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의 생활상과 미니스커트
이 사진들은 정확히 1970년도의 자료이다.
1968년도 인기가수 윤향기씨의 여동생 가수 윤복희가 미국에서 귀국 후 미니스커트를 입고 방송에 출연하여 전국이 들썩였던 대 사건이었다.
이때부터 미니 열풍이 불기 시작하여 온갖 액세서리까지 유행을 타기 시작하였다. 지금의 미니스커트와는 다소 차이가 난다.
당시 차림새를 보면 단정한 미니스커트에 단아한 구두가 무척 청순해 보이기까지 한다.
당시 가수 윤복희씨가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패션계를 뒤바꾼 연예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경찰들이 대나무 자와 가위를 들고 다니며 무릎에서 20cm이상 올라가면 현장에서 가위로 찢어버리고 풍기문란 경범죄로 처벌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도 미니스커트 열풍은 막지를 못했다.
중학교 조회시간 = 운동장이 진흙 바닥이라 가마니를 깔고 서있는 모습이 이색적이다.
중산층 이하 사람들의 돈줄이랄까, 가정에서 새끼를 많이 낳는 개를 키웠으며 장에 내다팔아 보리쌀이나 생필품을 구입하였다.
서울시내 러시아워 시간 = 바퀴 3개 달린 삼륜차를 비롯해 지금은 볼 수 없는 차량들이 많았다. 긴급 출동한 소방차가 도로변 수방 시설이 얼어서 불을 지피고 물 나올 때까지 녹이는 중이다. 저러다 화재 진압은 언제 할지.
당시는 개인 가정에 수도 시설이 거의 없는 때라 동내 한곳에 공동 수도가 하나씩 있었는데, 우리 어머니들은 물을 받기위해 이른 새벽부터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했다.
간혹 시골로 찾아와서 서커스(연극) 등을 보여주고 만병통치약이라며 가짜 약을 강매하던 시절이 있었다. 순박한 시골 분들은 공짜 구경한 죄(?)로 정말로 좋은 약인 줄 알고 구입하기도 하였다.
보건소에 건강 검진을 받으려고 온 접대부 여성들이다. 나무 난로에 주전자를 올려서 따끈한 물 한잔이면 추위를 녹이던 시절이었다.
일명 모포부대 = 그 시절 전국 유명한 유원지 근처에는 간간히 있었다.
명절을 앞두고 방앗간에서 떡을 하려고 기다리는 것 같다. 당시 헤어스타일 광고는 이런 사진도 있었다.
명절을 앞두고 방앗간에서 떡을 하려고 기다리는 것 같다. 당시 헤어스타일 광고는 이런 사진도 있었다.
겨울철에 조금만 가물어도 어디 할 것 없이 식수난에 허덕였다. 지고 가는 저 지게는 물지게 또는 똥지게라고 불렀으며 몇 번 지고 나면 어깨에 피멍이 들곤 했다. 물을 지고 가는 소녀의 모습은 무척 힘겨워 보이며 귀가 시린 듯 수건으로 귀를 감쌌다.
당시는 쓰레기 매립장이란 것이 거의 전무한 상태라 골목 어귀 어디에나 쓰레기가 태산을 이루었다.
배 사람들 = 가운데 사람이 쓰고 있는 모자는 요즘은 보기가 쉽지 않다. 당시는 북한 인민군 모자와 비슷한 모자들을 많이 썼다. 모자 귀막이 부분의 덮개에는 털이 달려있어서 추운 겨울에는 귀마개 역할을 하였다.
코로나택시 충돌사고 = 당시에는 차량이 별로 없었던 때라 설사 인명피해가 없어도 언론에서는 이를 자동차사고를 크게 다루었다.
안동차전놀이 = 지금의 웅장한 스케일의 차전놀이에 비하면 무척이나 단출해 보인다.
구두닦이 = 한번 닦는데 10~20원, 월수입 30만원. 명당자리 싸움이 워낙 치열하고 깡패들이 독점하다시피 하였다. 아무나 할 수없는 고소득 직업이었다고나 할까!
