하얀 얼굴의 서생형의 책임자가 비서와 난처한 표정을 한 자오 과장을 데리고서 문을 밀치고 들어서서는 연거푸 욕을 해대며 말했다. “훌륭한 친선생! 당신 너무 지나친 것 아니요? 당신 부인이 인사국에 앉아서 당신 대신에 쓸만한 사람들 다 가로채고 쓰레기들이나 남겨놓고 말이야, 원님 덕에 나팔부는 겁니까? 류웨이 동지는 이미 우리 전자계량국 계통으로 배치되었고 우리는 지금 중임을 맡기려고 준비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당신이 중간에서 가로챘단 말이오! 부과장에, 방 두 개에 응접실 딸린 집에다, 또 마누라까지 얻어주겠다고......몽땅 사탕발림이야! 당신은 우리의 청년 세대를 어디로 끌고 가려는 거요? 응? 안되지! 당신 샤오리우를 순순히 내게 넘겨주시오. 이 친구는 우리가 제일 먼저 발견했는데, 뭘 믿고 당신에게 그저 보내겠소? 응? 샤오리우, 우리 갑시다!”
몸집이 우람한 친 국장은 웃음을 띤 얼굴로 두 손을 맞잡고 인사를 하며 “원 국장. 원 형. 노기를 가라앉히시지요. 화를 푸시라니까. 높은 자리에 있을 때 동창을 좀 지원해 주시오! 당신들 전자국은 재정도 넉넉하고 파워도 있잖소, 인재들도 득실득실하고, 실력도 단단한데, 하필이면 이렇게 빈약한 내 부서와 겨루어 사람을 독점하려 드시오? 내가 여기에서 일을 책임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결국 유능한 인재가 있어야 이 상황을 유지할 것 아니오? 원 국장, 지위가 높으며 조화도 크고, 큰 인물은 도량도 크다던데, 동창의 체면을 좀 봐주시오. 당신이 너그러이 봐주면 내가 넘어가는 것 아니겠소? 뭣하면 오늘 저녁에 내 거하게 한잔 사리다. 형수도 같이 오시도록 하시지요. 우리 친구지간에 매일처럼 얼굴 맞댄다고는 하지만 같이 모이기는 어렵잖소......”
류웨이는 한켠에서 조용히 웃고 있는데, 느닷없이 자오 과장이 남모르게 자신에게 손짓하면서,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미끄러지듯이 문을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친 국장의 부부와 자오 과장 그리고 비서가 웃어가며 중재하려고 하나, 원 국장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다 이 기회를 빌어 큰 거래를 하려고 들었다.
“됐습니다, 됐어요! 양식은 그만둡시다. 나 역시 그런 먹을 복이 있는 사람도 아니고. 당신들 계량국에서 신화과학계기공장의 3급 천칭 품질의 불합격한 일로 행정 벌금 2만 위앤을 요구한 것은 너무 지나친 것 아니요! 이건 설상가상이 아니겠소? 벌금에 조업정지까지라니, 전 공자의 수백 명의 직원더러 서북풍이나 마시라는 겁니까? 동창의 체면을 봐서라도 너그럽게 한번 봐주시지요.“
친 국장은 즉각 울상이 된 퉁퉁한 얼굴을 하고서는 소리쳤다. “아이고, 그걸 어떻게 그럴 수 있겠소. 이건 다른 일이잖소, 원 국장! 나라에서 방금 《표준계량법》을 반포했는데, 당신이 늘 우리 계량관리부문의 법집행을 위반하게 해선 안되잖소! 벌금이야 반드시 부과해야지요......”
원 국장은 하얀 얼굴을 정색하더니 “그렇다면 할 수 없지! 그렇다면 류웨이를 돌려주시지요. 우리 상부의 시당위원회 왕 서기 앞으로 따지러 가지 않으면 안되겠지요! 치아오 서기, 우리 갑시다!”
원 국장은 말을 마치자 고개를 돌려 가려고 하다 친 국장 부부에게 잡혔고, 친 국장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원 형, 원 형, 내 말을 끝까지 들어보시오, 우리 잘 논의 해 봅시다. 벌금이야 반드시 부과해야 하겠지만 벌금액수를 말인데, 우리 적당히 감면할 수는 있소이다. 노형이 만족할 만큼 말이오. 하하......”
친 국장의 웃음소리 가운데, 류웨이는 시정부 건물 문 앞의 계단을 뛰어 내려가 홀가분하게 손안의 집 열쇠를 던져버리고는 머리를 돌려 웅장한 건물을 바라보면서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정문 밖으로 나갔다......
햇볕이 힘차게 흐르는 강물의 수면에 내리쬐고 있다.
축축하고 두터운 안개가 차츰차츰 걷히면서 두 줄기의 큰 강이 산청을 끼고서 웅장한 티엔롱먼(天龍門) 포구 다리 아래에서 합쳐지는데, 거칠 것 없는 기세와 우렁찬 물소리는 산청의 장엄한 위용을 잘 드러내고 있다.
수많은 크고 작은 기선과 삼판선이 분주하게 드넓은 항로를 드나들고, 갈매기 떼들은 선미가 일으키는 하얀 포말을 뒤쫓고 있다. 고동소리가 길게 울고 모터소리가 진동한다. 강물을 거슬러 밧줄로 배를 끄는 인부들이 유장한 메김 소리를 지르자 스피커에서 때때로 선주들의 감칠맛 나는 해학적인 고성이 들려온다. 여러 종류의 소리가 뒤섞이고, 강의 양편으로 즐비하게 늘어 선 층집들이 암벽에 반사되어 뒤섞이자 강과 계곡 사이에서 거대한 메아리를 형성하였다.
낡은 선박건조공장은 강의 북쪽 언덕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여기사 꾸야훤(谷亞芬)은 기계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리는 선체 공장에서 걸어나와 공장내의 경사지고 패인 작은 길을 지나 공장의 사무실에 도착해서는 “조직과(組織科)”라는 나무 명패가 붙은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경을 쓴 조직과의 부과장 호우예밍(候也鳴)이 전화를 걸고 있어, 업무에 시달리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꾸야훤은 앉아서 조금 기다렸다.
