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文史哲/韓國歷史

응답하라 1970년대

마장골서생 2014. 1. 8. 15:55

1970년대는 오줌도 수출했다 

이 자료들은 정확히 1975~1976년 사이의 자료들이다.

 

외화 벌이 가능한것은 무엇이든지 수출하던 때다.

 

오줌 한 방울이라도 통속으로...이런 문구가 화장실에 극장, 터미널, 기차역, 유원지, 학교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소변기 아래에 커다란 말통을 받혀두고 남자들의 오줌을 수집해 수출하였다.

 

먹고 살기 힘들었던 시절 정부에서 추진하는 취로 사업에 일 18천명씩 몰렸으며 남자 일당850원 여자530원으로 꽤 좋은 수입이었다.

 

돌 깨는 작업을 하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모습이다.

 

고도성장의 기초가 되었던 광산업. 당시 탄광촌의 모습이다.

 

프로 레슬러 = 국내 최초였을 여성 레슬러가 등장 하여 많은 인기를 누렸다.

 

너무도 살기 힘들었던 시절이라 자식만이라도 실컷 배불리 먹고 살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부잣집으로의 입양을 고대하는 사람들도 많아 보육원이나 고아원이나 아이들로 넘쳐났다.

 

당시는 먹고 살기 힘든 때임에도 다산의 여풍, 산아제한의 수술, 원치않는 임신의 강제유산 등등 산부인과가 호황을 누리기도 하였다. 봉건적인 사회인식 때문인지 처녀막 복원수술이 유행하기도 했다. 

 

산아제한을 위해 보건소에서 담당자들이 가정마다 직장마다 찾아다니며 계몽활동을 했다.

당시 남자들도 피임을하자는 홍보를 하는 모습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간판은 통제를 받아 잘 정리해야 했다. 

 

5일마다 열리는 시골장터 우시장이다.

 

서울 시민의 젖줄인 팔당땜의 모습이다.

 

이곳이 새마을 사업이 최초로 시작된 청도군 방음리 마을이다. 시작 전에 찍은 모습이다.

 

교통 수단이 열악하여 아침 저녁이나 시골 장날은 버스 한 번 타려면 힘센 사람 순으로...

약한 사람은 밀려나 못타면 다음차를 기다려야 하고... 밀어부치는 안내양은 강호동?

 

관의 주도로 북괴 규탄 대회가 많이 열렸다.

 

동네 아낙네들이 수작업으로 흙 벽돌을 찍는 모습이다.

 

절미운동 = 전국적으로 부뚜막에 조그만 단지를 두고 밥을 지을때마다 쌀통에서 퍼온 쌀을

한 숟가락씩 떠서 단지에 모아 두었다가 한 달에 한번 한 곳에 모아 좋은일에 쓰곤 하였다.

 

당시에 대형화재로 떠들썩했던 남대문 시장 화재.

 

이때만 해도 부모 공경심이 대단하여 나들이때면 늘 자녀들을 데리고서도 꼭 부모님을 모시고 다녔다.

 

여름 피서철 여행을 떠나는 젊은이들이 역사 홈에서 식사 중인것 같다.

 

4장의 사진은 판문점 북괴군 도끼 만행 사건이다. 미류나무의 가지치기 작업을 하던 유엔군을 북괴군들이 도끼로 무참히 살해한 사건이다. 그 후에도 판문점에서는 이런 돌발적인 사건들이 자주 일어났다.

 

구타 당하는 유엔군.

 

생년월일을 입력하면 바이오리듬을 알려준다는 컴퓨터.

 

시계가 귀하던 그 시절에 수리점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예나 지금이나 노인들은 쉴 곳이 없다.

 

통행금지. 11시가 넘으면 요소 요소에 경찰이 배치되고 12시 땡하면 단속을 시작하였다.

 

 

영일만에 석유가 나온다는 보도가 전국민을 흥분하게 만들었다.

 

백색, 청색, 흑색 전화기. 신청하면 보통 1년을 기다려야 개통이 됐으며, 백색전화기는 권리금만 해도 보통 2백만원을 홋가했다.

 

고속버스안내양 = 고속버스를 타면 사탕도 주고 음료수도 주곤 했다.

 

남북 냉전 시대에 일본 조총련계 동포들이 분단 후 처음으로 고국방문을 왔다.

 

울산 현대 조선에 입항한 초총련계 동포들. 당시에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처음 발족한 경찰 기동 순찰대.

 

이무렵 국민들 영양 보충과 식생활 개선을 위해 들여 온 식용 황소개구리.

무게가 500~700그램으로 우측 토종 개구리와는 큰 차이가 났다.

 

서울 대연각 호텔화재 국내 최대 화재 사건. 고층건물 장비가 없어 창밖으로 수 많은 사람들이 꽃잎처럼 떨어지는 운명을 맞았다.

 

공병 수집소. 빈 병 1개면 2~7원을 벌 수 있었다. 

 

완행열차 안. 젊은이들이 노래를 부른다.

 

통기타 하나면 어디든지 신바람나게 놀 수 있었다.

 

땜이나 저수지가 부족해 봄이면 늘 가뭄에 시달렸다. 남여 노소 막론하고 온 동네의 사람들 모두 물지게로 물을 길러서 논에다 퍼다 부었다.

 

농기구가 없을 때라 모내기도 손으로 했고, 지게로 짊어져 날랐다.

 

놀이 공간이 부족했던 이때는 공원 유원지 어디든 모이면 즐겁게... 추억과 낭만이 있었다.

 

서울에 최초로 이스람교 사원이 들어섰다.

구두 수선하는곳이 많았다. 월 최고 30만원까지 수입을 올리는 수선공들도 많았다. 중요 요지에는 폭력배들이 거의 다 장악했다.

 맨션 분양 광고

 

쓰레기 매립장이 부족한 탓에 골목마다 연탄재가 골치덩이였다. 

 

30년전 대천 해수욕장.

 

 

 

전국의 유명한 해수욕장들이다.

 

밤 새도록 잠 못자며 부업으로 십자수도 많이 놓았다.

 

지금은 보기드문 여인숙이다. 이때만 해도 여관은 고급이어서 보기 힘들었다.

 

공산품이 발달하면서 각종 생필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공장의 여공들. 휴식 중인 모습.

 

재래시장의 밤장수

 

서소문로 포장마차.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포장 마차가 우후 죽순 많이 생겨났다.

 

퇴근 길이면 제일 먼저 들렀다가 집으로 퇴근 하곤했다.

 

안양천. 한 번 건너는데 5원이었다. 개인이 놓은 다리라고 돈을 받았다.

 

1975년의 안양천 서쪽 둑방 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