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문명탐험 4부
현대 서구문명의 뿌리, 그리스 문명
EBS 다큐 프라임
* 그곳은 넓고 기름진 평야가 존재하지 않았다. 평야를 타고 흐르는 거대한 강도 없었다. 국토의 75% 이상이 험준한 산으로 이루어져 있는 산악 국가 그리스. 그러나 이곳에서 이룩한 문명은 현대인에게 가장 많은 유산을 남겼다. 독특한 형태의 국가인 폴리스가 생겨났고, 인류 최초의 투표가 행해졌으며 철학과 문학, 예술의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그리 넓지도 않은 척박한 땅 그리스. 그곳에서 어떻게 현대 서구 문명의 뿌리인 그리스 문명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 유럽 대륙에서 꽃핀 그리스 문명. 아테네는 그리스 문명의 상징이다.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신타그마 광장에서는 매주 진귀한 광경이 펼쳐진다. 일요일 오전이면 그리스 전통 복장을 한 행렬이 광장에 나타난다. 근대 그리스의 왕궁을 지키던 근위병들의 교대식이다. 지금 왕궁 자리엔 국회의사당이 들어섰지만 근위병들은 옛 모습 그대로 아테네 심장부를 지키고 있다. 아테네엔 고대 그리스 문명의 발자취도 살아 숨 쉬고 있다. 근위병 교대식을 본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은 아크로폴리스. 도심 중앙에 우뚝 솟아 있어 고대 아테네가 문명의 도시였음을 상징하고 있다. 아크로폴리스에 세워진 웅장한 건축물 파르테논 신전(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에게 바친 신전)은 세계 문화유산 1호이자 고대 그리스 문명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최고급 대리석을 동그란 모양으로 다듬어서 쌓아올린 기둥은 그 높이가 10여 미터, 그 규모만으로도 과거 화려했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거대한 규모에 화려한 색까지 있었던 아크로폴리스, 그 중심에 있던 파르테논 신전은 머리가 천장까지 닿았던 아테나 신상이 세워져 있었다. 험난했던 그리스 역사 속에 지금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있지만 파르테논 신전은 영화로웠던 고대 그리스 문명을 기록보다 더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파르테논 신전에 새겨져 있던 조각에는 고대 그리스인의 모습도 기록돼 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신전으로 향하는 제례행렬의 모습, 신에게 제물로 바칠 소와 양을 끌고 가는 모습이 보인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일 년 내내 신을 위한 제가 끊이지 않았다. 그만큼 신은 그리스인들에게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토론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보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유난히 토론하는 것을 좋아했다.
* 시민들이 매일 모여 뜨거운 토론을 벌였던 곳은 도심에 자리한 너른 광장인 아고라. 아고라는 원래 시장이었다. 기둥이 길게 늘어서있는 이 건물은 상점이 들어서있는 주랑이었다. 상점에는 옷감과 음식을 비롯해 책, 도자기 등 온갖 다양한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장이었던 아고라는 왜 토론의 광장이 되었을까? 고대 아고라 터 옆에 자리한 이 재래 시장은 매일 쏟아져 나오는 신선한 채소들로 활기를 띤다. 그런데 시장에서 독특한 풍경을 만나게 된다.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 중에 유난히 남자들이 많다. 남자들이 장을 보는 건 고대 그리스의 풍습이었다. 바깥 활동이 극히 제한돼 있던 여자들과는 달리 남자들은 대부분 집밖에서 보냈는데 그들이 모인 곳이 시장이었다. 그들은 시장에 나와 장도 보고, 삼삼오오 모여 토론도 했다. 때문에 아고라는 시장이외에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다. 아고라에는 주랑과 함께 특별한 장소들이 있었다. 주랑 바로 앞에 위치한 광장에는 연설대가 있었다. 누구나 이곳에 서서 자신의 주장을 펼 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국회 의사당인 500인단 회의소도 있었다. 초청으로 꼽힌 시민 대표단 500명이 모여 회의를 하던 곳이다. 그런가하면 시민 법정도 있었다. 수많은 상점이 들어서있던 주랑이 길게 서 있고 그 앞으로 연설대가 있고 주랑 옆으론 시민 법정 건물이 세워져있었다. 아고라는 시민들이 모여 자유롭게 토론을 벌이고 정치활동을 하던 시민광장이었다.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가 있었던 아테네. 이것이 바로 고대 그리스에서만 볼 수 있었던 작은 도시국가 폴리스다. 고대 그리스에는 이러한 폴리스들이 수백여 개에 이르렀다. 그리스에서는 왜 이런 독특한 형태의 도시 국가가 등장한 걸까?
