幽默雜事/閭巷漫談

인류문명탐험 3부 - 갑골문자의 비밀, 황하 문명(동영상)

마장골서생 2012. 9. 6. 22:57

 

인류문명탐험 3부

갑골문자의 비밀, 황하 문명

EBS 다큐 프라임

 

* 예측할 수 없는 자연은 두려움이다. 약 3,300년 전 가뭄이 계속되던 어느 날, 사람들은 비가 언제 올지 하늘에 묻는 제사를 지냈다. 거북이 껍질 안쪽엔 바로 그때 기록이 남아 있다. 엎드려 절하며 점술가가 물었다. 4일 뒤 저녁에 비를 내려줄 것인가를 묻는 내용이었다. 대답이 없자 한 번 더 물었다. 점괘를 해석하는 것은 왕의 일이었다. 결과는 비가 온다는 내용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점을 친 지 열흘 뒤 실제로 비가 왔다. 5천 년 전 황하 주변에 살았던 인류의 발자취를 알려주는 갑골문자, 그 속엔 그들의 치열했던 삶이 기록되어 있다.

 

* 3천 년 전 갑골문자 위에 세워진 황하문명, 지금 황하로의 대탐험이 시작된다. 물길 따라 5천 년 문명이 시작된 황하, 거침없이 흐르는 물줄기는 길을 만든다. 큰 산맥을 흘러 들어오는 황하는 샨시성에 오면 강폭이 주전자처럼 좁아지면서 세계 최대의 황토 폭포로 변한다. 바로 후커우 폭포다. 9미터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는 주변의 모든 소리를 삼켜버릴 정도로 대장관을 이룬다. 햇살을 따라 이곳은 하루에도 몇 번씩 무지개가 뜬다. 그 사이로 황룡이 꿈틀 거리듯 물줄기가 하염없이 이어진다. 중국 칭하이성 쿤룬 산맥에서 발원하여 5,465km로 이루어져 있는 황하는 동쪽 고하이만으로 흘러든다. 중국 대륙 동서를 가로지르는 황하는 황하 특유의 황토 문명을 낳았다. 황하의 중류, 이것은 황토 고원으로 유명하다. 입자가 고운 황토가 비바람에 쌓여 만들어진 황토고원은 해발 천 미터에 자리 잡고 있다. 메마른 황토흙은 식물조차 자라기 힘든 척박한 환경이다. 그러나 수천 년 전부터 이곳은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그들은 황토를 파내고 토굴 속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바로 야오동이다. 이곳에서 살고 있는 짱꿔바오 할아버지. 5대째 살고 있는 할아버지의 집은 소박하다. 집안은 주로 방과 부엌으로 이루어져 있다. 황토로 만들어진 집은 외부의 열을 차단하기 때문에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이 집은 수천 년 전 처음 이곳에 살기 시작했던 조상들의 지혜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메마르고 척박한 땅 황토고원, 그러나 5천 년 전 이 땅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곳은 원래 황하의 물줄기가 흘렀다. 황하가 흐르는 동안 이 지역은 그 어느 곳보다 비옥한 땅이었다. 5천 년 전, 바로 이 일대의 황하 중류에서는 신석기 문화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들이 만든 양사오 문화다. 그들 역시 강에서 고기잡이를 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낚시 바늘과 다름없는 정교한 도구를 이용할 줄 알았다. 당시 유물은 황하 주변에 살던 이들의 생활상을 말해준다. 당시 사람의 문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시루는 곡식을 쪄서 먹었다는 중요한 증거다. 뿐만 아니라 곡식을 저장할 만큼 풍족해지며 당시 사람에게도 큰 변화가 생겼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어떤 곡식을 재배하고 주식으로 삼았을까?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흥미로운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것은 바로 불에 탄 좁쌀이었다. 조를 재배해 먹었다는 증거다. 그들이 살았던 직후는 당시 문화를 그대로 보여준다. 반포 유적지는 시안의 외곽에 위치한 신석기(양사오 문화)시대 유적지다. 6천 년 전 이곳에 살았던 이들은 공동 생활하는 마을을 형성했다. 특히 이곳 무덤에서는 당시 사람들의 유골이 많이 발견되었다. 대부분 평균 수명은 20년 정도, 무덤은 대부분 합장이다. 그런데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합장을 했다. 양사오 문화는 검은 토기와 채색 토기가 특징이다. 그 가운데 눈길을 끄는 것은 토기에 그려진 다양한 형태의 문양이다.