징병 검사장 = 신체검사 받는 젊은이들이 모두가 날씬하기만 하다. 못 먹고 살던 때라 비대한 사람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당시 배나온 사람은 사장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70년도 미스코리아. 다리길이가 앙증맞을 정도다.
제주해녀의 전통 복장이다. 저 문어는 돈 없어 먹고 싶어도 못 먹던 시절이었다.
여학교 교련시간 = 여고생들이 사격 훈련을 받고 있는 모습이다. 1968년도 예비군 창설당시 지원자에 한하여 여자도 예비군이 될 수 있었다.
빈병수집 = 병 한 개 2홉짜리 1~2원, 대 병 5원. 밤새도록 길거리나 공원을 돌아다니며 빈병을 수집해 돈벌이를 하는 이들이 많았다.
1970년도 동대문시장 건립 조감도. 시골은 여전히 초가지붕과 흙벽에서 풍기는 썩은 내를 맡으며 살았는데, 늘 어디선가 스멀거리며 기어 나오는 굼벵이나 노래기 같은 벌레를 잡아야 하는 상황과는 무척 대조적이었다.
쥐잡기운동 = 많은 식량을 축내는 쥐잡기 운동을 전국적으로 실시했었다. 매월 25일이면 동네 이장을 통해서 가루로 된 쥐약을 집집마다 배포하였다. 그럼 이 가루를 쥐가 좋아하는 음식물에 섞어서 쥐가 다닐만한 길목에 놓아두었다. 다음 날이면 쥐를 잡은 수만큼 쥐꼬리를 잘라서 학교나 면사무소에 신고했어야 했다. 간혹 동네 개들이 이 쥐약을 먹고 온 들녘을 해매다 고통스럽게 죽기도 하였다. 책가방 옆에 신문지에 싼 쥐꼬리를 넣어 학교에 가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긴 코트를 입은 여성이 오토바이를 타고 가는 모습이다. 오토바이를 다 덮어 버린 옷자락이 인상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유원지 놀이 문화는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왼쪽에 저 여성은 허리 부러지겠네. 지금의 묻지마 관광이 이럴까?
젊은이들에게 한창 유행 하던 포크 댄스다. 당시에는 초등학생들도 운동회 대비 이런 춤을 추곤 했는데, 남녀 학생이 서로 손을 잡기 싫어 작은 작대기 양끝을 서로 잡고 추기도 하였다.
모 여자대학의 당시 옷차림이다. 단정하고 청순해보이기까지 한다.
이때는 밀수가 성행했었는데, 여성의 브래지어에 숨겨 들여온 보석들이 적발된 모습니다.
택시타기는 하늘에 별따기 = 기본요금70~80원 택시 한 번 타려면 힘에 밀려서 여성들은 타기조차 힘들었고 2팀 3팀 합승은 기본이었다.
많은 사람들 사이에 고등학생의 복장이 이채롭다. 저 모자에 별도 그리고 방석대용이나 빵 값 대신 찐빵 집에 잡혀놓기도 하였다. 횡단보도를 걷는 신사들 바지가 모두 짧다. 비포장도로가 많은 시대라 비만 오면 큰 일이 날 수도 있었으니 매우 실용적이라고 해야 할까?
주막 = 보릿고개 시절 초가로 된 주막집들이 간간히 있었다. 브리샤 택시가 손님을 모시고 왔나보다. 널려있는 빨래는 접대부들의 속옷이다. 저 속옷 한 장이면 지금은 3장 정도는 너끈히 만들 수 있을 듯.
서구 문물이 범람하면서 외래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자세히 보면 백구두가 아닌 빽구두. 정부에서는 대대적인 외래어 단속을 벌이기도 했다. 지금의 영어범람 세태에 비하면 애교수준이지만.
'韓文史哲 > 韓國歷史'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불과 반세기 전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 (0) | 2014.03.16 |
---|---|
응답하라 1970년대 (0) | 2014.01.08 |
'백년전쟁' 비판과 왜곡 사이(조갑제의 해설) (0) | 2013.04.27 |
[생명의길] 제1편 - 이승만시대 "인격살인은 국사가 아니다" (0) | 2013.04.27 |
[백년전쟁] 두 얼굴의 이승만- 민족문제연구소의 기막힌 사진조작 (0) | 2013.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