“......그래요, 좋습니다! 예(葉) 주임에게 전해주시오, 시간에 맞춰 원고를 편집부로 건네도록 제가 보장하지요, 뵐 때 고견과 지도를 바라겠습니다......문제없습니다! 많이 도와 주십시오 미아오(繆) 선생님,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호우예밍은 살며시 전화를 내려놓고 머리를 돌리는데, 희고 긴 얼굴에 거북할 정도의 친근한 웃음을 띤 채 허물없는 말투로 꾸예훤에게 다가와 말했다. “아훤에게 미안하네, 오래 기다렸지......”
꾸야훤은 소파에서 일어나 물었다. “호우 과장님, 무슨 일로 절 찾으셨죠? 공장이 지금 무척 바쁜데요!”
호우예밍은 뜨거운 차를 한 잔 따르며 해해거리며 말했다. “서두를 것 없잖아 아훤! 평소에는 여기에 오기도 쉽지 않은데, 당신에게 해줄 좋은 말들이 많거든, 우리 천천히 얘기를 나누어 보자고, 천천히 말이야......”
꾸야훤은 그의 말을 자르고는 돌아서 가려고 했다. “급하지 않은 일이라면 시간 날 때 다시 말씀하시지요, 지금은 출근시간이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호우예밍은 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가지 말라니까, 아훤. 내가 당신을 오라고 한 것은 당연히 긴요한 일로 당신에게 알려주려는 거야. 앉아요, 앉지?”
꾸야훤은 하는 수 없이 성질을 죽이며 앉았다. “말씀하시지요.”
호우예밍은 거드름을 피듯이 꾸야훤의 앞을 몇 걸음 서성거리는데, 얼굴빛도 엄숙하게 말했다. “아훤, 잘 들어봐요 : 공장에서는 반복해서 검토를 거쳐 현임 선체 공장 대리 공장주임 리우얼 동지를 사퇴시키고, 공장지도부를 새로 조직하기로 결정했어; 나는 당 위원회에서 몇 차례 당신이 공장주임의 직무를 대신하고 직접 나서서 ‘조직구성’을 하도록 제의했지, 가능한 한 빨리 새 지도부의 명단을 제출했으면 해. 하지만 공장 지부의 서기는 당 위원회에서 직접 파견할 것이니까 리우얼도 잠시 새로운 지도부에는 들어갈 수 없어. 이것 역시 당 위원회의 양(楊) 서기의 의견이야, 나는 이미 도울 수 없게 되었어......”
“리우얼이 문제가 있어섭니까 아니면 직무에 부적합해섭니까?” 꾸야훤은 냉정하게 물었다.
“아, 이건 절대로 직무가 적합하냐 부적합하냐의 문제가 아니고, 또한 무슨 큰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도 없어. 그가 하는 일도 괜찮고, 사람도 총명하고, 심지어는 사람들에게 상당한 신망도 있는 편이라고 하겠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민주적인 선거로 대리 공장주임에 뽑힐 수 있겠어?......” 호우예밍은 알 듯 모를 듯한 손짓을 이리저리 가볍게 해대며, 방안에서 왔다갔다했다. 그가 꾸예훤의 앞을 지날 때면 코를 찌르는 저질 향수 냄새가 그녀로 하여금 급히 숨을 멈추게 해서 하마터면 숨을 쉴 수 없게 할 뻔했다.
“하지만 말이야, 사람에겐 결점이 있게 마련이잖아. 리우얼은 문화대혁명 기간에 행동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고 하던데. 군중 조직의 우두머리로 무장투쟁에도 참가했었다고 들었지 ; 비록 직접적인 무슨 혈채를 빚진 것이 없어, ‘삼종인(三種人)’은 아니라 해도 꼭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지......당연히 이것 역시 문제삼을 것은 못되지, 대수롭지 않은 것이야, 하하......” 조직과의 부과장은 또 의미심장하게 웃기 시작하였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를 제거하려는 거죠? 결국 무슨 말들이 있었겠죠?” 꾸야훤이 냉랭하게 물었다. 빙빙 돌릴 필요 없쟎습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하시지요!“
호우예밍은 멈춰 섰고, 실실거리는 작은 눈이 안경너머로 꾸야훤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녀는 바로 혐오스러운 듯 고개를 돌리고는 창 밖의 강 맞은편에 상하로 운행하고 있는 케이블카를 바라보았다.
“아훤, 난 이미 이혼했어, 그저께 오전에 처리한 수속이......” 호우예밍은 살그머니 다가와서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꾸야훤은 불에 덴 듯이 벌떡 몸을 일으키고는 씩씩거리며 그의 말을 잘랐다. “미안합니다! 공장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후우예밍은 멍청해졌다가 바로 곤혹스럽게 하하 웃더니 말했다. “아, 이 사람아, 뭘 그렇게 민감하게 그래, 우린 결국 이곳으로 같이 배치된 동창이잖아, 서로서로 교류하는 것도 안되냐고? 알았어, 알았다고, 일할 땐 이런 얘기는 그만두자고......” 그는 꾸야훤을 가볍게 당겨 소파에 앉혔고, 낯빛도 차츰 엄숙하게 하고는 그녀의 면전에 다가와 아주 성의 있는 태도로 말했다.
“야훤, 우리 공장의 지식분자들의 정책이 분명치 못해요, 당신처럼 이렇게 대학에서 조선 설계 전공을 한 기술자들이 오랜 시간 중용되고 발탁되지 못하고 있고, 생활측면도 관심이 부족해서야, 이 조직의 과장인 내가 아주 부끄럽구만. 정말이야, 아훤, 평소에 당신에게 내가 너무 소홀했어......”
꾸야훤은 눈은 창 밖을 바라보면서 흥하는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하지, ‘중용’이라는 것이 입당해서 관리가 되어 봉급을 더 받는 것만은 아니지, 이건 분명 간부의 ‘四化(혁명화, 청년화, 지식화, 전문화)’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야. 하지만 우리는 언제까지 대규모의 전문 기술자들을 한쪽에 버려 둘 수는 없지. 그리고 대학졸업장도 없고, 당원간부도 아니면서 밑도 구린 보통 노동자들이 계속 공장 안에서 가장 중요한 부서의 관리자의 위치에 남아 있잖아? 야훤, 세상은 변하기 마련이야, 지금은 우리 지식인들이 수직상승 할 시대야, 우리가 날개를 활짝 펼치고 날아서 두각을 드러낼 차례라고!”
