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이조 지음 / 이상천 옮김 《당국사보(唐國史補)》, 학고방출판사, 2006.
사고전서 개요(四庫全書提要)
《당국사보(唐國史補)》세 권은 당(唐)나라 이조(李肇)가 지었다. 이조가 지은 《한림지(翰林志)》에도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그가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郎中)으로 있을 때 지은 것이다. 책에는 개원(開元) 연간부터 장경(長慶) 연간까지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는데, 유속(劉餗)의 소설을 이어 지은 것이다. 상권과 중권은 각각 103조목, 하권은 102조목으로 되어 있고 조목마다 다섯 자로 된 표제가 붙어 있다. 기록된 것을 보면 왕유(王維)가 이가우(李嘉祐)의 수전백로(水田白鷺) 구절을 절취했다고 한 것과 같은 것은 지금 전하는 이조의 문집에는 없다. 또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 한 조목을 기록하고 있는데 심괄(沈括)도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또 이덕유(李德裕)가 청렴하고 곧은 성품으로 파당을 짓지 않았다 하고, 육지(陸贄)가 이조에게 모함을 당했다고 한 것은 사실과 다르며, 모두 잘못 기록한 것이다. 그러나 장순(張巡)이 이한(李翰)의 전을 취했다고 논하고, 좌진(左震)․이견(李汧)․이이(李廙)․안진경(顔眞卿)․양성(陽城)․귀등(歸登)․정인(鄭絪)․공규(孔戣)․전포(田布)․추대징(鄒待徵)의 아내․원재(元載)의 딸에 관한 여러 가지 기록들은 모두 풍속의 교화에 도움이 된다. 또 이주(李舟)가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는 말, 양씨(楊氏)와 목씨(穆氏)의 형제와 손님에 관한 말들은 모두 밝은 이치가 들어있다. 마지막 권에 여러 가지 전고 및 하마릉(下馬陵)․상부련(相府蓮)의 의미를 언급한 것은 고증과 증거에 의한 것이다. 나머지는 도박의 일종인 저포희(摴蒱戲)에서 노패(盧牌)와 치패(雉牌)의 교훈으로 유유(劉裕)의 일을 풀이 할 수 있고, 검남(劍南)지방의 소춘(燒春)이라는 술의 유명함으로 이상은(李商隱)의 시를 풀이할 수 있다. 취할 수 있는 것이 똑같지 않아도 충분하다. 자서(自序)에 이르기를 “인과응보를 말하는 것, 귀신에 관해 서술한 것, 해몽을 구한 것, 규방 일에 가까운 것들은 다 제거하였다. 사실을 기록한 것, 물리를 탐구한 것, 의혹을 변별하는 것, 권장과 훈계를 보여주는 것, 풍속을 채록한 것, 담소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기록하였다”고 하였다. 구양수(歐陽修)가 귀전록(歸田錄)을 쓸 때 자칭 이 책을 기준으로 삼았다고 한 것은 그 체제에 취할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唐國史補三卷, 唐李肇1)撰. 肇有翰林志, 已著錄. 此書, 其官尙書左司郎中時所作也. 書中皆載開元至長慶間事, 乃續劉餗2)小說而作. 上卷中卷各一百三條, 下卷一百二條, 每條以五字標題, 所載如謂王維3)取李嘉祐4)水田白鷺5)之聯, 今李集無之. 又記霓裳羽衣曲6)一條, 沈括7)亦辨其妄. 又謂李德裕8)淸直無黨, 謂陸贄9)誣于公異, 皆爲曲筆. 然論張巡則取李翰之傳, 所記左震․李汧․李廙․顔眞卿․陽城․歸登․鄭絪․孔戣․田布․鄒待徵妻․元載女諸事, 皆有裨於風敎. 又如李舟天堂地獄之說, 楊氏穆氏兄弟賓客之辨, 皆有名理. 末卷說諸典故, 及下馬陵10)․相府蓮11)義, 亦資考據. 餘如摴蒱盧雉之訓, 可以解劉裕12)事; 劍南13)燒春之名, 可以解李商隱14)詩. 可採者不一而足. 自序謂: “言報應, 敍鬼神, 徵夢卜, 近帷箔, 則去之. 紀事實, 探物理, 辨疑惑, 示勸戒, 採風俗, 助談笑, 則書之.” 歐陽修15)作歸田錄16), 自稱以是書爲式, 蓋於其體例有取云.)
1) 이조(李肇): 당나라 사람으로 원화(元和) 연간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중서사인(中書舍人)에서 장작소감(將作少監)으로 좌천되었다. 저서로는 《한림지(翰林志)》․《당국사보(唐國史補)》가 있다. 《사고제요(四庫提要)》79에 보인다.
2) 유속(劉餗)은 당나라 사람으로 유황(劉貺)의 아우이다. 자(字)는 정경(鼎卿), 관직은 우보궐(右補闕)에 이르렀다. 저서로는《사례(史例)》․《전기(傳記)》․《악부고제해(樂府古題解)》가 있다. 《구당서(舊唐書)》102와 《신당서(新唐書)》132에 보인다.