* 그리스에도 강성한 왕국이 존재했었다. 펠레폰네소스 반도에 위치한 미케네 왕국. 거대한 왕궁터가 지금도 남아있다. 20톤이 넘는 돌들을 견고하게 쌓아올린 성곽의 강성했던 시절의 흔적이 남아있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인 호메로스는 미케네를 황금으로 가득한 곳이라 했다. 실제 미케네는 BC 1400년부터 BC 1100년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왕성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위치해있는 왕궁터. 번영을 상징하듯 왕궁도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왕궁 아래쪽에 동그랗게 돌 벽으로 에워싸인 곳은 무덤이었다. 왕족들이 묻혔던 원형 A무덤에서는 발굴당시 무려 17킬로그램이 넘는 황금이 나와 호메로스의 기록이 사실임이 밝혀졌다. 황금은 번영의 상징이자 교역의 흔적이다. 어린왕족의 몸을 덮었던 황금 수의와 죽은 왕의 얼굴에 씌웠던 황금 마스크(일명 아가멤논 마스크)도 여러 점 나왔다.
* 지중해를 누비는 해상왕국으로 문명을 꽃피우던 미케네는 BC 1100년 무렵 최후의 순간을 맞게 된다. 도리아인의 침략에 의해 왕국은 무너지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무려 300여 년간 민족의 대이동이 이어졌다. 크고 작은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진 암흑기였다. 국토의 75% 이상이 산으로 되어 있던 산악 국가 그리스에서 새 정착지를 찾은 고대 그리스 사람들. 골짜기마다 사람들은 모여들었고, 높고 험한 산은 도시와 도시를 가르는 국경이 되었다. 아테네도 수백여 개 도시 국가 중 하나였다. 도시국가를 세우면서 도시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아크로폴리스를 세웠다. 최강의 군대를 가진 스파르타에도 아크로폴리스가 존재한다. 도시국가 코린트에도 아크로폴리스의 흔적이 남아있다. 폴리스의 대표적인 구조물인 아크로폴리스는 유사시 시민들이 대피하기 위한 성이었다. 험준한 산맥에 막혀 골짜기마다 도시가 들어섰고 그들은 서로를 견제하며 각자 독립된 국가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 폴리스들 중 가장 독특한 정치형태를 갖추었던 스파르타,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지금도 외진 곳이다. 도시 구조만 놓고 보면 스파르타는 여느 폴리스들과 다르지 않았다. 도시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아크로폴리스가 있었다. 도시에는 연극 공연이 이루어지던 극장터가 남아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연극공연이 성행해 극장은 늘 시민들로 붐비는 장소였다. 사람들이 모이는 극장 옆으로 넓은 터가 있어 극장 주변이 아고라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파르타에도 시민광장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런데 스파르타에서도 산이 깊기로 유명한 끼아다에는 특별한 유적이 남아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한 가파른 절벽. 이곳은 허약한 아이들이 버려졌던 곳이다. 스파르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곧바로 부족의 장로에게 보내졌고, 허약한 아이로 판명되면 그 자리에서 가차없이 버려졌던 것이다. 군국주의를 지향했던 스파르타에서는 유물들도 대부분 군사훈련과 관계된 것들이다. 스파르타의 모든 시민들은 어릴 때부터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7살이 되면 부모와 떨어져 군사훈련을 받았다. 무기가 새겨진 이 비석은 어린 아이들에게 행해졌던 강도 높은 군사훈련의 흔적이다. 훈련을 무사히 마친 아이의 부모가 신께 감사의 비석을 바친 것이다. 스파르타에서는 여자들도 군사 훈련을 받았다. 건강한 아이를 낳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여성들에게는 또 하나의 특별한 권리도 주어졌다. 건강하고 튼튼한 남자를 고를 수 있는 권리였다. 스파르타가 군국주의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메세니아 평야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산악지대였던 스파르타의 가장 큰 고민은 식량문제였다. 때문에 메세니야 평야를 차지하기 위해 무려 20여 년간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결국 메세니야를 점령한 스파르타는 농업으로 기반을 다지며 최강의 군사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스파르타와 함께 폴리스를 대표하던 양대 세력이었던 아테네, 아테네는 어떤 도시 국가로 성장하게 되었을까?