“리우얼은 얻기 어려운 기업관리 인잽니다, 다만 대학 졸업장이 없어 당신들에게 이렇게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이지요. 관리자의 능력과 개인적인 소질을 논한다면 당신이나 나를 꺼내지 마세요, 내가 보기에도 전체 공장에서도 그의 경쟁 상대를 찾을 수 없어요! 양가라는 사람이 뭘 알죠? 아부아첨과 권모술수로 쥐꼬리만한 직책에 빌붙어 있는 주제에. 리우얼은 그 사람의 덕행을 경멸하다가 공격을 받아 괴롭힘을 당하고 있어요, 양가라는 사람은 정말 소인배라고요!” 꾸야훤은 조금도 가리지 않고 쏘아대었다.
호우예밍은 이상야릇하게 웃기 시작하였다. “야훤아, 뒤에서 아무렇게나 상사를 욕하는 건 자유주의를 더럽히는 거야! 난 알지 당신과 리우얼의 관계가 보통이 아니라는 거, 하지만 개인 감정을 일과 연계시키지 말라고! 우리는 문제를 대할 때 역시 전체적인 측면에서 출발해야겠지.”
“당신 그 말이 무슨 뜻이죠!? 그야말로 뻔뻔스럽군요! 당신에게 말해주지요, 당신이 누굴 자르고 싶으면 자르라고, 관료가 되고 싶은 사람은 되라지! 한마디하지, 나 꾸야훤 때려 치겠어!” 꾸야훤은 더 이상 호우 과장의 그 진부한 태도를 참을 수 없어 화를 내며 일어나 나가버렸다.
호우예밍은 따라 나오며 소리쳤다. “야훤! 야훤......”
꾸야훤은 빠른 걸음으로 공장 문 밖 높다란 돌계단을 뛰어내려가 강변 모래사장의 작은 길을 따라 선체 수리공장 1호 도크 쪽으로 걸어갔다.
싸늘한 강바람이 노기로 뜨거워진 그녀의 얼굴에 불어왔다. 그녀는 아예 붉은 목도리를 베끼고 옷깃을 열어 젖혀 찬바람을 목덜미 안쪽으로 스며들도록 하자 온몸이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끼자 머리도 점점 진정되어 갔다.
강물이 세차게 용솟음치며 동쪽으로 흘러가고, 맞은편 기슭 부근 선원들의 메김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데, 가슴을 뒤흔드는 사천지방 희극의 고음 같았다.
꾸야훤은 점점 발걸음을 늦추었고, 마음은 심란하였다.
한 무리의 갈매기들이 빙빙 돌며 울어대는데, 후미의 새들은 빠르게 나아가는 배의 터빈이 일으키는 물보라를 따라서 뒤쳐지지 않으려는 듯 따르고 있었다......
선체의 귀를 찢을 듯한 소음 속에서 꾸야훤은 방금 호우예밍과 나누었던 내용을 간략하게 리우얼에게 알려주었다.
리우얼은 얼굴에 그늘을 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다 낡버린 작업복 주머니에서 풀죽은 나물 같이 부드러워진 담배를 한 대 빼어 물고는 바람을 등지고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고는 사납게 두어 모금 빨자 담배가 순식간에 반으로 줄어들었다.
꾸야훤은 묵묵히 리우얼의 그런 강인하면서도 잘생긴 얼굴을 바라보자니, 좌절과 실패에 에워싸여 피를 흘리는 그런 남자의 마음을 가슴아프게 쓰다듬고 있는 것 같았다......
숙직을 하는 한 직원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와서 공장 조직과의 호우 과장이 전화로 부른다고 리우얼에게 알려주었다. 리우얼은 꾸야훤을 한 번 쳐다보고는 묵묵히 담배를 비벼 끄고는 한마디도 없이 조선대를 빠져나갔다.
꾸야훤은 그의 뒷모습을 보고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호우예밍은 친절하게 리우얼을 자신의 사무실로 맞이하고는 사무실 문을 닫았다. 담배를 권하며 차를 따르고, 또 사무책상의 뒤편에 있는 의무실용의 철제 회전의자를 벗어나 손님과 평등하게 낡은 소파에 함께 앉았다. 두 사람이 평소 관계가 가까우면서도 미묘하여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리우얼은 말을 하지 않고 다만 호우예밍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호우예밍 역시 더 이상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솔직하게 리우얼에게 일련의 불행한 소식을 말했다. “이보게, 자네 운이 아주 안 좋아! 요 반년 넘게 나는 자네를 위해서 그렇게 많은 기초를 다졌지만 위에서 부는 바람이 나를 힘없이 날려버리는 구만. 모르긴 해도 야훤이 이미 자네에게 다 말했을 거야? 전부 나쁜 소식이라지만 나 역시 자네를 속일 순 없잖아? 자네는 마음속으로 준비를 해야 할거야, 억지로라도 감당해야겠지! 첫째, 최근에 중앙과 성시(省市)의 유관부문에서 ‘노동자의 간부전환(工轉幹)’의 문제에 대하여 일련의 문건을 발송해 왔다네. 문건의 내용에 근거해서 공장은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네. 1980년 6월 이후부터 ’노동자로써 간부를 대신(以工代幹)‘하기 시작한 사람은 다음 달의 ’노동자의 간부전환‘ 시험의 자격을 전부 취소하고, 이번은 잠시 간부전환은 하지 않기로 했다네. 이보게, 자네가 제일 먼저 그 희생양이 되는 거라고! 둘째, 지식인 정책을 확실히 하기 위해서 최근 공장에서 각 부서의 관리자들을 조정하기로 결정했네, 중점은 바로 자네들의 선체 부서야. 꾸야훤 동지를 부서의 주임 겸 조선소 부 총기사로 고려하고 있네. 난 정말 자네에게 냉정하게 말못하겠네. 이번 충격은 자네에게 너무 커! 나는 가까스로 자네에게 편견이 아주 많은 양 서기와 협의를 해보았네. 부서의 지부 역시 몇 차례 보고를 했다네. 조직과는 이미 금주 내로 바로 입당지원서를 자네에게 발송하기로 결정했었지. 그런데 방금 양서기가 전화로 발표를 잠시 보류하라고 명령했네. 왜냐하면 자네는 곧장 부서로 돌아가 일반 노동자로 복귀해야 한다나. 상부에서는 기업은 노동자들 가운데 신 당원 성분 중의 비율을 통제하고 우선적으로 지식인들을 고려하라고 요구하고 있네......”
리우얼은 들으면서 차가운 웃음을 지었다.