 

* 백년에 한 번씩 물길이 바뀌면서 수많은 지류를 만들고 그 길을 따라 흘러온 황하. 강가에 사는 사람들에게 황하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나라는 수천 년 간 전설 속의 이야기로 전해졌을 뿐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황하 문명의 실체가 밝혀진 것은 청나라 말 우연한 사건을 통해서였다. 1,899년 베이징에 사는 한 관리는 말라리에 걸리자 약재상에서 한약을 지었다. 그렇게 지어온 한약재 속에 말린 거북의 껍질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 껍질 안쪽에 글자가 씌어 있었다. 그것은 전설 속에 전해 내려오던 은나라 사람들의 문자인 갑골문자였다. 금속학자였던 왕이롱이 갑골문자의 실체를 밝혀낸 것이다. 왕이롱은 갑골이 어디서 왔는지 추적하기 시작했다. 수소문 끝에 갑골을 발견한 곳은 황하의 지류가 흐르는 거난성 안양이었다. 황하 지류변에 위치한 안양은 예로부터 교통이 발달한 평이한 지대다. 현재 인구 500만 명이 살고 있는 중국의 전형적인 중소도시다. 그런데, 청나라 말기 이곳에서 은나라의 수도였던 은허터가 발견되었다. 샤오툰은 3,300년 전 은나라의 수도로 갑골문자 최대의 발견지이다. 발굴 전만 해도 논밭이었는데, 1928년 발굴을 위해 땅을 파자마자 뜻하지 않은 유물들이 쏟아졌다.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갑골이 발견된 것이다. 은허 박물관은 발굴된 터 위에 거대로 지붕을 얹어 만들었다. 특히 이곳에선 땅을 파서 만든 대규모 갑골갱이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곳에서는 무려 10,700여편의 갑골이 출토되었다. 이렇게 은허터에서 나온 갑골은 모두 17만개가 넘는다. 갑골은 주로 거북의 속을 파내고, 거북의 배껍질 안쪽에 글을 새겼다. 대부분 거북의 껍질을 사용하고 있지만 일부는 동물의 뼈를 쓰기도 했다. 이렇게, 거북이나 동물의 뼈에 새긴 글자는 당시 사람들의 문자다. 그렇다면, 여기에 쓰긴 글은 무슨 내용일까?

 