* 척박한 땅이던 아테네도 식량 문제가 가장 심각했다. 실제 곡물이 거의 나지 않던 아테네의 주요 농작물은 올리브와 포도. 특히 올리브는 지금도 아테네를 대표하는 농작물이다. 올리브는 메마른 자갈밭에서도 잘 자르고, 지중해 지역의 뜨거운 햇살에도 잘 견디는 식물이다. 그리스 신화에도 등장하는 올리브는 고대부터 아테네의 상징이자 신이 준 선물로 여겨졌다. 올리브 나무를 심었던 아테나가 심지창을 보자 샘을 솟게 한 포세이돈을 이기고 아테네의 수호신이 되었다. 아테네는 올리브를 이용해 식량 확보를 위한 길을 모색한다. 아테네 북서쪽에 위치한 케라미코스, 고대 아테네인들의 공동묘지였다. 그런데 무덤 주위로 뜻밖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도 땅에 무수히 박혀 있던 깨진 도자기들. 이곳은 규모가 큰 고대 도자기 공장터였던 것이다. 이곳에 지명인 케라미코스도 도자기를 뜻하는 그리스어 케라모스에서 유래한 말이다. 대규모의 도자기 공장터가 발견될 정도로 아테네에서는 도자기 산업이 발달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 발견된 생활 도자기들은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3대째 전통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 니코씨. 그가 만든 도자기를 보면 손잡이가 유난히 크다. 손잡이를 크게 만든 건 올리브유를 가득 담은 무거운 도자기를 보다 쉽게 짊어지기 위해서였다. 올리브유는 아테네의 수출상품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식량 확보가 어려웠던 아테네인들은 지중해 거처에 식민시를 건설하고, 올리브유를 내다팔고 식량을 들여왔다. 활발한 무역활동은 상공업 발달로 이어졌고, 이는 아테네가 자유롭고 개방적인 국가로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바다로 나간 아테네 사람들. 아테네 외에도 에게해 해안가에 위치해 있던 많은 폴리스들이 바다에서 새 삶을 개척했다. 그리스 문명은 바다에서 비롯된 문명이었다. 유럽과 소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푸른 바다 에게해. 에게해의 수많은 섬에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른 바, 에게 문명이 시작된 것이다.
* 에게해에는 세 개의 문명 - 헬라스 문명, 키클라데스 문명, 크레타(미노스) 문명 - 이 자리 잡았는데, 그 중 가장 번성했던 문명이 크레타다. 그리스 남단에 위치한 그리스 최대의 섬 크레타. 지금 크레타는 조용하고 한적한 섬이다. 그러나 BC 2,000년 경 이곳에는 강성한 왕국이 존재했었다. 무성한 나무들로 둘러싸여있는 곳이 크레타 문명의 중심지인 크노소스. 크노소스 궁전은 에게 문명 전기의 지배자 미노스의 왕궁으로 고대의 왕궁 건축 중 가장 규모가 큰 것 중 하나이며 그리스 신화에서는 한 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는 미궁(라비린토스)으로 설계 되어 있다. 실제 미로같이 뻗은 복도에 방이 1,500여개나 되었다고 한다. 치밀한 설계와 궁 곳곳에 남겨져 있는 화려한 벽화 장식은 크레타 왕국의 번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풍요로운 생활의 흔적은 화려한 문양의 도자기로도 남아 있다. 자신들만의 문자를 가진 고도로 발달된 사회 크레타, 이곳에서 문명이 꽃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교한 그림이 새겨진 작은 반지, 반지 속 그림은 배였다. 사람들이 잔뜩 타고 있는 배모양의 장식품도 있다. 그림 속엔 크레타 섬의 해안가를 항해하는 배가 그려져 있다. 고대 크레타 사람들이 탔던 배는 어떤 배일까? 한 조선소에서는 유물 속에 그려진 배를 직접 복원했다. 고대 크레타의 배는 무역을 위한 상선이었다. 배에 모든 연결부분은 줄로 고정되어 있다. 갑판은 비교적 높게 올라와 있었는데 이는 갑판 아래 물건 실을 공간을 넓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크레타의 배에서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 특징은 배 가장 자리에 천을 대놨다는 것이다. 바닷물이 배로 들어와 물건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또 배 양옆으로 대져 있는 나무는 물건의 무게 때문에 배가 벌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렇게 견고한 상선을 타고, 그들은 무역을 했다. 크레타는 동지중해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세 대륙을 잇는 무역의 거점이었다. (아테네, 소아시아, 이집트) 크레타에서 발견된 이집트 상인의 그림은 크레타가 해상왕국이었음을 입중해주고 있다. 크레타를 중심으로 바다에서 시작된 에게문명이 그리스 본토로 이어져 그리스 문명을 이룬다.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피어난 그리스 문명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 나간다.