“자네 잘 보라고! 상황은 급전직하로 전부 악화되었어. 나의 치밀한 계획은 모조리 엉망이 되어버렸다고. 나는 원래 자네의 입당과 간부전환 문제를 매듭지은 후에 곧장 자네를 시 위원회 당 학교의 당정간부 전문반에 보내 2년을 수료하게 해서 어쨌건 전문대 졸업장을 가져오면 역시 정상궤도에 올려놓게 되는데......하지만 지금 어떻게 하지? 정책이나 규정은 어쩔 수 없으니 말이야. 나 호우예밍이 용뺄 재주가 있다고 해도 사태를 진정시키고 원상태로 돌리기는 어려울 거야!” 호우예밍은 웃는 둥 마는 둥 리우얼을 바라보았다.
리우얼은 소파에 똑바로 기대어 묵묵히 담배만 심하게 피워댔다. 손가락은 무의식적으로 소파의 손잡이를 가볍게 두드렸고, 눈은 맞은편 벽에 영화배우 달력의 미녀의 머리를 응시하였다. 흡사 마음을 동요시킬만한 옛일을 생각하는 듯 하다가 갑자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멀리서 단조롭고도 공허한 증기 해머 소리가 들려와 귓전을 때렸다.
사무실 안은 고요하여 시간이 멈추어 버린 것 같았다.
“샤오리우, 리우얼! 이봐, 왜 그래? 정신차리라고, 낙담하는 거야?” 호우예밍은 가볍게 리우얼을 밀어 그를 꿈꾸는 듯한 깊은 생각의 늪에서 현실 속의 사무실로 끌어 당겼다.
이 순간 리우얼은 벌써 길고도 긴 고통의 심리적인 역정을 넘어 모든 것을 다 이해하였다. 그는 피식 웃으며 내렸던 눈꺼풀을 치켜들자 갑자기 정신이 들어 몸을 똑바로 하고 주머니에서 담배 한 갑을 꺼내었다----당시에는 고급의 수입제 필터 담배 “555”였다. 그는 담배를 호우예밍에게 한 대 권하고 자신도 한 대 붙이고는 달콤한 듯 몇 모금을 피웠다.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물었다. “오늘 오후에 간부회를 열지 않습니까?”
호우예밍은 머리를 저으며 천천히 회전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리우얼은 꽁초를 비벼 끄고는 침착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호우 과장님, 부서에서는 방금 상여금을 지급했습니다. 저는 백 위앤을 수령했는데, 오늘 오후에 한턱내지요! ‘훼이시앤로우(會仙樓)’ 어때요? 새로 나온 유명한 요리 ‘랑리바이티아오(浪里白條)’가 일품이라고 하던데, 우리 꾸 기사도 초대해서 통쾌하게 시식해봅시다.”
“이 사람아, 안되네.” 호우예밍은 실질적인 대화로 들어 갈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느끼고는 전혀 표정의 변화 없이 리우얼이 보내온 신호를 받아들였다. “오늘 저녁에 시 과학위원회에 가서 인사이동과 관련된 일에 활동 좀 해야 한다네. 바로 결정적 순간이거든. 이 빌어먹을 곳은 쓸만한 사람을 짓누르니 배운들 무슨 소용이야, 애매하게 사람을 숨도 못 쉬게 하니 말이야! 자네도 손을 좀 써 볼 생각 좀 하라고. 산사람이 오줌이 막혀 숨을 죽을 순 없잖아? 응......”
호우예밍은 후련한 듯이 회전의자를 흔들며 웃었다. “자네 자형이 도와주지 않는다던가? 나는 맨 얼굴로 못을 들이받지는 않을 걸세! 다른 연구소에서 최신 외국어 과학기술 자료 두 편을 내게 보내와서는 나보고 ‘중국 과학기술 정보의 연구 전망’에 대해 논문을 한 편 써 보라고 했네. 내 이 늙은 대학생의 수준을 시험해 보고 싶은데, 나는 지금껏 바빠서 한 자도 쓰지 못했네. 에이! 어려워! 외국어를 이렇게 오랫동안 던져버렸다가 한 순간에 써먹을 수 있을까? 이런 ‘출세수단’이 없으면 《과학기술정보연구》잡지의 부주편(副主編) 자리를 눈으로 보고도 할 수 없고, 이 허름한 공장에 쭈그리고 배우고도 소용없는 짓을 계속할 수밖에......아, 자네 자형의 요즘 건강은 괜찮은가? 나는 그와 대학에서 꼭 2년을 같이 배웠지, 관계도 괜찮았거든.”
적나라한 암시는 이미 말을 더 이상 이해할 수 없도록 하였다.
“뭐라고요? 자형이 전화를 했다고요?” 리우얼은 거짓말이라 해도 얼굴색도 안 변하고 가슴도 뛰지 않았다. 생활이 그를 똑같이 훌륭한 배우로 단련시켜서 자연스럽고 실감나게 연기하면 조금도 연극하는 흔적도 없었다. 그는 놀란 모양을 하고는 호우예밍을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자형이 오래 전에 번역자료와 논문을 도와줄 것이라고 대답했으니까 얼른 자료를 자형에게 보내죠. 문제없습니다!”
“그런가?” 호우예밍도 거만하게 웃으며 리우얼을 흘낏 쳐다보았다. “어? 나는 어째 그의 전화를 받지 못했지?”
“아마 통화가 되지 않았겠지요? 알았어요. 자료를 내가 가지고 돌아가죠. 길어야 일주일이면 내가 번역된 원고와 논문을 가져올 테니 과장님은 과학기술 정보연구소로 가져가 넘기면 그만이죠. 안심하세요. 자형은 누나에게도 알리지 않았거든요. 이름 없는 영웅들의 습관이야 누군들 알 수 있겠습니까......”
“그야 좋지, 좋고말고! 그럼......모든 걸 자네 자형에게 부탁하겠네. 부탁하네! 부탁해!” 호우예밍은 얼른 서랍에서 한 뭉치의 자료를 꺼내서는 책상을 돌아 나와 리우얼에게 주었다.
리우얼은 마치 접촉해서는 안될 사람의 지폐를 받듯이 자료를 받아 품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오후 여섯시에 저는 꾸 기사와 함께 ‘훼이씨앤로우’ 이층에서 방을 빌려 오시기만을 기다릴까요?”
“천만에 아닐세. 당연히 내가 꾸 기사와 함께 자네를 기다리도록 하지. 잘됐어, 다 잘됐다고! 하하......” 호우예밍은 큰 소리로 농담을 하였다.
