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學雜談/大學故事

한 손엔 의원, 한 손엔 교수

마장골서생 2009. 3. 7. 16:41

한 손엔 의원, 한 손엔 교수

 

서영석 전 서프라이즈 대표의 부인 교수 임용 인사 로비설로 시끄러웠을 때 우연히 한 지방대학 교수와 자리를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언론학을 전공하는 그는 유럽의 한 명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오라는 얘기가 없어 고생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30군데가 넘는 대학에 이력서를 보냈지만 소용이 없더라고 했다. 심지어는 같은 대학에 세 차례나 응모원서를 낸 적도 있다고 했다. 그를 화나게 만든 것은 심사 탈락이 아니라고 했다. 응모원서는 물론 이력서조차도 꺼내보지 않는 대학이 태반이라는 사실에 그렇게도 분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공들여 준비하고 작성한 서류와 자료들이 봉투째로 쓰레기통에 던져진다는 것을 순진하게도 뒤늦게야 알고서 절망감에 몸을 떨어야 했다는 것이다.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것이다. 10, 100명이 응모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선발될 사람은 이미 내정돼 있으니. 모두 헛된 공력일 터이다. 교수 채용에 수 억 원이 오가고 배경이란 배경은 모조리 동원되는 현실에서 신문에 난 공개 채용 광고 보고 서류만 보냈으니 순진한 게 아니라 미련한 짓이었다고 그는 자조했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해마다 수 백 명, 수 천 명씩 박사가 쏟아지고 그 중에는 외국 유명대학 출신도 수두룩하니 실력도 실력이겠지만 어지간한 인연이나 배경이 아니면 교수가 되어 교단에 선다는 것은 꿈같은 일일 것이다. 최근 시애틀에서 만난 미국 모 대학의 한 미국인 교수(언론학)가 자기 대학 언론학 박사과정의 학생 거의 모두가 한국 학생이라고 해 충격을 받은 적도 있다. 이 교수가 그렇게 말하자 옆자리에 있던 또 다른 대학의 언론학 교수도 자기네도 사정은 같아서 한국학생이 박사과정 학생의 30%이상을 넘는다고 거들었다.

 

공급이 수요를 심하게 초과하는 이런 현상으로 인해 지난 십 수 년 간 재미를 본 것은 지방대학들이다. 서울에 자리가 없다 보니까 정말로 실력 있는 외국 유명 대학 출신 박사들이 적잖게 지방에 둥우리를 틀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미국 아이비리그 출신이니까, 1950, 60년대 미국의 그렇고 그런 대학에서 박사학위 하나 받아가지고 귀국해 지난 수 십 년 동안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들은 동 시대에 태어나지 않았음을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1960년대, 70년대에 귀국한 사람들 중에는 미국에서 자리를 잡지 못해 귀국한 경우도 많다고 한다. 실력 있는 사람들은 미국 대학에 자리를 잡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서둘러 귀국해야 했다는 것인데 그 뒤 이들의 처지는 180도로 바뀌었다. 귀국한 사람들이 국회의원도 하고 장관도 하면서 신흥 개발도상국 한국을 이리저리 요리할 때 귀국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미국에서 그저 그렇게 살아야 했으니까. 실제로 미국에 가보면 “그 때 귀국했어야 하는 건 데….”하면서 후회하는 많은 한국인 교수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어쨌든 공급 초과로 정말로 실력 있는 교수들이 지방대학으로 내려갔는데 그 중에는 순수 국내파들도 많다. 국내파들 역시 뛰어난 자질과 실력을 자랑한다. 돈이 없어, 또는 군대라든가 가정 사정으로 유학시기를 놓쳐 국내파로 남았지만 이들 역시 미국 명문대학을 나온 저명한 지도교수 밑에서 제대로 공부해 그 실력이 어설픈 해외파들보다 낫다.

 

특히 한국정치나 해방 전후사, 한국전쟁, 남북문제 등의 영역에선 경쟁 상대가 안 될 정도다. 대표적인 경우가 지금은 연세대학교 국제관계 대학원에 자리를 잡았지만 한 동안 고려대학교에서 시간 강사를 했던 박명림 박사다. 40대 초반의 그는 한국전쟁의 원인 분석에 관한 한 세계적인 권위자로 인정 받고 있다. 그의 저술을 하버드 대학이 출판하겠다고 나설 정도니까.