* 갑골의 대부분은 전쟁과 같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 하늘에 묻는 내용이 담겨 있다. 갑골은 약 3,300년 전 은나라 사람들이 중시했던 일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그들은 마을을 만드는 일과 하늘의 뜻에 따라 순조롭게 하고자 했다. 당시 사람들의 생계가 걸린 농사도 하늘의 뜻을 물었다. 은나라 왕실의 중대사를 기록한 갑골도 있다. 갑골의 점을 치는 방법은 은나라의 고유한 전통이었다. 점괘 해석은 글자를 쓴 갑골 뒷부분에 글을 붙여 그 갈라지는 모양을 보고 길흉을 판단했다. 하늘의 뜻에 따라 나라를 다스렸던 은나라는 제사가 곧 정치였던 제정일치 국가였다. 그 비밀을 푸는 열쇠가 바로 갑골 문자다. 갑골 문자를 만들고,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었던 은나라. 그들은 약 3,300년 전 이곳에 도읍을 정하고 은나라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은나라는 기원전 1,600년 상족의 탕왕이 하나라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세운 왕조다. 기원전 1,300년 전 도읍지를 지금의 안양으로 옮긴 이후 254년 간 정치, 경제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나라로 성장했다. 이 청동기는 당시 은나라 사람들의 실제 모습을 알 수 있는 형상이다. 황하 주변에 살았던 이들은 바로 황하 문명을 만든 주인공이다. 은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제사였다. 제사엔 산 사람까지 제물로 바쳐졌다. 사모무정은 은나라 사람들이 만든 최대 규모의 청동기다. 그 무게가 무려 875킬로그램이나 되는 이 청동기의 용도는 제사용 솥이었다. 사모무정이 만들어진 때는 은나라 최고 전성기였던 무왕때다. 왕권의 상징이었던 사모무정은 당시 얼마나 강력한 국가였는지 말해주는 유물이다. 사모무정이 발견된 곳은 은허터의 한 무덤 안이었다. 도굴되지 않은 채 온전한 상태로 발견한 이 무덤에서는 각종 제기와 진귀한 물건들이 나왔고, 특히 무덤안에는 무덤의 주인과 함께 묻힌 순장자들이 발견되었다. 순장자들은 무덤 주인의 사회적 신분을 말해준다. 뿐만 아니라 조개껍질도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조개껍질은 당시의 화폐였다. 특이한 점은 무덤속에서 발견된 청동기의 모양이다. 정교하고 아름다운 장신구로 가득한 청동기 가운데 동물 모양을 본딴 것이 많다. 특히 옥으로 만든 장신구까지 모두 1,900여점의 유물이 발견되었다. 그 중 한 청동기에서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표시가 발견되었다. 그릇에 새겨진 이 글자는 푸하우라는 왕비를 상징하는 기호다. 이 기호는 이 무덤의 주인이 왕비였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푸하우는 왕비이자 은나라 군대의 총사령관이며 우딩왕의 왕비였다. 그녀는 역사상 알려진 중국 최초의 여장부이다. 왕의 세번째 부인이었던 푸하우는 전쟁을 총괄 지휘하면서 은나라의 영토를 확장해 나갔다. 은나라는 주변 90여개 부족을 세력권에 넣으면서 강대국으로 자리잡았다. 이렇게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단서는 은허의 거마갱에서 찾을 수 있다. 거마갱은 말과 그 말이 이끄는 수레를 그대로 보존한 갱이다. 당시에 이미에 수레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사실은 갑골문자에도 나타난다. 갑골문자에는 수레를 상징하는 문자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수레를 사용했다는 것은, 바퀴를 만드는 기술은 물론 보루가 발달했다는 증거다. 쉽게 먼 거리를 이동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기동력을 갖추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안양의 동쪽에 위치한 지난, 춘추전국시대 제나라의 수도였던 이곳은 지난은 1990년 5월 고속도로 건설을 하던 도중, 제나라왕의 무덤 옆에 묻은 말과 마차의 차마갱이 발견되었다. 발굴된 차마갱은 원래 모습 그대로 지붕을 얹어 오차박물관으로 탄생되었다. 길이 40미터 폭 15미터의 이곳에 말 32필과 마차 10냥이 묻혀있다. 당시 이 수레와 말은 전쟁용이었다. 그러나 그 후 왕의 부장품으로 순장풍습에 따라 물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마차와 함께 그대로 땅 속에 묻은 것이다. 이렇게 고대 국가에서 마차는 전투력의 상징이었다.

 

