幽默雜事/閭巷漫談

인류문명탐험 1부 - 사라진 고대 무역 도시, 인더스 문명(동영상)

마장골서생 2012. 9. 6. 23:17

 

 

인류문명탐험 1부

사라진 고대무역도시, 인더스 문명

EBS 다큐 프라임

 

* 이곳에서는 매일 신들을 위한 축제가 벌어진다. 이미 3천년 전부터 계속 되어온 힌두신들을 위한 축제. 이들은 갠지스강에 와서 몸을 씻고 갠지스강의 물을 마시므로써 신의 곁으로 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인도인들은 그보다 훨씬 전부터 위대한 문명의 주역이었다. 그들은 이미 4,500년 전부터 대양을 건너 타대륙과 교역했으며 자신들만의 고유한 정치,경제,문화적 업적을 이뤄냈다. 그것이 인더스 문명이다.

 

* 아시아의 서남쪽, 성자의 나라라 불리는 인도. 인도의 면적은 328만 평방킬로미터로 한반도의 15배에 달한다. 인도의 대륙이라 부르는 이유다. 그러나 이 거대한 대륙의 역사는 순탄하지만은 않다. 고대 알렉산더 대왕 티무르, 영국의 침략까지 수많은 고통을 경험했던 것이다. 인도 서북부 파키스탄과의 국경지역 이곳에선 매일 진풍경이 벌어진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 폐쇄식. 하루에 한 번 서로 우월함을 주장하는 파키스탄과 인도 국민간의 팽팽한 기싸움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장대한 인도대륙의 역사에서 두 나라의 분리는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세력 분쟁으로 서로 갈라져 버린 것이다. 때문에 인더스 문명을 찾기 위해선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야만 한다. 얼핏보면 하라파역은 파키스탄의 여느 간이역과 다르지 않다. 이 역은 그러나 건설된지 90년이 넘었고, 인더스 문명과는 뗄래야 뗄 수 없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러니까 1910년대 영국인들은 철도를 건설했고, 수많은 인도인들을 동원했다. 그런데 인도인들은 어디에 선가 아주 오래된 벽돌들을 가져왔다. 영국인들은 그 벽들에 주목했고, 곧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묻혀있던 고대 도시 하라파가 드디어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당시만해도 유럽의 학자들은 그리스나 로마와 같이 뛰어난 문명이 타대륙 어디에도 없을거라고 단정했으나 하라파는 매우 거대하고 정교했으며, 심지어 수로시설까지 완벽했다.

 

* 1924년 존 마셜은 하라파 문명이 최소한 2500년 이상 된 것이라는 놀라운 공표를 한다. 유물은 그 시대의 삶을 증언한다. 발굴과 함께 고대 인도인들의 삶이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항아리와 돌을 갈아 만든 목걸이, 두 마리의 소가 끌고 가는 수레, 특히 놀라운 것은 그들이 탄생시키고 사용했던 문자였다. 문자가 있었다는 것은 그들이 고도로 발달된 문명사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상당한 수준의 조직 체계와 인구 규모를 자랑하며 산업이 발달했고 문자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이집트의 피라미드가 건설될 당시 이곳에도 상당한 수준의 도시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아이들 놀이감이 많이 발견되었다. 공기 돌리기, 체스, 주사위, 다양한 문양의 구슬들이 그것이다. 햇빛이 따사로운 날이면 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구슬놀이를 하거나 제갈로 만든 공기놀이를 돌리며 한나절을 보냈을 것이다. 남자들이 모두 시장이나 논밭으로 일을 나갔을 때 여자들 역시 가사를 돕느라 분주했을 것이다. 이처럼 모든것이 풍성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하라파 사람들. 그 풍성함의 근원은 바로 거대한 강 인더스에 있었다. 인도 문명을 탄생시킨 거대한 강 인더스. 인더스강은 히말라야에서 출발해 장장 2,900킬로미터를 달려 아라비아 해로 들어가는 거대한 강이다. 연평균 유량이 나일강의 두 배에 달할 만큼 큰강으로 오늘날까지 인도인에게 있어 삶의 젖줄이자 역사의 그릇이기도 하다. 단순한 의미에서는 강은 어부들에게 수많은 물고기를 제공하는 생업의 곳간이다. 하지만 강은 부차적으로 더 많은 것을 제공한다. 수많은 토사들을 가져와 땅을 기름지게하고 농산물을 더 풍성하게 하는 것이다. 때문에 인더스강 주변은 지금도 최대의 농산물 생산지로 꼽힌다. 특히 수분을 많이 필요로 하는 수박, 오이, 호박과 같은 농작물들은 주변에 강이 없다면 거의 생산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이곳 농사꾼들에게도 어머니의 강이라 불리는 인더스.

