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곳에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 있다"는 설명이 없다면 누구나 그냥 발길을 돌릴 듯 하다.
예전에 '이궐(伊闕)'이었던 지명이 수나라 때부터 '용문(龍門)'이라 불린다. 산 사이 협곡으로 용이 드나든다는 것이다.
허난(河南)성의 성도인 정주(鄭州)에서 서남쪽으로 140km 떨어진 곳에 '중국의 7대 고도' 뤄양(洛陽)이 있고, 다시 뤄양에서 남쪽으로 14km 지점에 '대동 운강석굴(大同 雲崗石窟)' '돈황 막고굴(敦煌 莫高窟)과 함께 중국의 3개 석굴인 용문석굴이 있다.
'용문'이란 편액이 붙어 있는 석공교(石拱橋)의 굴다리를 지나면서 '불상의 동굴'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왕지(禹王池)를 지나면 잠계사(潛溪寺)다.
용문산 북쪽 끝자락에 있는, 높이와 폭이 각각 9m인 가장 큰 굴이다. 약 1300여 년 전 당나라 초기에 건축됐다. 천정에 커다란 연꽃을 조각해 놓았다. 한복판의 아미타불 좌상은 표정이 온화하고, 살짝 솟아오른 가슴 앞으로 가사 자락이 흘러내리는 형상이다. 왼쪽에는 제자 가섭(加葉), 오른쪽에는 아난(阿難)이 부처님을 보필하고 있다.
2000년 11월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용문석굴은 이강을 따라 약 1.5km에 걸쳐 있다. 북위 때인 5세기 말부터 당나라 때인 9세기까지 주로 조성됐다. 2300여개의 석굴을 파고 그 속에 불상과 법문, 탑을 새겨 놓았다. 불상만 총 10만여 점이 넘는 엄청난 규모다.
잠계사 다음은 빈양삼동(賓陽三洞). 북위 시대를 대표하는 동굴이다.
선무제(宣武帝)가 아버지 효문제(孝文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무려 80만2366명을 투입해 서기 500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24년 만에 가운데 굴을 먼저 완공했고 남동, 북동은 초당(初唐)이 돼서야 공사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결국 궁중 정변의 원인이 됐고, 공사 책임자였던 유등(劉騰)이 병사하는 등 악연이 이어졌다.
'빈양'은 태양을 맞이한다는 뜻이다. 동이 트고 붉은 태양이 떠오르면 가장 먼저 햇살을 품는 동굴로서 모두 11개의 대형 불상이 모셔져 있다.
권력을 가진 자들은 힘 없는 백성의 노동을 수단으로 삼았다. 그러나 백성들은 예나 지금이나 힘겹고 어려워도 절대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강을 따라 용문석굴의 크고 작은 불상들을 보노라면 만감이 교차하기 마련이다. 중간쯤 걷다보면 눈길을 사로잡는 작은 불상이 하나 있다.
뺀질뺀질하다. 손때가 잔뜩 묻은 탓이다.
오가는 이들이 머리를, 얼굴을 쓰다듬다보니 시나브로 공 들여 관리한 것처럼 윤기가 흐른다. 행운을 기원한 것이다.
용문석굴은 거대한 불상과 함께 손바닥 안에 쏙 들어올 듯 한 작은 부처가 수없이 많다.
반 이상은 목이 잘린 형상이다. 부처의 두상을 지니고 있으면 복이 오고, 액운을 막을 수 있다는 속설이 퍼지면서 일어난 일이다.
여기에다 근대 이후 도굴과 대륙을 휩쓸고 간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우상 파괴'라는 명분으로 이곳 저곳의 불상을 부셔 버렸다.
아픈 상처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머리가 잘리고, 팔이 달아나고, 귀가 떨어지고, 코가 뭉개졌다.
어떤 것은 시멘트로 붙여 놓았고, 심하게 무너져버린 벽면에는 벽돌을 층층이 쌓아올렸다.
용문석굴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역시 봉선사(奉先寺)다. 가장 크고, 예술성이 뛰어난 마애불이 연꽃 위에 앉아 이강을 굽어보고 있다. 좌대의 한 켠에 '커다란 노사나불상이 있는 감실(大盧舍那像龕)'란 기록이 있다. 이 불상은 당시 황실의 제례를 관장하는 절에 귀속된 것이었고, 이에 절 이름도 자연스레 '봉선사'라 부르게 됐다.
