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中國風景

(2) 中역사를 뒤바꾸는 땅, 시안(西安)

마장골서생 2009. 7. 29. 20:32

(2) 中역사를 뒤바꾸는 땅, 시안(西安)

 

 

이천여년 동안 깊은 밤에 빠져 있던 '지하 군단'이 다시 움직인다.


'쿵~쿵~쿵~'


지축을 흔들며 천하를 통일하던 진(秦)나라의 용맹스런 장수와 병사들, 마차들의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땅이 흔들린다. 흙 먼지가 일고, 전열을 정비한 사병들이 전진한다. 활시위를 당기고, 창을 앞세우고 거침없이 나간다.

 

 

중국 대륙의 시안(西安)으로 세인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장안대로에서 35km 떨어진 산시(陝西) 린동(臨潼)구의 동쪽, 리산(驪山) 자락에 있는 진시황릉 병마용 1호갱에서 지난 1985년 2차 발굴 이후 24년 만에 3차 발굴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사상 유례없이 '세계 8대 기적'이라 일컬어지는 유적지를 중국의 '문화유산일'이던 지난 13일부터 관광객들에게 공개한 채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과연 어떤 유물이 나올까. 발굴단은 다섯가지 발견을 기대하고 있다.


첫째 정교하고 아름다운 채색용, 둘째 진나라 병기인 '극'(戟ㆍ긴 막대 끝에 청동이나 철기로 뽀족한 끝을 만들고, 한쪽은 초생달 모양의 날카로운 날을 세운 고대 병기), 셋째 군사용(軍師俑), 넷째 외국인의 용모를 한 도용, 다섯째 푸른 얼굴색을 한 도용 등이다.

 


누구나 병마용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란다.


살아 있는 사람 같은 도용들이 열병하듯 서있지만 표정이나 모양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고고학이나 역사학적 가치 외에도 조형미와 공예미까지 두루 갖췄다.


'관광 깃발'을 따라 휙 돌아보지 말고, 여유롭게 천천히 하나 하나 감상해보면 '대단하다'는 감탄사만 나오리라. 머리 모양이 다르고, 갑옷이 다르고, 표정이 제각각이고, 맡은 임무에 따라 자세까지 각양각색이다.


1978년부터 1984년까지 실시한 1호갱 1차 발굴 때 1087점의 도용이 출토됐고, 2차 발굴이었던 1985년에는 기술과 설비가 불완전해 단 1년만 발굴을 진행했다.


그리고 그사이 독일과 손잡고 채색 도용의 처리 기술을 연구 개발해 이젠 발굴 현장에서 직접 색을 보존할 수 있게 되자 3차 공개 발굴에 들어간 것이다.


전문가들이 추산하는 1호갱의 총 매장 도용은 6000여점. 대부분 지하에 묻혀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진시황릉 병마용' 역시 우연히 세상 밖으로 알려졌다.


1974년 3월 리산의 북쪽 산자락에 있는 시양(西楊)촌에 사는 농부는 우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마을 남쪽으로 160m 정도 떨어진 감나무 밭 옆에서 우물을 팠다. 3m쯤 파들어 갔을 때 불로 구워 만든 덩어리가 나왔고, 좀 더 깊이 파다 병마용을 발견했다.


곧바로 관청에 신고했고, 정밀 조사 결과 이 곳에서 발견된 기와 조각과 진시황릉 부근에서 발견된 진나라 때 기와가 똑같아 2000여년 동안 잠자던 진나라 병사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병마용은 1호갱 외에 전차병, 기마병, 보병이 혼재돼 있는 2호갱과 4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 청동병기 등이 출토된 3호갱으로 나뉜다.

 

1호갱은 1979년 10월 정식으로 개방됐고, 이제 개방 30년을 맞았다. 놀라운 발견은 계속될 것이다.


진시황릉과 병마용은 1987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시안은 중국 역사에서 주(周) 진(秦) 한(漢) 당(唐) 등 13개 왕조의 73명 황제가 1062년 동안 도읍으로 삼았던 곳이다. 가는 곳마다 역사 유적이요, 보는 것마다 보물이다.


절세미녀 양귀비와 당 현종의 '러브스토리'가 전해지는 곳이자 '실크로드'의 출발지답게 예로부터 불교와 이슬람교 등 다양함이 공존하는 국제도시로도 유명하다.


당나라 때부터 서역과의 교류가 활발했고, 다양한 인종들이 드나들었다. 지금도 회교도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거리에 가면 양고기 굽는 냄새와 하얀 모자를 쓴 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리산 기슭의 화청지(華淸池)는 원래 온천욕장. 현종은 양귀비와 더불어 이곳에 머물며 온천욕을 즐겼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정돈된 물길이 아직도 남아 있고, 누각 벽에는 사랑 이야기를 바탕으로 엮어낸 수묵화가 둘러쳐 있다.

 


화청지의 옆으로는 중국 근대사를 확 바꿔놓은 '서안사변(西安事變)'의 현장, 오간청(五間廳)이 있다.


1936년 12월 중국 공산당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를 잡는다. 마오쩌둥(毛澤東)과 공산당 잔존 세력을 완전하게 소탕하기 위해 국민당의 실권자 장제스(張介石)가 시안에 온다. 이 곳에서 만주 군벌 장쉐량(張學良)을 만나 지원을 요청할 생각이다.


그러나 사태가 급변한다. 12월12일 한밤 중에 오간청에서 장쉐량은 장제스에게 총구를 겨누고 체포한다. 1931년 장제스의 명령에 따라 일본군이 만주를 점령할 때 항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결국 장제스는 먼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공산당과 통일전선을 결성하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한 뒤 성탄절에 석방된다.


'12ㆍ12 쿠테타'가 없었다면...


신(新) 중국에서도 시안은 늘 남다른 의미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