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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위에 굴림하였던 환관 조고

마장골서생 2009. 7. 2. 13:05

황제 위에 굴림하였던 환관 조고

 환관 조고 (趙高 ?∼BC 207).....그는 원래 조趙나라 왕족의 먼 친인척중 한명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조나라가 진나라에 의해 기원전 228년 멸망함으로써, 그의 어머니는 사형당하고 그와 형제들은 모두 환관이 되는 비운을 겪기도 하였다. 그런데 시황제는 그가 법가사상에 익숙하고 근면성실하다는 말을 듣고 그를 등용하니, 국가패망과 멸문지화의 비극이 오히려 조고에게는 기회가 되었다.

 중거부령(中車府令)의 직책으로 시황제의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어려서 부터 가르치며 돌보게 되었다. 따라서 호해에게 그의 말은 절대적인 진리나 다름없었다. 특히 그는 시황제의 강력한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옥새를 관리하는 일도 도맡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진나라 멸망을 초래하게 되는 대 사건이 발단이 되었으니, 중국을 통일한 시황제는 진나라 멸망의 씨앗을 뿌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BC 209년 시황제가 순행길에 사망하자, 조고는 시황제의 사망사실을 일체 함구한 후 남은 여정을 강행하였다. 또한 그의 손에 옥새가 있는 점을 이용하여 시황제를 대리하여 각종 결재까지 하였다. 그리고 시황제의 시신을 도읍 함양에 안치한 후에는 호해왕자와 승상 이사를 적극설득하여 장남 부소(扶蘇)와 몽염장군을 제거하는 계획에 합류시켰다.

  이어 시황제의 서안을 조작, 부소왕자와 몽염자결에게 자결하라는 명을 내렸으며, 부소왕자가 자결하자 호해의 제2황제 즉위식을 단행하였다.
 이후 황제의 명령을 빌어 몽염장군및 부소왕자를 지지하던 12명의 왕좌와 10명의 공주를 모두 공개처형해 버렸다.
 조고는 이처럼 혹독한 법을 시행함에 앞서
 "
현명한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법을 엄격하게 하고 처벌을 혹독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자는 연좌제를 적용하고 모든 일가 친척을 줙여 없애고 궁중에는 대신들을 없애며 폐하의 가족까지 멀리 하셔야 됩니다."
 라며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시켰다.

  어려서부터 오직 조고의 말만 들어왔던 2세황제역시, 전적으로 조고의 말을 믿었으며 심지어 모든 법집행을 조고에게 맡겼다. 따라서 조고는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장악하였으며, 다만 법률안 재정에 있어서는 황제의 도장만 받으면 그뿐이었다.

 조고의 손에 전권을 웅켜쥐게 되자, 처음에 강법이었던 진나라의 법집행은 점차 악법으로 바뀌어 갔으며, 여기에 아방궁 공사재개와 황제 전용 도로 건설등 각종 무거운 세금이 내리지게 되었다. 세금이 정도도 너무나 무거워 졌지만 지금으로 말하자면 쓰레기 불법투기 정도의 범죄에도 귀나 코를 배는 무시무시한 법률을 적용하였다.

 따라서 각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지만, 온실속의 화초에 불과한 2세황제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다.  2세황제 재위 때 일어난 반란 중 가장 대규모의 반란은 진승과 오광이 중심이 된 반란이었는데, 그들 역시 만리장성 축조 부역에 동원되었다가, 폭우등으로 인해 도착기일이 연기되는 것이 불가피해져 부역에 동원된 사람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
 만약 기일내에 도착하지 못하면, 이유가 무엇이던 인원이 몇만명이던 상관없이 모조리 생매장 당하였기 때문이다.

 강법 일변도의 엄벌주의와 전국 어느 곳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반란은 분명 국가패망을 재촉하는 것이었다. 진시황제와 함께 중국을 통일한 주역인 이사는 이대로 진나라가 패망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어 몇차례나 2세황제에게 조언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고의 견제로 그 기회를 잡기도 힘들었을 뿐더러, 설령 기회를 잡아도 2세 황제는 그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이사의 아들 이유가 진승과 오광의 반란 진압에 실패하자, 문책을 피하기 위해 황제에게 아첨하는 글을 올려야만 했다.

 "..가벼운 죄를 무겁게 다스리는 것은 명군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백성들이 죄를 짓게 되는 근본을 엄히 다스리지 못하는 군주가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근검을 실천하고 어질고 의로운 자가 조정에 있으면 군주는 마음껏 쾌락을 추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군주는 근검한자와 직언을 하는 자 의로운자를 멀리하고 홀로 법을 시행해야만 그 지위도 존귀해 지는 것입니다."