 

* 강주변에 수확물이 많아지면서 필경 잉여 생산물이 발생했을 것이고 이를 내다 팔아야만 했을 것이다. 지금과 달리 육로가 발달되지 않았던 시절, 강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고속도로였다. 이곳 사람들은 낮은 강바닥 때문에 밑이 평평한 배를 타고 노를 저어 멀리는 수백킬로미터까지 이동했고, 배들이 정박하는 곳은 물건을 사는 사람들로 붐볐고 자연스럽게 도시가 형성되었다. 기원전 2,10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 4,500년전으로 돌아가보자. 인도 대륙의 서북부 대륙엔 두 개의 강이 있었다. 하나는 인더스강, 또 하나는 가하하크라강이었다. 강상류에는 이미 하라파, 중류에는 모헨조다로, 가하하크라강 하류에는 돌라비라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대도시 주변에는 2천여개의 촌락들이 형성되 있었다. 하라파에서 약 600킬로미터 위치에서 발견된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 중 가장 큰 죽은 자의 흙무덤이란 뜻의 모헨조다로는 발굴면적만 2.5제곱 킬로미터에 달하는 마차 두 대가 지나갈 수 있는 폭과 높은 합벽과 거미줄같은 미로로 도시가 얽혀 있다. 이 정도 규모라면 이십만명 정도의 인구를 충분히 수용했을 것이다. 모헨조다로 발굴이 시작된 것은 1922년 당시 인도의 고고학자들은 무려 1,200여명의 인부들을 동원해 4,500년 전의 문명도시를 찾아냈다.

 

* 발굴 결과 도시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성채 구역(유적의 서쪽에 위치하며 광장, 공회당, 제단의 용도), 주거 구역(유적의 동쪽에 위치하며 바둑판 형태를 띠고, 성채 구역에서 150미터 정도 떨어져 있다.) 이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일반 시민들은 어떤 환경 속에서 살았던 것일까? 주택들은 미로처럼 좁은 골목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바둑판처럼 놓여 있다. 주택 내부는 길과 맞닿아 있는 방문에서 큰 거실을 지나 안뜰로 이어진다. 안뜰에서는 요리를 하거나 공예품을 만들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우물인데 이런 우물이 무려 700여개나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되었다. 안뜰에서 사용된 물은 배수시설을 통해 집밖으로 나와 하수구를 통해 도시 밖으로 배출되었다. 주거 지역보다 약 18미터 높은 구역에 설치된 성채 구역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전과 목욕탕이다. 한꺼번에 수십 명이 목욕할 수 있는 이곳에는 배수구도 있어 힘 안들이고 엄청난 양의 물을 뺄 수도 있었다. 우기와 건기가 뚜렷한 이곳에서는 지금도 물에 대한 신앙이 많고 물을 신의 선물로 여긴다. 때문에 이곳에서 몸을 씻은 사람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신에게 다가갔을 것이다. 이것이 당시 사제나 왕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단서다. 청동 보석으로 장식된 머리띠와 두툼한 입술, 그리고 하늘의 별이나 신의 날을 상징했던 클로버 망토를 입고 정돈된 수염을 가진 남자상이다.

 

* 문명이 발생하려면 무엇보다 충분한 생산량과 이를 소비할 수 있는 인구가 충분해야 하고 저장과 이동, 거래가 활발히 이뤄져야만 한다. 이들은 인더스강을 통해서 이를 해결했고, 그 인더스강의 혜택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초록의 대지. 아직도 이곳에서 모헨조다로 방식으로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을 흔히 만날 수 있다. 여전히 진흙벽돌에 진흙모르타르, 벽돌을 만드는 방식으로 예전과 다르지 않다. 손으로 진흙을 잘라내 겉표면에 가는 모래를 묻힌 다음 일정한 석면 틀 안에 넣고 다져서 찍어내는 방식이다. 찍어낸 벽돌은 햇빛에 건조시킨다음 불에 굽게 된다. 이때 사용하는 것이 왕벼, 왕볏불에 3일동안 구워내면 모헨조다로에서 사용하는 것과 같이 경쾌한 소리의 단단한 흙벽돌이 완성된다. 이같이 구워내는 것은 비단 벽돌 만이 아니다. 지금도 옛날 방식 그대로 만들어지는 항아리. 이곳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구워내는 항아리를 채문토기라 한다. 채문토기란 토기에 식물이나 동물의 문양을 새겨 넣는 것을 말한다. 이렇듯 사람들은 물고기, 농산물, 심지어 벽돌, 항아리까지 모든 것을 인더스 강으로부터 얻어냈던 것이다.