노사나불(비로지나불)은 불지(佛智)의 광대부변함을 상징하는 화엄종의 본존불로서 봉선사에는 높이 17.14m, 머리 4m, 귀 1.9m에 이르는 초대형으로 만들어져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긴 귀를 어깨 근처까지 늘어뜨린 채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좌우로 부처의 제자로서 나이 들어 입문했지만 진중했던 가섭과 온순하며 총명했던 아난, 자긍심 강하고 귀티 나는 모습의 보살(菩薩), 영웅호걸의 풍격을 지닌 천왕(天王), 기세등등한 역사(力士) 등 총 9개의 석상이 풍부한 질감과 조형성, 조화미를 지닌 예술품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폭 35m의 커다란 감실에 만들어진 노사나불 등 조각상들을 보호하기 위해 송, 금 시대 사람들은 목조 건축물을 설치했다. 그러나 이 건축물이 불상의 통풍에 악영향을 주면서 풍화가 가속화돼 결국 건축물을 제거했다.
노사나불을 바라보며 왼쪽에 새겨진 천왕과 역사의 머리는 날카롭게 절단된 채 사라졌고, 그 위쪽으로 훼손된 석벽은 벽돌로 쌓아 놓았다. 노사나불 바로 오른쪽에 서있는 제자 아난의 머리로 누군가의 손에 의해 훼손된 채 관람객을 맞고 있다.
석굴은 또 이어진다. 봉선사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오면 가장 오래된 동굴인 고양동(古陽洞)을 만난다. 경전을 써내려간 글씨들의 가치가 높어나다. 규모가 클 뿐 아니라 기세가 장관이다. 동굴의 북벽에는 해서체로 '고양동'이라 새겨 놓았다.
이밖에 동굴 입구의 양쪽에 부조로 1만5000개의 부처을 질서정연하게 배열해 놓은 만불동(萬佛洞)은 전실과 후실로 나뉜 구조를 만들었다. 전실에는 2명의 역사와 2마리의 사자, 후실에는 1불 2제자 2보살 2000왕(一佛 二弟子 二菩薩 二天王)을 조각했다. 천정은 아름다운 연꽃을 수놓았다.
불교의 상징인 대형 연꽃을 천정에 새기고, 꽃 주변에는 비천상(飛天像)을 아로새긴 연화동(蓮花洞)과 동굴 입구에 당나라 때의 모든 약제법을 새겨 놓은 약방동(藥方洞)까지 하나하나 모두 불교 예술의 극치를 보여준다.
인간은 수천년 전부터 위대한 예술을 만들고, 파괴했다.
용문석굴은 워낙 많은 불상을 지녔던 덕에 일부만 훼손되고, 다행스럽게도 혼과 기가 남아 있는 나머지들은 대대로 이어지고 있다.
강 건너 향산 비파봉(琵琶峰)의 백원(白園)에는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잠들어 있다. 일생 동안 술을 즐기며, 시를 사랑하고, 청빈하게 살다간 백거이는 노년을 '용문'에서 보냈다. 향산사(香山寺)를 개보수하고, 수많은 불상이 점점이 박혀 있는 이강 건너편의 바위벽을 바라보며 시심에 잠겼다. '향산거사'로 불리던 백거이는 74세 때 구로당(九老堂)에선 '향산구로회'를 열만큼 이 곳을 사랑했다.
백거이에 앞서 향산사는 측천무후(則天武后)와 인연을 맺는다.
측천무후는 1300여년 전, 690년 당나라 예종을 폐위하고 자신을 황제라 칭한 뒤 나라 이름도 '서주(西周)'라 바꾸고 장안에서 신도(信都, 현 낙양)로 천도한다. 이궐의 산수를 즐겼고, 특히 청유아치(淸幽雅致)의 풍격을 지닌 향산사를 좋아해 이 곳의 석루(石樓)에서 '용문시회'를 열곤 했다.
'당시기사(唐詩紀事)'는 '무후가 용문을 유람할 때 군신들에게 부(賦)나 시(詩)를 짓도록 명했다. 먼저 완성한 자에게 비단을 하사했다'고 적고 있다. '대당전재(大唐傳載)'에 기록된 '향산부시탈금포(香山賦詩奪錦袍)'란 시구와 통하는 글이다.
세월이 흘러 청나라 때는 건륭제(乾隆帝)가 향산사를 찾았다. 건륭 15년(1750년) 9월, 향산사를 칭송하는 시 2편을 남겼다. 첫째 구절에서 '용문범십사 제일수향산(龍門凡十寺 弟一數香山)'라 노래했다. 이 시는 '어비정(御碑亭)'에 남아 전해지고 있다.
국민당 정부도 1933년 남경에서 낙양으로 이전한다. 1936년 장제스는 향산사의 남쪽에 지어놓은 2층 누각에서 50세 생일잔치를 열었다. 지금도 '장송별장(張宋別墅)'이라 불린다.
대륙의 젖줄, 황하의 지류인 이강은 흐른다. 수많은 백성의 고혈 덕에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는 10만여 불상 곁을 흐르고 있다.
석벽에 붙어 돌을 깎고 다듬느라 땡볕을 참아내고, 칼바람을 이겨냈던 석공들의 넋은 점점이 불상에 박혀 '세계문화유산'이 됐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은 돌조각이 되어 산산이 흩어져 사라진지 오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