3) 왕유(王維): 당나라 기(祁)땅 사람이다. 자는 마힐(摩詰), 개원(開元) 연간에 진사(進士)에 급제하면서부터 관직이 상서우승(尙書右丞)에까지 이르러 세칭 왕우승(王右丞)이라고 하였다. 시서(詩書)에 능했는데 특히 그림에 뛰어나 세칭 “시 안에 그림이 있고, 그림 안에 시가 있다”고 하였다. 저서에 《망천집(輞川集)》이 있고, 《신당서》202와 《구당서》190에 보인다.
4) 이가우(李嘉祐): 당나라 조주(趙州) 사람이다. 자는 종일(從一), 천보(天寶) 연간에 급제하여 비서정자(祕書正字)에 제수되었다. 사건에 연루되어 파강령(鄱江令)으로 폄적되었다가 강음(江陰)으로 좌천되었으나 후에 중대령(中臺令)으로 들어간다. 엄유(嚴維)․유장경(劉長卿)․냉조양(冷朝陽) 등과 친하게 교유하였다. 시는 아름답고 부드러워 제량풍(齊梁風)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기사(唐詩紀事)》21과 《전당시(全唐詩)》7에 보인다.
5) 수전백로(水田白鷺): 왕유의〈장마철에 망천장에서(積雨輞川作)〉라는 작품에 나오는 구절이다.
積雨空林煙火遲, 장마철에다 쓸쓸한 산중이라 밥짓기도 더딘데,
蒸藜炊黍餉東菑. 명아주 국에 기장밥 지어 동쪽 밭에서 점심을 드네.
漠漠水田飛白鷺, 질펀한 무논에선 해오라기 떼들 날아오르고,
陰陰夏木囀黃鸝. 음산한 여름비에 우거진 숲 속엔 꾀꼬리 노래하네.
山中習靜觀朝槿, 산중에서 조용히 습관처럼 아침 무궁화 들여다보고,
松下淸齋折露葵. 소나무 밑에서 목욕재계하며 이슬 맺힌 아욱도 뜯네.
野老與人爭席罷, 초야의 이 늙은이는 남들과 자리다툼질 끊었는데,
海鷗何事更相疑. 어찌하여 저 바다갈매기는 아직도 나를 의심하는고.
송(宋) 섭몽득(葉夢得)의 《석림시화(石林詩話)》상권 “당나라 사람들이 ‘무논에선 해오라기 날고, 여름철 우거진 숲 속에 꾀꼬리 노래하네(水田飛白鷺, 夏木囀黃鸝)’는 이가우의 시인데, 왕유가 그것을 표절했다고 기록했는데 잘못된 것이다. 이 두 구의 뛰어난 점은 바로 막막(漠漠)과 음음(陰陰) 넉자를 더했다는 것에 있다. 이것이 바로 왕유가 이가우에 의해 변화된 것으로써 그 절묘함을 잘 나타내고 있다[唐人記‘水田飛白鷺, 夏木囀黃鸝’爲李嘉祐詩, 王摩詰竊取之, 非也. 此兩句好處, 正在添漠漠陰陰四字, 此乃摩詰爲嘉祐點化, 以自見其妙]”.
6) 당의 악곡명으로 본래는 바라문의 곡이었는데, 서량(西涼)에서 전래되었다. 당 하서(河西)절도사 양경술(楊敬述)이 바쳤는데, 현종(玄宗)이 그 사(詞)를 윤색하면서 유명해졌다. 《당서(唐書)․예악지(禮樂志)》에 하서절도사 양경술이 예상우의곡 12편(遍)을 바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7) 심괄(沈括): 송나라 전당(錢塘) 사람이다. 가우(嘉祐) 연간에 진사에 급제한 이후 신종(神宗) 때 태자중윤(太子中允)에 임명되면서 여러 관직을 두루 섭렵하고 광록소경분사거윤(光祿少卿分司居潤)으로 생을 마친다. 박학하고 문장에 뛰어나 천문․방지(方志)․율력․음악․점복 등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저서로는 《장흥집(長興集)》․《몽계필담(夢溪筆談)》․《소심양방(蘇沈良方)》등이 있다. 《송사(宋史)》331․《송사신편(宋史新編)》109․《동도사략(東都事略)》86․《경구기구전(京口耆舊傳)》1에 보인다.
8) 이덕유(李德裕): 당나라 찬황(贊皇) 사람이다. 이길보(李吉甫)의 아들로서 자는 문요(文饒)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남다른 지조가 있었다. 경종(敬宗) 때 절서관찰사(浙西觀察使)가 되었다. 문종(文宗) 때 배도(裴度)가 그에게 재상이 될만한 재능이 있다고 여겨 추천하였으나 우승유(牛僧孺) 등의 시기로 인해 무산되었다. 무종(武宗) 때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에서 재상으로 임명되었다. 선종(宣宗)이 즉위한 후 시기하는 자들에 의해 모함을 받아 폄적되어 죽었다. 저서로는《차류구문(次柳舊聞)》․《회창일품집(會昌一品集)》이 있다.《신당서》180․《구당서》174에 보인다.