 

* 인도의 수도 델리에 있는 국립 박물관. 이곳에 인더스 문명에 관한 유물들이 다수 전시되어 있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이 홍옥수 목걸이. 홍옥수 인도 구자라트 지방에서 캐낸 돌을 얇게 갈아 윤을 낸 보석이다. 여자들은 팔이나 허리, 목둘레에 홍옥수같은 여러 가지 보석을 착용하여 아름다움을 표현했다. 그러나 발굴의 가장 큰 백미는 인장이었다. (인더스 인장: 점토에 문자와, 그림을 새겨 넣은 것으로 신분증, 통행증, 상품 수령증 등의 용도로 사용) 문명의 실마리를 풀어줄 열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인더스 곳곳에서는 약 4천 점의 인장이 발견되었는데 비누처럼 부드러운 활석으로 만들어졌다. 인장엔 단순한 조합의 문자나 사람이나 동물, 그 중에서도 뿔이 하나 달린 유니콘이 가장 많이 등장한다. 과거 인더스 사람들은 이것을 진흙판이나 그릇 또는 물건에 새겨 자신의 소유인 것을 알렸을 것이다. 그런데, 이와 똑같은 인장이 오늘날 이라크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도 발견되었다. 새겨진 동물도 그렇고 아직까지 해석되지 않는 문자 기호까지 정확히 일치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 인더스강과 아라비아해는 대형 상선들이 주를 이었을 것이다. 당시 인더스 강변에는 500만에 달하는 인구와 2,000개가 달하는 촌락이 있었으며 이들이 생산했던 물건은 타대륙과 활발히 소통했다. 주교역지는 메소포타미아, 두 문명권 사이에는 비록 소량의 물건이 오갔지만 육로가 있었다. 하지만 교역량이 늘어나자 해로를 통해 무역을 시작했고, 수많은 무역도시들이 생겨났고 그 중심에 모헨조다로가 있었다. 모헨조다로는 오늘날의 맨하탄이었던 것이다. 넘실대는 물건과 물건을 옮기는 노동자, 고층 빌딩과 무역을 상담하러 온 상인, 언제 어디서나 쉽게 마실 수 있는 시원한 샘물, 그러나 이 번성했던 고대문명은 지금 보이는 것처럼 그 잔해만 남긴 채 기원전 1,800년 경 역사에서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무기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전쟁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화재나 파괴의 흔적도 없다. 그렇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인도 대륙은 기후 변화가 가장 뚜렷한 지방, 수분을 잔뜩 품은 공기가 북쪽으로 이동, 차가운 히말라야 빙산에 막혀 주기적으로 비가 내린다. 그것이 히말라야 몬순이다. 매년 7월쯤 시작되는 몬순은 인도나 파키스탄 동부에는 풍요를 가져다 주는 신의 선물로 여겨진다. 그런데 기원전 1,800년 전 갑자기 몬순이 약해졌고, 강의 물길이 바뀌자 문명도 쇠락했다는 것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증거가 지금도 남아 있다. 우리는 인더스강과 가하하크라 강변에 2,000여개의 촌락이 있었음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눈 여겨 보지 않았던 또 다른 도시가 하나 있다. 바로 가하하크라 강 하류에 있는 돌라비라이다. 인도 구자라트 지방은 연평균 강우량이 400mm 미만에 속하는 매우 건조한 지방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대부분 유목생활로 생계를 이어간다. 그렇다면 이 척박한 땅에 어떻게 그처럼 문명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일까? 인더스 문명 유적지중 가장 최근에 발견되었다는 돌라비라. 가까이 가자 석축들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 세월에 철저하게 마모된 탓인지 거의 도시의 형태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평평하게 있다. 단지 이곳의 특징이라면 모헨조다로와 달리 돌로 건축을 했으며 주택 구조가 원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배수시설만큼은 이곳 역시 철저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주택에서 사용되는 배수로를 통해 흘러나온 다음 대로에 있는 하수관을 통해 도시 바깥으로 흘러 갔을 것이다. 그러나 여느 발굴지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돌라비라만의 특별한 공간인 저수지가 발견되었다. 저수지는 높이 15미터의 거대한 석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때문에 요즘도 우기철 비가 고였다가 더운 날씨에 증발하고 나면 물이 고였던 흔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들은 왜 저수지를 만들었을까? 발굴 결과 17개나 되는 거대한 저수지가 나타났다. 그렇다면 이 건조한 지역에서 저수지의 물은 또 어떻게 채웠을까? 돌라비라 유적지에서 약 2킬로미터 이 황량한 평원에 한때 물이 흘렀던 흔적이 선명하다. 바짝 말라 있는 강밑바닥. 그러나 그 주변을 잘 살펴보면 인공으로 돌을 쌓은 흔적이 뚜렷하다. 이곳에 댐을 만들었던 것이다. 과거에 이곳은 강물이 흘렀고, 사람들은 그것을 모으기 위해 댐을 쌓았다. 이곳에 모인 물은 인공 수로를 타고 돌라비라 시내까지 흘러와 동쪽 끝에서부터 채워지기 시작해 서쪽 끝까지 차례대로 채워져갔다. 건조한 사막 위에 일년 내내 물이 넘치는 돌라비라는 말 그대로 물의 도시였던 것이다. 그런데 기원전 1,800년 경 갑자기 가하하크라강이 말라버렸고, 돌라비라의 운명도 강과 같을 수 밖에 없었다.