한차례의 거래가 담소아래 순리적으로 이루어졌다.
공장주임을 대신하여 배웅할 때 조직과의 호우 과장은 다정하게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낮게 말했다.
“안심하게, 아우님, 다 내게 맡기라고. 정책이야 죽은 것이지만 사람은 살아있는 것 아닌가! 정책을 책임질 사람에게 완전히 맡겨야 잽싸게 처리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치상으로 도 자네는 지난번에 공장에서 기계수리부로 옮겨져 작업을 도울 그 때에도 부서 안의 지도적인 일이었고, 발령통지 역시 공장 조직과가 서명하여 발송한 것으로, ‘노동자를 간부로 대신’한 셈이라 할 수 있겠지, 그게 바로 1980년 6월 이전의 일 아니었던가 말일세. 내가 또 양 서기에게 일을 잘해주고 나면 나와의 관계도 보통이 아닐테니 ‘노동자를 간부로 전환’한다는 학력시험에 어쨌든 자네가 참가하게 되는 것이지. 고등학교 국어시험이야 아주 쉽다고. 자네 같은 노련한 고등학교 3년 졸업생들이야 식은 죽 먹기야. 간부로의 전환 수속이 끝내고 나서 바로 조직의 문제를 해결하고 이어서 지도자 임무를 맡는 것도 완전히 가능한 것이지. 허! 나는 자네가 공장장이 되는 것도 문제없고, 장래도 창창하다고 생각한다네. 성이 양이라는 그 양반 무슨 장난이람? (..............)수준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자네와 나 누구도 반 문맹이다시피 한 그 촌놈 밑에 있겠냐고? 자네를 보자고, 대규모의 홍위병을 지휘한 적 있잖아, 그게 얼마나 패기로운가 말이야! 지금 양씨가 작은 신발을 억지로 신고 있듯이 쥐꼬리만한 자리에 앉아 있으니 정말이지 호랑이도 평지에서는 개한테 물리고, 용도 얕은 물에서 놀면 새우가 놀린다더니 말이야. 이 무슨 세상이야!......하지만 자네는 정말로 진지하게 전문대학의 졸업장을 받을 방법을 생각해야 하네! 무슨 방송대학, 야간대학, 직업대학, 통신대학이건 간에 그것이 어떤 졸업장이든, 무슨 전공이든 이후로 큰 일을 하게 되면 모두 그놈의 종이 한 장에 기대야 할걸세. 자네는 과거에 그것을 너무 얕본거야. 하하......안나가겠네!”
호우예밍은 그의 어깨를 두드리고 나서 웃으며 사무실로 돌아갔다.
류얼은 천천히 사무동을 걸어 나오며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는 무겁게 내쉬었다. 그는 갑자기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껴 바로 상처 입은 이리처럼 머리카락을 감싸 쥐고 한마디 괴성과 함께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때 사무동 계단 앞을 지나던 꾸야훤이 이 모습을 발견하고는 황급히 달려와서 류얼의 어깨를 부축하며,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다급하게 물었다. “왜 그러세요? 샤오류! 어디가 불편하세요? 빨리 말해보세요......”
류우얼은 어깨를 귀찮은 듯 흔들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얼굴색은 바로 냉혹하면서 평정하게 회복되었다. 벌겋게 충혈 된 눈으로 차갑게 꾸야훤 기사를 바라보는데, 그 눈빛은 낯설면서도 싸늘했다. 이어서 술에 취한 사내처럼 묵직한 몸을 건들거리다 휘청거리는 모습으로 공장 쪽을 향해 걸어갔다.
꾸야훤은 이 굽힐 줄 모르는 남자의 휘청거리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갑자기 눈가가 붉어졌다. 그녀는 이미 이 과묵한 보통 노동자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의식하였다.
사대 도서관의 유리문은 굳게 닫힌 채 문 위에 “오후에 정치학습 관계로 폐문하오니 양해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나무 팻말이 걸려 있었다.
넓고 밝은 열람실 홀에서 관장은 한창 전관의 종사자들을 소집하여 학습 회의를 열고 있었다. 관장은 서생티가 몸에 밴 지식인으로 말끝마다 난해한 문자를 쏟아내고, 논리가 정연한 그야말로 “인쇄체”로 가득했지만 유머를 잃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과 상의할 일이 하나 있습니다.” 관장은 얇은 16절판 소책자를 들고 모두에게 말하였다. “《털실 편직--외국 스웨트 스타일 100종 첨부》라는 이 소책자를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전임 책임자가 우리에게 남겨놓은 ‘귀중한 재산’으로 우리 모두를 곤경에 빠뜨려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몇 해 전 장기간 사상적 속박을 거쳤던 중국 인민들이 막 물질적 생활 향수의 추구를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털실 양식의 편직물이 아주 유행할 무렵에 당시의 노관장님께서 한 때 영감이 떠올랐던지 학교측에 20만 인민폐를 대출하여 단번에 백만 부를 찍었고, 사회의 각계로 도매할 루트를 통해 판매하여 좌우간 10만 원을 벌여들여 대량의 도서자료를 구입하고 경비부족의 어려움을 보충하려고 했습니다. 순전히 도서관을 건설하겠다는 노관장님의 일념에서 나온 것이라고 해야겠지요. 경제적 사고능력도 있어서 당시 학교 책임자와 사람들의 일치된 지지를 얻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삶이란 이렇게 예측할 수도 없으니 말입니다. 한 때를 풍미했던 이런 도서가 대량으로 인쇄되어 나와 도서관 창고에 들어찰 무렵에 사회적으로 이미 학문의 길에 들어서기를 원하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생활이 변화하고 목표가 수정되는 속도를 아마 그들 자신조차도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대량의 편직물 스웨터와 각양각색의 고급 순양모 스웨터가 하룻밤 새에 시장으로 다 몰려드는 것 같은데, 누가 시간이 남아돌아 한가롭게 뜨개질이나 배우고 있겠습니까? 엄청난 노력을 들였어도 2만 부를 팔지 못했고, 노관장님도 기쁘게 퇴직하고 말았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 흘렀건만 은행에서 대출한 20만원의 자금은 여전히 창고 안에서 짓눌린 채 회전도 상환도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은행은 날마다 부채상환을 독촉하고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데다 사람들의 비난 역시 커지고 있지만 누가 아무도 원치 않는 도서 백만 부를 단숨에 팔아치우겠습니까? 막다른 골목에 처하여 우리는 학교 책임자에게 지시를 물어 어쩔 수없이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서관 직원들이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책임자의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방치해 둔 물자를 맡아 소매로 팔기 바랍니다. 본 도서관은 20만원의 원가비용만을 회수하기를 바랄 뿐 더 많은 매상은 모두 개인의 소득으로 돌릴 것입니다. 약간 자극적이긴 하지만, 여러분! 한 권을 팔면 15전을 벌 수 있는데 만 권을 팔 경우 1,500원이 되니 20인치 컬러 텔레비전 한 대를 살 수 있습니다. 쉽지 않은 기횝니다!.......”