* 당시, 마차는 중요한 전투장비였다. 무기가운데 다량의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화살은 전투에 사용된 살상용 무기였다. 실제 무덤에서는 화살에 맞아 죽은 것으로 보이는 유골도 발견되었다. 달리는 마차와 날카로운 화살촉은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말해준다. 특히, 수레를 타고 달리며 쏜 화살의 위력은 그 어떤 무기보다 치명적이었을 것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갖춘 은나라는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정립했다. 은나라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사방에 이름을 붙인 것이다. 갑골에 새겨진 '아'자는 우주의 중심을 의미한다. 사방을 아우르는 중심에 은나라가 있다는 생각은 그들의 무덤터 모양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스스로가 우주의 중심이란 철학을 갖게 된 것이다. 당시 청동기에는 중국이란 글자가 기록되어 있다. 자신들이 중심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단서다. 은나라는 그들의 문화를 바탕으로 그 영향력을 넓혀 나간다. 황하 유역, 지금의 청두 지역 너머까지 은나라는 그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 중국 남서부 양쯔강 지류에 자리한 청두(쓰촨성)는 예로부터 농업이 발달한 지대였다. 지리적인 이점 때문에 이곳은 예로부터 중국내 교통 중심지로 발전했다. 덕분에 행정의 중심지로 무역과 상업이 발달했다. 지금도 거리 곳곳에서 당시의 화려한 문화를 엿볼 수 있다. 이곳은 은나라와 같은 시기에 청동기 문화가 발견된 곳이다. 지난 1986년 청동조각이 발견되면서 시작된 발굴 조사에서 흥미로운 유물이 발견되었다. 바로 갑골이다. 그러나 이곳에서 출토된 갑골은 불을 피워 점을 친 흔적만 있고, 글자가 적혀져 있지 않다. 고대 이곳에 살았던 이들은 문자가 없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은 황하 문명의 주인공이었던 은나라와는 또다른 모습이다. 이곳은 청동으로 만든 다양한 유물상이 특징이다. 황하 주변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조형조각, 황하 문명과 전혀 다르다는 게 학계의 주장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무덤에서는 30대 전후의 젊은이들의 유골로 출토되었다. 학자들은 이들의 사망 원인이 전쟁이라 추정하고 있다. 은나라와 청두는 어떤 관계였을까? 바로 코끼리 나라로 추정되는 것이 청두이다. 실제로 이곳에서는 발굴 당시에 다량의 상아가 출토되었다. 특히 청동기는 은나라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문양이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은나라에서 화폐로 쓰였던 조개류 역시 이곳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렇게 은나라를 중심으로 한 황하 문명은 주변국과의 교류를 통해 그 영향력을 키웠다. 황하는 백년에 한번씩 물길이 바뀔 정도로 거대한 자연의 변화를 겪었다. 그 속에서 황하 문명은 또다른 형태로 발전했다. 은나라 말 혼란기를 틈타 은나라의 주인이 바뀌었다. 주나라는 양쯔강 이남까지 그 영역을 넓히며 은나라의 문자를 철학적으로 완성했다. 특히 유교 사상은 황하 문명의 중심축이다.

 

* 공묘(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당으로 중국과 전 세계의 분포함)는 2,500년 전에 살았던 공자를 모시고 기리는 사당이다. 지난 1994년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해마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공자의 발자취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공자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고, 기리는 유교 사상을 집대성했다. 주변이 황토 흙으로 뒤덮인 언덕 이곳(텐진야오위안)은 지형적 특성 때문에 전통적으로 황토집을 짓고 살았다. 마치 황토속에 집을 지은 듯한 모습이다. 집으로 가는 길은 좁은 벽돌길을 따라 내려가야 한다. 길은 집안으로 연결되어 있다. 집과 집은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집안의 모습은 비교적 현대화되었지만 집모양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황토 굴을 파서 집을 짓는 건축법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부엌엔 음식을 저장하는 장독이 있다. 부엌 한 켠 부뚜막에는 부엌을 지키는 신을 모시고 있다. 조왕신이다. 조왕신은 불의 신으로 불을 다루는 부엌에서 집안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집안엔 조상들의 위패를 모시는 자리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조상들이 죽어서도 후손들을 지켜준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래서 돌아가신 분들의 위패를 집안에 모시고 예를 다한다. 조상을 모시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유교의 오랜 전통은 이렇게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 통일 왕조였던 주나라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100여개가 넘는 중원의 제후들이 일어나 분열이 시작되었다. 이른바 춘추전국시대로 불리는 정치적 혼란이었다. 기원전 221년 진나라는 이 혼란기를 종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다. 진나라의 수도였던 시안은 황토고원 위에 자리잡은 도시다. 황하의 최대 지류가 흐르는 이곳 도시는 지금도 600년전 명나라 때 지은 시안성벽이 굳건한 모습을 드러낸다.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의 출발점인 이곳은 예로부터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국제도시다. 시안성은 회족 거리로 유명하다. 300여 미터에 이르는 길을 따라 각종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대부분 중국내 이슬람교도인 회족이다. 시안은 약 10만명이 넘는 회족이 살고 있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제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중국 역사상 최초로 중앙 집권제를 도입했다. 뿐만 아니라 도량형과 문자를 통일해 제도를 정비했다. 병마용 박물관은 당시 진나라의 위상을 그대로 보여준다. 병마용갱(길이 230미터, 폭 612미터로 발굴된 4개의 갱 중 11호 갱으로 규모가 가장 크다)은 유물이 발견된 야외 유적지 위에 지붕을 지어 만든 박물관이다. 발굴된 병사들의 모습은 키가 평균 180센티미터로 건장하다. 흙으로 지은 토병은 각기 다른 표정과 손모양은 물론 당시 사람들의 복식과 머리 모양까지 정교하다. 처음 병마용을 발견한 사람은 한 농부였다. 1974년 7월 15일 본격적인 조사에 참여한 고고학 발견팀은 땅 속에서 2,200년전 진시황의 친위 부대였던 병마용갱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제작 당시 토형은 채색된 상태였다. 일부 채색된 형태로 발굴돼 보존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 그 빛을 잃었다. 야외에서 이루어진 초기 발굴 과정에서 토형이 햇빛에 노출되자마자 불과 몇 시간 만에 색이 바래버렸기 때문이다. 채색을 했을 당시 원래 모습은 지금과 다른 화려한 형상이었을 것이다. 현재까지 발굴되거나 발굴중인 갱은 모두 네 곳, 총면적이 모두 25,380평방미터에 이른다. 발굴이 시작된 지 30여년, 발굴 작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일일이 손으로 이루어지는 발굴 작업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부서지고 깨진 조각을 맞추는 작업은 2,200년 전 황하 문명의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병마용 갱에서 출토된 진시황의 청동마차는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두 대의 마차다. 실물의 절반 크기로 만든 것이지만,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활기차게 만들어져 있다.