* 펠레폰네소스 반도 북서쪽에 자리한 올림피아 겹겹이 산으로 둘러쌓인 작은 산골 도시다. 기원전 8세기, 이 깊은 산중은 그리스 전역에서 온 사람들로 붐볐다. 4년 마다 한 번씩 거행되는 올림피아 제전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제전에서는 제우스 신을 모시는 제례의식과 함께 운동경기가 펼쳐졌다. 각종 육상 경기가 벌어졌던 스타디움에는 출발선도 표시되어 있다. 운동경기도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었던 것이다. 운동경기엔 모든 폴리스 사람들이 참여 가능했는데 거기엔 단 한 가지 엄격한 조건이 있었다. 오직 그리스말을 쓰는 그리스 사람만 가능했다.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화합하던 폴리스들 중 아테네가 최강자로 부상한 건 기원 전 5세기 초. 아테네 북부에 위치한 테르모필레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동서양의 첫 격돌이라 일컬어지는 그리스와 페르시아간의 전쟁이었다. 당시 오리엔트의 최강자였던 크세르크세스 1세가 35만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해 온것이다. 1,2차 원정의 실패에 이은 3차 원정길이었다. 이에 맞서 30여개의 폴리스들이 연합해 그리스 동맹군을 결성했다.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이 육지 방어에 나섰고, 아테네는 해군을 결성해 바다를 지켰다.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군을 잘 막아내고 있었다. 그러나 3일째 되는 날 육지 방어를 맡았던 스파르타군은 무너지고 만다. 테르모필레를 뚫은 페르시아군은 거침없이 아테네로 진격해왔다. 아테네인들은 도시를 버리고 살라미스 섬으로 향했다. 살라미스섬은 아테네로부터 동쪽으로 16킬로미터 떨어진 섬이다. 바다에서의 결전을 위해 페르시아군을 유인한 것이다. 페르시아군이 좁은 해협으로 들어오자 숨어있던 아테네 함대가 그들을 포위해 공격했다. 해협에 갇힌 페르시아군은 그 자리에서 모두 전멸한다. 아테네군 전술의 승리였다. 아테네가 기적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아테네 해군이 가지고 있던 특별한 것 때문이었다. 노가 3단으로 되어 있던 삼단노선이다. 일반 배에 이해 3배나 되는 노가 있는 것이다. 장정 170여명의 힘으로 나아가는 무서운 추진력에 강력한 무기까지 달려있는 삼단노선. 위기의 그리스를 구한 건 아테네의 뛰어난 해군력이었다. 전쟁의 승리는 아테네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다준다. 새로운 계층이 대두된 것이다. 노젓는 사람들은 원래 사회 최하위층엔 테테츠층으로 정치에 참여할 시간적, 경제적 여유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전쟁 승리의 주역으로 떠오르면서 아테네 사회에서 영향력 있는 계층으로 성장하게 된다.
* 사회 최하위층까지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면서 아테네는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게 된다. 고대 상점들이 들어서있던 건물인 주랑은 지금 아고라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이곳에 고도로 발달했던 아테네 민주정치의 흔적들이 있다. 도편추방제(고대 아테네에서 민주정치를 저해하는 위험인물을 전 시민에 의한 비밀투표로 10년간 국외로 추방한 제도)에 쓰였던 도자기 조각들이다.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전물들을 적어서 냈다. 누구나 아무 거리낌없이 당대를 주름잡던 인물을 써서 낼 수 있었다. 도편추방제는 아테네 시민 누구나 참여하는 시민투표였다. 전쟁이나 세금 같은 사회 정치적 현안도 시민투표로 결정했다. 투표는 여러 방식으로 이뤄졌는데 거수로 결정하기도 하고, 돌을 이용하기도 했다. 흰돌은 찬성, 검은 돌은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제판도 시민들이 직접했다. 클레로테리온(추첨기로 시민 법정의 배심원 조를 추첨해 편성하던 대리석 판)을 이용해 배심원을 뽑았는데, 그리스 시민 누구나 배심원이 될 수 있었다. 시민 법정에 쓰였던 독특한 모양의 단지는 클렙시드라라 하는데 이는 시민 법정에 쓰이던 물시계로 밑바닥의 구멍으로 물이 나오는 것을 이용하여 법정에서 변론 시간을 재는 도구였다. 물이 모두 옮겨지는데 걸리는 시간은 6분.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던 변론 시간이다. 비록 여성과 노예는 참여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으나 아테네는 시민들 스스로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던 민주사회였다. 민주정치의 발달로 아테네에는 새로운 문화들이 생겨났다. 활발한 토론 문화 속에 철학이 발달했다. 시민들이 모여 토론하던 아고라는 철학발달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스 최고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인 아고라 광장에 매일 나와 토론을 벌였다. 그의 연설을 듣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모였다. 보편적인 진리를 찾고자 했던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플라톤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그리스 철학의 토대가 된다. 플라톤은 철학과 과학을 가르치는 학교인 아카데미아를 세웠다. 그리스 전역에서 청년들이 모여들었고, 로마 시대에까지 그 명성이 이어져 로마 귀족의 자제들도 아카데미아에서 철학을 배웠다. 정치, 경제의 발달에 이어 문학까지 번영을 이룬 아테네는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렇다면 최고의 번영을 누렸던 그리스 문명이 어떻게 쇠락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을까?