직원들의 의론이 분분하자 큰 로비 안이 웅웅거렸다.
류우뿌는 관장 손안의 작은 책자를 들여다보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관장은 반향이 있는 것을 보자 자신감이 들어 소책자를 흔들며 더욱 열성적으로 선전하였다. “어떻습니까? 여러분, 도서관 안에서 한 말은 유효합니다. 판매를 원하는 분은 바로 여기에서 저와 판매책임계약서에 서명할 수 있습니다. 만 권 이상을 판매하신 분에게는 또 다른 보너스가 있을 것이고, 공헌이 큰 분에게는 이후의 승급과 분방(집 분배) 시 우선적으로 고려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들은 모두 지식인들이고 청렴한 것에 습관이 되어있어 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암거래 같은 장사를 하는 것은 타락한 느낌이 들 수 있을 수 있겠으나 우리들의 묵은 관념도 바꾸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설마 우리 같은 지식인들이라고 돈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한평생 초라한 생활이 달가울까요? 어쨌든 이 돈은 우리가 노동으로 벌어들이는 합법적인 수입이겠지요! 이렇게 합시다. 제가 먼저 앞장서서 만 권을 맡아 온 가족을 총 동원해서라도 일년 안에 맡은 바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누가 뒤를 잇겠습니까? 이 시간이 지나면 더 이상 기회는 없습니다!”
지식인들은 해보고 싶어 안달이 나서 서로 웅성거리며 회의장이 시끌벅적하도록 떠들어댔지만 등록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류우뿌는 일어나 차분하게 관장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제가 등록하죠. 4만 권을 맡아 3년 안에 완수하도록 하겠어요.”
회의장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갖가지의 복잡한 눈길로 옷차림이 수수하고 안색이 평온해 보이는 류우뿌를 바라보았다. 잠깐동안의 정적이 흐른 후에 관장이 앞장서 류우뿌를 향해 박수를 치며 환영을 표하자 회의장 안은 드문드문 박수소리와 웅성대는 소리로 울렸다.
류우뿌는 동료들의 눈길이 지켜보는 가운데 관장 앞으로 걸어가 판매계약서에 정중하게 자신의 이름을 서명하였다.
토요일 저녁 밤의 장막이 드리우자 산청(충칭)은 등불로 가득 찼다.
류우스의 집은 좁지만 정갈한 응접실 겸 식당의 식탁 중앙에 생일케잌과 냉채가 담긴 접시가 놓여있다. 유치원에서 돌아 온 쟈쟈가 식탁 위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고, 주방 저 편에서는 허웨이의 말소리와 후라이팬에 요리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14인치 컬러텔레비전에서는 뉴스를 내보내고 있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 아나운서 왕창의 친근하면서도 달콤한 목소리가 작은 방안에 흐른다.
허리에 작은 앞치마를 맨 허웨이는 따끈따끈한 볶음 요리를 들고와서는 몸을 숙여 아들의 그림을 들여다보며 머리를 쓰다듬는다.
쟈쟈는 못 참겠다는 듯이 묻는다. “엄마, 아빠는 어떻게 아직 안 오시는 거야? 배고파 먹고싶단 말야.”
허웨이는 위로하듯이 말한다. “쟈쟈, 착하지, 우리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아빠가 일이 바쁘셔서 자신의 생일도 잊어버리고 계시는구나......쟈쟈, 아빠가 돌아오시면 뭐라고 할래? 잊었니?”
쟈쟈가 부연하듯이 말한다. “아빠 생일 축하해요라고 할거야!”
“착한 아들! 자, 그림 그려야지, 응? 텔레비전 볼래? 봐, 이모야 예쁘지 그렇지?”
“엄마가 제일 예뻐!” 쟈쟈는 애늙은이처럼 말하였다.
“엄마는 늙었단다.” 허웨이는 웃으며 주방으로 돌아 갔다.
화면에 소탈한 류우스의 모습이 나타났다.
허웨이는 주방에서 요리를 하다 갑자기 흥분한 듯 날카롭게 부르는 아들의 소리를 듣는다. “엄마! 빨리 와봐, 아빠가 텔레비전에 나왔어!”
허웨이는 황급히 응접실로 나와 보니 정말로 여자 아나운서가 류우스를 현장 인터뷰하는 장면이 보였고, 자신도 모르게 꼼짝 않고 주시하였다.
여자 아나운서 왕창은 의욕이 넘치듯이 소개하며 말한다. “시청자 여러분! 우리 시의 청년 작가 류우스 동지가 자신이 획득한 중편소설 《내 마음 어디로 가나》에 근거해서 개편 창작하고, 어메이 영화제작소가 촬영한 극영화 《내 마음 어디로 가나》가 곧 전국적으로 방영될 것입니다. 류우스 동지는 전국에 이름이 알려진 유명한 작가로서 그의 작품은 몇 년 새 사회적으로 강렬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특히 폭넓은 청년독자들의 사랑과 환영을 받았고 어떤 작품은 이미 국외에까지 소개되었습니다. 최근에 《내 마음 어디로 가나》가 또 전국 우수 중편소설 상을 획득하였고, 동명의 영화가 시사회를 가졌을 때 관련 전문가들의 극찬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방송국의 기자가 류우스 동지를 독점 취재하게 되었습니다......”
모자 두 사람은 정신을 집중해서 화면 속의 가족을 바라보았다.
류우스는 마이크와 카메라를 향해 당당하게 말하였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류우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상으로 여러분과 만날 기회가 있어 무척 기쁩니다. 저는 여러분의 영원한 친구가 되기를 바랍니다. 제가 문학 창작에 있어 약간의 작디작은 성과를 거둔 것은 먼저 진심으로 생활에 감사해야 합니다. 생활이 저의 인생의 체험과 창작의 영감을 주었고, 생활이 저에게 견실한 인생의 신념과 완강한 투쟁정신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다음으로 저는 저의 사랑하는 류우뿌 누님에게 충심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누님은 고생을 참고 견디며 우리 뿌얼스웨이커 형제를 키워주셨고, 우리 형제가 어떻게 삶의 의미를 추구해 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허웨이는 남편의 진정어린 고백에 감동되어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엄마, 누님이 누구야?” 쟈쟈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물었다.