 

문제는 이처럼 젊고 능력 있는 학자들에게 좀처럼 중앙무대에서 경쟁할 기회가 안 주어진다는 것이다. 발버둥을 쳐봐도 중앙의 이름 있는 대학에 진출하기는 정말 하늘의 별따기다. 서영석씨 사건이 터졌을 때 열린우리당의 유시민 의원이 “교수 지망생 치고 채용 때 부탁 전화 한 번 안 한 사람이 있느냐”고 했다는데 심정적으로는 공감이 가는 말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이렇게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불공정한 채용의 벽에 갇혀 신음하고 있는데도 한 번 교수가 된 사람은 결코 그 자리를 포기하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 우리를 한 번 더 절망케 한다. 정계로 나가든 관계로 나가든 한 번 나가면 자신의 자리는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다른 유능한 동료나 후배들에게 물려줘야 할 텐데 천만의 말씀이다. 2,3년 외도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대선 때나 총선 때 특정 당과 후보를 위해 참모로 뛰다가도 그 쪽 세계에서 자리를 못 얻거나-대개는 경쟁력에서 밀린 경우가 많다-제공된 자리가 양에 안 찰 경우 너무도 당당히 학교로 되돌아온다. 그리고는 다시 “이번에는 누구를 밀어볼까”하고 다음 줄 서기에 골몰한다.

 

“학자의 현실 참여를 부정적으로만 보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기 바란다. 정부나 정치권에 빌려줄 만한 지식이나 아이디어가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빌려주겠다는 그 지식이나 이론이라는 것도 우리 현실과 전혀 맞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국 인생역전을 위해 정치권이나 관료사회 근처를 끊임없이 기웃거리는 것이다.

 

지금 대학생들은 잘 모르겠지만 197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들이 배웠던 교수님들은 언론에 얼굴을 비치는 것조차도 삼가셨다. 필자의 지도교수님도 불가피한 경우 신문에, 그것도 특정 신문에 기고는 하셨지만 방송은 결코 나가지 않으셨다. 교수가 연예인은 아니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한번 정부나 정치권에 몸담은 교수들은 결코 학교로 돌아올 수 없었다. 사석에서 만나면 우리가 나이 어린 제자인데도 무척이나 계면쩍어 하셨다.

 

고리타분한 얘기라고? 학문이란 것이 실용성이 생명이고, 그 것이 현실 속에서 수용되고 실천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때가 그립다. 학자가 학자로서 본분과 지조를 지켰던 그 시절이 시간이 흐를수록 그립다.

 

전국 국, , 사립대학 총장들이 교수의 정치참여를 제한하는 결의문을 채택하려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160여개 대학 총장들이 지난 7일 제주도에 모여 대학의 정치적 중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교수들의 정치참여 후 복직을 금지하는 결의문 채택 문제를 논의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박영식 대학교육협의회 회장이 “국회나 고위공직에 진출한 교수의 자동 휴직 조항을 교육공무원법에 삽입한 1996년 이후 교수들의 정치참여가 무분별하게 이뤄져 강의가 차질을 빚고 교원 간 정치적 갈등이 증폭되는 등 면학 분위기가 흐려지고 있다”면서 결의문 채택을 강력히 요청했으나 반대 의견을 극복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반대론을 편 사람들이 “국립대 총장도 차관급 고위공직자인데 관련법을 바꿔 복직을 허용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볼 멘 소리를 하자 분위기가 일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한 편의 코미디를 보는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반대한 총장들에게 묻고 싶다. 젊고 유능한 당신의 제자들이 지금 박사 실업자가 되어 세상을 한탄하고 있는데 그들의 눈물을 맨 먼저 닦아 줄 사람이 과연 누구냐고. 정치권이든 관계든 한 번 진출한 사람은 다시 돌아올 수 없도록 하고 그 빈자리는 한 눈 팔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할 참신한 젊은 핵심역량들에게 넘겨줘야 한다. 이 경쟁시대에 ‘한 손엔 국회의원(장관), 다른 한 손엔 교수’라는 두 개의 사과를 들고 혼자 다 먹겠다면 말이 되는 소리인가. 학문이라는 것도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이고 그 변화를 따라잡으려면 분초를 아껴 가면서 공부하고 연구해도 모자랄 터인데 외도는 외도대로 즐기면서 어찌 학문을 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복직 금지에 반대하는 총장이나 교수들은 지금 당장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의 제자들이 학문을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얼마나 혹독한 시련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가를 한번 쯤 돌아보기 바란다. 일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전도가 유망한 시간강사가 생활고를 못 이겨 자살하지 않았는가. 제자들의 이런 고통과 슬픔이 정녕 당신의 가슴에 전해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