* 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도록 도심 중앙에 서있던 아크로폴리스, 아크로폴리스의 상징은 단연 파르테논 신전이었다. 이 신전이 건립된 건 페르시아 전쟁 직후인 기원전 5세기 경 한 정치가에 의해서였다. 아테네 황금기를 이끈 페리클레스(아테네 제1시민, 웅변가, 군인, 아테네 황금기를 이끈 정치가)는 페르시아 전쟁 승리의 주역인 아테네를 그리스 최고의 도시로 만들고 싶었고 그 대표적인 것이 파르테논 신전 건립이었다. 건물을 올리는 데만 장장 15년이 들었고, 신전 건립에 든 최고급 대리석은 2톤에 달했다. 그야말로 대역사였다. 페리클레스는 어떻게 이런 엄청난 공사를 감행할 수 있었을까?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를 중심으로 델로스 동맹(페르시아 전쟁 후인 BC 478년 아테네가 주도하여 결성된 그리스 폴리스들의 해군 동맹)이 결성되었다. 아테네는 동맹국들로부터 기금을 모아 대금을 관리했는데 이 기금을 신전 건립에 쓴 것이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 민주 정치를 발전시키는 데도 동맹 기금을 썼다. 투표나 재판, 심지어 연극 공연을 관람한 뒤에도 수당을 지급했다. 동맹자금이 아테네의 사금고가 되버린 것이다. 아테네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테네는 동맹국들의 내정간섭까지 했다. 결국 아테네 동맹국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고 그틈을 타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결성된 펠로폰네소스 동맹국들이 아테네를 침공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BC 404년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각각 자기 편 폴리스들을 거느리고 싸운 전쟁)이 발발하여 최후의 승자는 스파르타였다. 아테네를 휩쓴 전염병과 페리클레스의 삶, 그리고 정치적인 혼란이 이어지면서 아테네는 전력을 상실했다. 내전은 끝났지만 긴 전쟁으로 쇠락해져있던 그리스는 그리스 북쪽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마케도니아 왕국에게 힘없이 정복당하고 만다. 비로소 그리스 폴리스들은 알렉산드로스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이후, 폴리스라는 독특한 국가 형태도 민주주의라는 발전된 정치형태도 쇠퇴의 일로를 걷게 된다. 그리스 문명을 꽃피웠던 폴리스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 문명의 모태인 너른 강도, 비옥한 땅도 존재하지 않았던 그리스. 그러나 험준한 산맥의 골짜기에도 인류는 뿌리를 내렸고, 그들은 인류 사회의 큰 발자국을 남길 문명 하나를 탄생시켰다. 그들이 뿌리를 내린 땅은 척박했지만, 그들이 일군 문명은 기름지고 비옥했다. 기적의 문명을 일궈낸 비밀은 바다에 있었다.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리스 사람들은 바다로 나갔고, 바다는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열어 주었다. 바다에서 일군 경제적 풍요와 바다에서 취득한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화는 그리스의 정치, 철학, 예술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 서구 문명의 뿌리가 된 그리스 문명, 바다는 또 하나의 인류 문명을 탄생시켰다.
'幽默雜事 > 閭巷漫談'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빈치코드(동영상) (0) | 2012.09.24 |
---|---|
인류문명탐험 5부 - 안데스의 신화, 잉카 문명(동영상) (0) | 2012.09.06 |
인류문명탐험 2부 - 사막 위에 꽃을 피우다, 이집트 문명(동영상) (0) | 2012.09.06 |
인류문명탐험 1부 - 사라진 고대 무역 도시, 인더스 문명(동영상) (0) | 2012.09.06 |
인류문명탐험 3부 - 갑골문자의 비밀, 황하 문명(동영상) (0) | 2012.09.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