 

* 그러나 진나라는 오래 가지 못했다. 북방 유목민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보하이 만에서 중앙아시아까지 약 6,400km로 이뤄진 성으로 지도상의 총연장은 2,700km로 인류 역사상 최대의 토목공사로 진시황제가 북방 유목민의 침략을 대비해 쌓았으며 현존하는 만리장성은 명나라 후반기에 축조됨)도 멸망의 원인 중 하나였다. 사상 유례 없는 대토목공사로 백성들의 반발이 거세졌다. 전국적으로 반란이 번지면서 진시황 사후 진나라는 대혼란에 빠졌다. 이때를 틈타 진나라를 멸망시킨 초나라 장수 항우가 병마용갱이 있는 곳도 불살랐다. 항우는 토형들이 들고 있던 무기를 약탈하고 불 질렀다. 이로서 병마용갱은 불길과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 황하 문명, 진나라가 몰락한 이후에도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룽먼석굴(허난성 뤄양시에 위치)도 그 중 하나다. 400년에 걸쳐 제작된 룽먼석굴은 붉은 바위산 전체가 2,345개의 석굴과 11만여 개의 불상으로 덮여 있다. 화려한 문화를 꽃피운 황하. 그 중심엔 문자가 있다. 3,300년 전 은나라의 갑골문자는 30억 인구가 사용하는 한자로 발전했다. 글자 속에는 황하의 지혜와 철학이 담겨있다. 지금도 갑골문자의 비밀을 풀기 위한 연구는 진행 중이다. 현재까지 발견된 갑골은 약 17만편, 여기에 사용된 글자는 5,000여자에 이르지만 그 가운데 확실히 해독된 글자는 1,000여자에 불과하다. 3천 년 전 거북의 껍질 속에 쓰여진 글자. 이 글자는 긴 세월동안 끊임없이 진화했다. 사물의 특징을 그림 그리듯 글자로 형상화한 갑골문자는 시간이 흐르면서 단순화되었다. 동물의 모양을 본따 글자를 만들고, 그 형태를 살려가면서 수천 년간 진화해 온 갑골문자. 갑골문자는 오늘날 한자의 원형이 되었다. 한자는 다양한 서체로 변형되면서 글자 자체가 미학적인 예술로 주목받고 있다. 거북의 껍질 안쪽에 쓰여 있던 3,300년 전의 기록이었던 갑골문자. 그 속에 지혜와 철학을 담아낸 황하 문명. 대륙의 동서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황하는 오늘도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