“바로 너의 고모지.” 허웨이는 아들을 어루만지며 조용히 말했다.
이즈음 청년작가 류우스와 여자 아나운서 왕창은 산청호텔 9층 레스토랑의 하얀 식탁보가 덮인 테이블 가에 앉아 진귀한 프랑스산 붉은 포도주를 여유롭게 음미하면서 바닥까지 닿는 유리창의 바깥쪽으로 산청의 휘황한 등불이 빛나는 장관을 내려다보이는 가운데 연인처럼 애정어린 눈길을 주고받으며 즐겁게 저녁식사를 하고 있다.
부드러운 등불 아래 우아한 유럽의 클래식 음악이 휘감는 가운데 예의 바른 웨이터가 가격이 비싼 데다 섬세하게 요리한 음식을 하나하나 식탁에 올려놓는다. 식탁에 둘러앉은 몇몇 귀한 손님(대부분 외국인)들이 부드럽게 낮은 소리로 담소하며 훌륭한 요리를 즐기고 있다. 왁자지껄한 소리도 없고 귓속말로 속삭이는 소리도 없다. 나이프와 포크 소리가 가볍게 부딪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릴 뿐이고, 양복에 구두, 짙은 화장에 실크치마, 예의바르고 미소 띤 얼굴,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모습, 범속함을 벗어난 듯한 풍격만이 보일 뿐이었다......
마쓰네의 《명상곡》이 흐른다. 남자들은 잇달아 자리에서 일어나 신사처럼 아름다운 여성을 청해 춤을 춘다.
류우스는 왕창의 가녀린 허리를 가볍게 감싸안고 경쾌하게 춤을 춘다. 그들은 연인의 사로잡을 듯한 눈길로 소리 없이 마음 깊은 곳의 애정을 전한다.
어느새 왕창의 부드럽고 윤기 흐르는 팔은 류우스의 목을 가볍게 감고, 꽃사슴 같은 작은 머리를 그의 넓고 따뜻한 가슴에 기대고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래서 류우스는 부드러운 아기를 안은 양 조심스럽게 소녀를 껴안았고 점점 경험해 보지 못했던 기묘한 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고요한 밤하늘에 어렴풋이 기차의 기적소리가 길게 울린다.
밤도 깊고 인적도 고요하다. 빌딩 숲 속의 조명들도 이미 다 꺼지고 정적만이 남았다.
마르고 키가 큰 한 군인의 뒷모습이 뿌얼스웨커 형제의 집 앞에 나타났다. 그는 간단한 짐을 메고서 어둠을 더듬으며 썩은 나무 계단을 가볍게 밟고 올라 작은 옥탑방 문을 두드렸다.
누나 류우뿌는 집안에서 묻는다. “누구세요?”
손님은 가볍게 또 문을 두드렸다. 잘 알고 있는 암호처럼.
불이 켜진다.
곧바로 부스럭부스럭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고 걷는 소리가 나더니 류우뿌는 겉옷을 걸치고 안쪽 문을 열고서 불빛을 따라 문밖의 불청객을 살피며 주저하듯이 묻는다. “누굴 찾으세요?”
마르고 키가 큰 군인은 잠시 멈칫하더니 모호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불렀다. “누님......”
“미커?! .......” 류우뿌는 순간 어안이 벙벙하여 무의식적으로 군인의 손을 꽉 잡았다.
그랬다. 문밖에 서있는 마른 몸에 키가 큰 군인이 바로 흉터로 가득한 얼굴에, 눈빛이 침울한, 죽었다 되살아난 막내 동생 미커였던 것이다.
이른 새벽 동틀 무렵이 되었다. 어둠침침한 밤의 장막이 소리 없이 조용히 물러갈 즈음 짙고 두터운 안개가 곧 다가올 여명을 짓누르고 있다. 가을의 한기는 찬비를 품고, 가까이 있는 듯 멀리 있는 듯 있는 듯 없는 듯이 아득한 가랑비가 조용히 안개 자욱한 가로등 그림자 속에 흩날리고, 갈수록 어지러이 구분할 수는 없어도 사물을 소리 없이 윤택하게 한다. 강의 수면 위로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간혹 한 두 차례씩 아침 출근반 기선의 긴 기적소리가 아득하게 전해온다. 거인 같이 깊이 잠든 이 산청은 미약한 새벽 햇살 속에 조금씩 희미하면서 거대한 윤곽을 드러내며 천천히 깨어나고 있다......
차갑고 고요한 큰길에 첫 전차가 지나갈 때 덜컹거리는 나지막한 소리와 짧게 울리는 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기 시작한다. 옥탑방의 작은 창문 아래 골목 깊은 곳에도 점점 먹거리를 파는 상인들의 친근하게 와 닿는 호객소리에다 일찍 길을 나선 사람들의 둔탁한 발걸음 소리와 크게 울리는 기침소리가 뒤섞여 들려온다.......
궈궈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키고는 머리를 옆으로 기울인 채 잠시 멍하니 있다가 곧 소리를 죽이며 옷을 입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그는 전등을 켜고 싶지 않았다. 낡아빠진 이 작은 옥탑방에 누워 있는 또 다른 주인인 막내 외삼촌 미커가 놀라 깰까봐서였다. 그는 부스럭부스럭 색깔이 선명한 나일론 파카를 입고 어제 저녁에 벌써 광이 나도록 닦아 놓은 검은 구두를 맞춰 신었다. 바닥에 가볍게 밟아보고는 베개 밑을 더듬어 학생전자 손목시계를 찾아내어 차고 가방을 들고는 고양이처럼 조용히 미끄러지듯 문을 나갔다. 의외로 미커도 깨어있었다----아마도 줄곧 깨어있었고 줄곧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생각에 잠겨있었던 것 같았다.
어둠 한 구석의 작은 침대 위에서 목이 쉰 듯한 나지막한 소리가 났다. “응, 깼어?......”
“예......” 궈궈는 모호하게 대답하였다. “미 외삼촌, 아직 일찍 하니까 더 주무세요” 조용히 빠져나가며 방문을 닫았다.