   그 글을 읽은 2세황제는 매우 만족하여, 그 이후 더욱더 혹독하게 법을 적용하고 세금을 징수하였다. 그리하여 길거리에는 굶어 죽거나 벌을 받아 죽은 시신이 널려 있었으며, 걸어다니는 사람중에는 귀를 잘리거나 손목을 잘린 사람이 반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참담한 광경을 목격하면서도 2세황제는 "참으로 감독이 잘되고 있구나."라며 오히려 집행관을 칭찬할 정도였다. 그러니 과연 어려서 부터 주입식 교육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한편 조고는 자신의 숙적이었던 이사를 제거할 방법을 궁리하던 중, 이사가 황제에게 아첨하는 글을 올렸다는 소식을 듣자 절묘한 계략을 생각해 냈다.
 그는 우선 이사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진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남아있다는 점을 간파하였다. 따라서 이사에게 진나라가 처한 현실에 대해 황제에게 직언을 해야 한다고 부축였다.  그리고는 황제의 곁에서 연일 미인들을 부르고 술잔치를 열었다. 평소에 쾌락과 유흥을 즐기던 2세황제는, 유흥이 깨뜨리는 일을 매우 실어했다. 그런데 조고는 의도적으로 흥이 절정에 이를 무렵 이사에게 연락하여 직언을 아뢰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고는 승상의 신분이었던 이사가 반란군과 내통하고 있다는 내용의 비방을  황제에게 아뢰었다.  이사에 대한 감정이 매우 안좋아 있던 황제는 즉시 반란군과 내통혐위를 조사하도록 명하였다.
 하지만 이사역시 그대로 당할 수만은 없었다. 그는 황제와 접견한 자리에서 조고야 말로 반역의 행동을 일삼고 있으며, 본래 비천한 신분으로 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탐욕스러우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있다며 반격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일방적으로 조고의 편을 들어 주었다. 그리고 이사의 내통혐위에 대해 조고가 전임하여 조사하도록 하였다. 진시황제의 수족이었던 두 사람의 승부는 사실상 끝난 것이다.
 중국통일의 주역이었던 이사가 환관의 세치혀에 농락당하여, 하루아침에 국가모반 공모죄로 사형수가 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죽음을 피할 수 없게 되자, 이사는 마침내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울분을 토해 내었다.

 "내 지혜는 옛 성인에 미치지 못하나, 2세황제는 그 어느왕보다 무도하다. 따라서 내가 죽임을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나 세상이 크게 어지럽게 될 것이니 그것이 걱정이다.
 2세 황제는 형제를 죽이고도 죄를 반성하지 않고 충신을 살해하고도 죄를 뉘우치지 않으며, 대규모 궁궐을 지으면서 백성들을 핍박하고 있다.
 이 세가지 일만으로도 천하의 인심은 이반되니 벌써 반역의 무리가 천하의 반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
 
 이어서 그는 자신이  반란군의 반드시 함양을 함락시키고 진나라를 멸망시킬 것을 볼 것이라 장담하였다. 이런 독설로 인해 이사는 물론 그 가족들도 모두 모반죄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옥 중에 갇힌 이사는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결국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거짓 자백을 하고 말았다.
 이렇게 무고에 의해 반역자가 되어버린 이사는 오형(메를 치고 코, 귀, 혀, 다리를 자르는 5가지 형벌)을 시행한 후 허리를 잘라 죽이는 요참형에 처해졌다.

 조고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인 이사마저 죽었으니, 이제 조고의 전횡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환관에 불과하였던 조고는 이제 승상까지 겸입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조고의 전횡은 어느 정도였는가? 이와 관련해서 전해지는 유명한 고사가 있다.

 하루는 조고가 황제에게 사슴을 한 마리 바쳤다. 그리고는 제이황제에게
"폐하, 제가 좋은 말 한마리를 구했습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누가 보아도 사슴이었다. 그러나 대신들은 눈치만 보다가
 "
폐하 그것은 말입니다."
라고 거듭아뢰었다. 2세 황제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몇번을 고쳐보고 자세히 보았지만 분명 사슴이었다. 황제는 결국 자기 자신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황제는 별궁안에 틀어박혀 한발도 세상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황제가 완전히 이성을 잃은 것을 확인 하자, 조고는 경비병들에게 흰옷을 입혀 별궁안으로 행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황제에게 반란군이 궁성까지 점령하였다고 거짓으로 아뢰었다. 그러나 이성을 잃은 황제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못하고 조고의 말에 무조건 의존하였다.
 그리고 조고는 계속하여 황제의 심리상태를 압박하였으며, 황제는 견디다 못해 자살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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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황제를 자살에 이르게 한 조고는 옥새를 웅켜잡고 황제행세를 하려 하였다. 환관에서 승상으로, 승상에서 황제로....이제 모든 권력이 정점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단지 옥새만 있다고 해서 황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신하들은 어느 누구도 환관의 명령에 따를 려고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조고는 시황제의 손자인 자영에게 옥새를 넘겨 주었다. 자영을 3세황제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이 갈리고 있다.  아무튼 즉위식은 거행되었기 때문에 제 3황제로 보기로 한다.
 비록 3세황제가 되었긴 하지만, 자영역시 언제 조고의 손에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설령 살아있다고 해도 2세황제처럼 허수아비나 다름없이 살다가 갈 것이고, 아니면 반란군 손에 살해당할 것이다.
 3세황제는 병을 빙계삼아 정사를 돌보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환관 환담일당과 내응하여 조고를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조고가 병문안을 드리기 위해 홀로 방문하자, 그자리에서 살해하는 데 성공하였다. 자영이 황제에 즉위한지 겨우 1년만이었다.
 그후 자영역시 반란군에 의해 살해당하여, 기원전 221년에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는 3대 15년 만인 기원전 206년 제삼황제 자영을 끝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환관조고.... 그의 전횡보다는, 진실을 가릴때 나타나는 부작용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