 

* 문명을 낳았으나 다시 그 문명을 거둬버린 강, 가하하크라. 강이 사라지자 그곳엔 거대한 습지가 만들어졌다. 바로 커치 대습지다. 2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새들의 낙원. 아라비아해와 접한 바다쪽 풍경도 완연히 달라졌다. 넘실대는 바닷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50도가 넘는 여름날씨에 수분이 증발하면서 끝도 없는 소금밭으로 변해버렸다. 과거 돌라비라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눈앞에서 벌어진 상전벽해였을 것이다. 과거 수십 만명이 살았지만 지금은 겨우 몇 백 명만이 살아간다는 돌라비라 마을. 그나마 이 마을이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마을 외곽에 있는 커다란 우물 때문이었다. 자그마치 입구의 너비가 4.1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우물. 돌라비라 마을 사람들에게 이 우물은 삶을 이어가게 해주는 유일한 생명줄인 셈이다. 때문에 단 한방울의 물도 이들은 허투루 사용하지 않는다. 물은 이들에게 삶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생활의 주체이다. 물이 단순한 물질이 아닌 성스러운 숭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하다. 한때는 바다와 같이 넓었을 강, 그러나 지금은 말라버린 강. 불볕더위가 이어지고 급기야 가하하크라까지 말라갔지만 돌라비라 사람들에게는 별 뾰족한 대안이 없었다. 그들은 성스러운 신전에 올라 간절히 비를 내려줄 것을 호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은 외면했다. 매년 7월에 시작됬던 몬순은 더 이상 이곳에 찾아오지 않았고 모든 것이 죽어갔다. 비가 오지 않았고 강이 말랐고, 그것은 물의 도시 돌라비라가 바깥도시와 더이상 소통할 수 없고 도시가 몰락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막힌 운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돌라비라가 사라지던 기원 전 1,500년 경 중앙아시아로부터 아리아족의 대대적인 침략이 있었던 것이다. 이 위기를 피해 인더스 강변에 문명을 일궜던 이들은 동쪽으로 떠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리아족, 본디 중앙아시아 유목민이었던 그들은 일찍이 철기 문화를 발달시킨 다음 스스로 문명인임을 자처한 다음 스스로 말을 타고 들어와 인더스 강변을 휩쓸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라파, 모헨조다로, 돌라비라와 같은 거대한 문명을 일궜던 사람들에게 가뭄에 버금가는 뼈저린 고통이었을 것이다. 인도 역사의 새주역이 된 아리아족은 그 후로도 지배권을 두고 끊임없이 싸움을 계속했다. 그 내용이 마하바라타라고 하는 거대한 대서사시에 담기게 되고 영웅담은 훗날 신화가 되었다. 그것이 바로 인도 힌두교의 기원이다. 인더스강의 신화에서 힌두신앙과 함께 갠지스강의 신화로 역사를 다시 쓰기 시작했던 인도 사람들. 오늘날 인도인 90%는 힌두교를 믿는다. 이들에게 갠지스강은 곧 신화이며 어머니의 강이란 의미로 통한다. 인도 동북부 갠지스강 연안에 있는 힌두교 제일의 성지인 바라나시. 매일 이곳 강변은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강물에 몸을 씻는다. 신의 축복으로 자신의 오염된 영혼이 치료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힌두교 성전에 따르면 갠지스강은 본디 신의 머리카락을 타고 천상에서 내려왔다고 한다. 그리하여 갠지스강은 천상과 연결돼 있고, 영혼을 맑게 하면 사후에 천상에 되돌아갈 수 있다고 인도인들은 믿는다. 때문에 이들은 살아서는 물론 죽어 재가 되더라도 갠지스강에 뿌려주는 것을 최고의 축복으로 여긴다. 갠지스강과 인더스강, 흐르는 곳은 각기 다르지만 어찌 보면 인더스 문명이란 거대한 역사적 뿌리 속에서 하나로 흐르고 있을 강. 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 인더스 강변은 세계 최대의 고대 도시가 있었다. 그 도시를 중심으로 오늘날 프랑스만한 면적의 2,000여개의 촌락이 있었고 그들은 평화 속에서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그후 자연재해와 외부 침략 앞에 인더스 문명은 위기에 빠졌고 고통 끝에 갠지스와 만나 새로운 뿌리를 내렸다. 그리하여 오늘날 인도인들에게 있어 강은 곧 옛 문화와 만나는 역사적 소통의 상징이요, 찬란했던 인더스 문명과 만나는 자존심의 상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