“차악!” 미커는 라이터를 켜 담배에 불을 붙였고 담배 끝은 빨갛게 어둠 속에서 밝아졌다 사라졌다 한다. 그는 어린 외조카가 삐거덕거리는 썩은 나무 계단을 조용히 내려가는 발걸음 소리를 듣는다. 맞은편 벽에 자신이 검은 천이 걸쳐진 영정 사진을 바라보며 말없이 상념에 잠긴다. 담배를 비벼 끄고는 베개 주변을 더듬어 아끼는 하모니카를 찾아내 살며시 입에 물었다.
《산사나무》의 우아한 선율이 퍼지기 시작하자 어두운 옥탑방 안에 점점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고독하면서도 화려한 하모니카 소리는 흡사 마음 속 깊이 새겨놓은 연민의 정을 토로하는 것 같았다.......
계단 모서리에 있는 주방에서 아침을 준비하고 있던 류우뿌는 이 귀에 익은 하모니카 소리를 듣는 순간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눈물이 샘물처럼 솟았다.
하모니카 소리가 유유히 창문 밖으로 흘러나가자 길을 가던 행인들도 멈춰서 귀를 기울였고 고개 들어 선율이 흘러나오는 방향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환해지자 짙은 안개도 걷히고 시끄러운 소리의 물결도 점점 높아졌다. 산청을 내려다보자니 열려진 거대한 찜통의 뚜껑에서처럼 삶의 뜨거운 물결이 얼굴에 불어와 늦가을의 한기를 걷어내는 듯 하였다. 개미처럼 밀집한 사람들이 가지가지의 “동굴”에서 기어 나와 좁고 빽빽한 길가로 모여들자 삽시간에 전 세계의 사람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드는 것 같았다......
난산(南山) 풍치지구의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새까만 인파가 희미하게 보이자 궈궈의 마음은 갑자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였다.
순간적으로 분명 자신을 발견했지만 오히려 나무인형 식의 빠른 동작으로 재빨리 몸을 돌려 가는 그 여자아이의 뒷모습을 보았다. 궈궈는 마음 속으로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우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는 꿈속을 헤매는 듯 책가방을 둘러 맨 그 여자아이에게로 달려갔다.
“얘, 왔구나!”
말이 나가자 어째 목소리가 이상하였다. 궈궈 자신도 깜짝 놀랐다. 그 여자아이도 크게 놀라 감전된 듯이 몸을 획 돌렸고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당황스럽게 궈궈를 훑어본 뒤 신경질적으로 잽싸게 얼굴을 돌려 어지러이 웅성대는 인파를 바라보며 두서 없이 말하였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오늘 좀 추운데......”
“그래. 나 아침밥을 먹지 못했는데......” 궈궈도 추위를 느꼈다.
“그만둬! 난 가고싶지 않아...... 뤄 선생님이 틀림없이 우리 엄마에게 말씀하실 거야, 난 아직 결석해본 적이 없단 말야! ......” 여자아이는 말을 하며 눈물을 글썽이고 이유 없이 손으로 옷자락을 꼬아대기도 하였다.
“나도 결석해본 적 없어......” 궈궈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범죄자의 느낌”을 품고 있는 두 중학생은 떠들며 북적이는 인파 속에 말뚝처럼 멍하니 서서 많은 사람들이 주시하는 가운데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긴장하였다. 다행히도 이때 디젤시내버스가 미친 듯이 소리내며 주차장을 떠나더니 곧장 새까만 인파를 향해 돌진하였다. 사람들도 미친 듯이 차를 향해 용감하게 돌진하였다.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며 차 문에 매달리고 창문으로 기어올라 위험한 진지로 돌진하는 등 필사적이었다. 멍하니 섰던 두 중학생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인파에 휩쓸려 차안으로 밀려들어갔고, 차는 힘겹게 차 문을 닫고는 교외로 씽씽 달렸다.
태양은 옅은 안개 속에서 창백한 듯한 얼굴을 내밀었다. 디젤 시내버스는 심하게 헐떡이며 구불구불한 판산(盤山) 고속도로를 따라 산꼭대기를 향에 기어오른다. 소형차들이 한 대 한 대씩 전혀 힘들이지 않고 대형버스를 뒤로 따돌리며 경쾌하게 지나친다.
궈궈와 여자아이는 승객들에게 떠밀려 거의 얼굴을 마주하고 가슴이 서로 닿을 정도로 가까워지자 두 사람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그들은 긴장되고 흥분된 듯이 눈은 맹목적으로 어지러이 사방을 둘러보다 상대방의 눈과 마주치기도 하였다.
밀리고 흔들이는 가운데 궈궈는 살며시 여자아이의 손을 잡았다.
두 손은 머뭇거리더니 곧 함께 맞잡았다.
궈궈는 마음이 두근거려 살며시 여자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소녀의 마음은 가을날의 구름 같아졌지만 궈궈를 보지 않고 마치 불쾌한 듯 얼굴을 돌려 창 밖을 내다본다.
궈궈의 손이 살며시 느슨해지자 소녀에 의해 다시 잡혔다.
차가 산등성이의 평평한 도로에 이르자 속력을 내기 시작하였다.
높다란 탑 모양의 구름이 아득히 바라다 보이는데 구름 속의 선녀 같았다.
십여 년 전 류우스와 샤린의 첫사랑이 재현된 듯 첫 데이트를 하는 두 아이는 흥분된 듯이 손을 잡고서 산 속의 꽃 무덤과 나무 그늘 사이를 웃으며 내달렸다. 그들은 산꼭대기에 올라 뛸 듯이 환호하며 구름의 바다가 뒤덮고 있는 산청(山城)을 아득히 바라본다. 손을 잡고 탑신 안의 좁고 가파른 돌계단을 구불구불 올라 탑 꼭대기의 창문에 서서 온 세상을 내려다본다. 얌전하고 부끄럼 많은 소녀는 활발하고 쾌활하게 변하였고, 성실하면서도 낯을 가리는 소년도 외로운 마음을 활짝 열었다. 그들은 흥겹게 온갖 화제를 주고받기도 하고 오래된 카메라로 서로 상대방의 모습을 남기며 쉴새없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그들은 지치도록 놀고 나자 서서히 조용해지더니 말없이 조용한 산의 오솔길을 천천히 걷는다. 새들이 숲 속에서 지저귀고 벌들이 꽃 사이에 분주한데, 어디에선가 옅은 향기가 풍겨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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