9) 육지(陸贄): 당나라 가흥(嘉興)사람으로 18세에 진사에 급제하였다. 후에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가 되었지만 모함을 받아 충주별가(忠州別駕)로 폄적되어 죽었다. 시호가 선(宣)이다. 저서로는《육의공한원집(陸宜公翰苑集)》이 있는데, 그의 주의(奏議)류의 문장이 특히 유명하다. 《구당서(舊唐書)》157․《신당서(新唐書)》139에 보인다.
10) 하마릉(下馬陵): 지명이다. 옛날에 동중서(董仲舒)의 묘문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말에서 내렸기 때문에 그것을 하마릉이라고 했는데, 후인들에 의해 하마(蝦䗫; 蟆라고도 함)릉으로 와전되기도 한다. 능은 현재 섬서성 장안현 성남(城南)에 있다.
11) 상부련(相府蓮): 악부(樂府)의 근대곡사(近代曲辭)명이다.
12) 유유(劉裕): 남조(南朝) 송(宋)의 무제(武帝)를 말한다. 팽성(彭城) 사람인데, 단도(丹徒)현으로 옮겼다. 자는 덕여(德輿)이고, 어릴 때의 자는 기노(寄奴)이다. 처음 진(晉)에 벼슬하여 하비(下邳) 태수가 되었고 팽성내사(彭城內史)로 옮겼다. 환현(桓玄)이 진을 찬탈하자 유유는 기병하여 그를 토벌하고 안제(安帝)를 맞이하여 진의 왕실을 부흥시켰다. 송공(宋公)에 봉해지고 또 남연(南燕), 후연(後燕), 촉(蜀), 후진(後秦) 등 여러 나라를 멸하고는 상국(相國)이 되었다. 의희(義熙) 14년에 안제를 시해하고 공제(恭帝)를 세우고는 송왕(宋王)에 봉해졌다. 이후 선양을 받아 국호를 송이라 하고 공제를 폐하여 영릉왕(零陵王)으로 만들고는 그 다음해에 시해하였다.
13) 검남(劍南): 당의 도(道) 이름으로 정관(貞觀) 연간에 설치했는데,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성도현(成都縣)이다.
14) 이상은(李商隱): 만당(晩唐) 때의 시인으로 자는 의산(義山)이고 호는 옥계생(玉溪生)이다. 우승유(牛僧孺)가 이끄는 당(黨)의 영호초(令狐楚)의 눈에 띄어 막부(幕府)의 순관(巡官)을 지냈다. 문종(文宗) 개성(開成) 2년(837)에 영호초의 아들 영호도(令狐綯)의 천거로 진사가 되었다. 이후 교서랑(校書郞), 홍농위(弘農尉), 비서성정자(秘書省正字)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우승유 일파의 냉대로 계속 외직으로 떠돌며 막료생활을 하다 객사하였다. 그의 문집은 이미 산실되고 《옥계생시(玉溪生詩)》가 전한다. 후인들에 의해 편집된 《번남문집(樊南文集)》과 《번남문집보편(樊南文集補編)》이 있다. 동 시대의 두목(杜牧)과 “소이두(小李杜)”로 병칭된다.
15) 구양수(歐陽修): 북송(北宋)의 문학가, 사학가, 정치가였다. 자는 영숙(永叔), 자는 취옹(醉翁)이었으며, 만년에는 육일거사(六一居士)로 불렸다. 인종(仁宗) 천성(天聖) 8년(1030)에 진사 급제 후 우여곡절 끝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사관수찬(史館修撰)이 되어 송상(宋庠) 등과 더불어 《신당서(新唐書)》편찬에 참여했다. 만년에 보수적으로 기울어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에 반대했다. 《구양문충집(歐陽文忠集)》153권에 부록 5권이 전한다.《신오대사(新五代史)》74권을 편찬하였다. 젊어서 당대(唐代) 한유(韓愈)의 유고를 얻어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북송 시문 혁신의 우두머리였다. 지공거(知貢擧)에 있을 때 소순(蘇詢) 부자와 증공(曾鞏), 왕안석이 그의 문하에서 나왔다. 그의 《육일시화(六一詩話)》는 시론에 대해 시화라는 형식을 개척해 후세 시가 발전의 촉진작용을 했다.
16) 귀전록(歸田錄): 이 책에는 조정의 일화와 사대부의 해학적인 말이 많은데, 대개 평소에 손닿는 대로 써놓은 것을 관직에서 물러난 뒤 엮어 만든 것이라 전원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의 “귀전(歸田)”이라고 이름지었다. 《직재서록해제(直齋書錄解題)》에서 이르기를 “공이 자서에서 말하기를 ‘귀전록’이란 조정에서 남긴 사적, 사관이 기록하지 않은 일, 사대부가 담소하던 여담에서 기록할 만한 것을 기록한 것으로 한가로이 있을 때의 볼거리를 마련한 것”이라고 하였다. 통용되는 판본으로는 《패해(稗海)》본․《학진토원(學津討原)》본․《사부총간(四部叢刊)》본․《사부비요(四部備要)》본이 있고, 《구양문충공전집(歐陽文忠公全集)》에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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