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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소수민족--③티베트족(짱족·藏族)

마장골서생 2009. 9. 21. 07:42

[중국의 소수민족] ③티베트족(짱족·藏族)

 

티베트족(짱족·藏族)은 중국 내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국제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민족이다. 전체 인구는 541만명으로 인구 순으로 9번째에 불과하지만 정치적 파급력은 숫자 이상이다. 최근 위구르 유혈사태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소수민족 문제를 상징하는 단어는 ‘위구르’가 아닌 ‘티베트’였다.


지난해 3월에는 시짱 티베트자치구 수도 라싸에서 200여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한 대규모 유혈사태(3·14 사태)가 터져 국제적인 주목을 끌기도 했다. 베이징올림픽을 5개월가량 앞둔 시점에 터진 당시 유혈사태 처리를 두고 중국 정부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한 중국 전문가는 “사지육신을 땅에 던져 큰절을 하는 ‘오체투지(五體投地)’는 티베트가 처한 곤경을 나타내는 국제적 아이콘이 됐다”고 말했다. 

 

 

현재 시짱 자치구에는 티베트족 가운데 절반가량인 270만명(2008년 기준)이 살고 있다. 한족 인구가 급속히 늘고 있는 다른 자치구와 달리 티베트 자치구는 여전히 티베트족이 전체 인구(287만명)의 95%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자치구 전체 면적도 신장 위구르자치구에 이어 두 번째로 커 중국 전체 면적의 13%를 차지하고 있다.
 

북으로는 쿤룬산맥을 경계로 신장 위구르자치구와 이어져 있고, 남으로는 히말라야산맥을 경계로 인도·네팔·부탄·미얀마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히말라야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이자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산(해발 8848m)을 티베트인들은 ‘성스러운 어머니’란 뜻의 ‘초몰랑마’라고 부른다. 만년설로 뒤덮인 ‘히말라야’는 티베트어로 ‘눈의 고장’이란 뜻이다. 이 만년설은 최근 중국의 만성적인 물 부족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할 ‘신무기’로 급부상하고 있다. 중국이 티베트를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첫 번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본래 티베트족의 영토는 지금보다 훨씬 더 넓었다. 시짱 자치구를 비롯해 칭하이성 전부와 쓰촨성, 윈난성, 간쑤성의 일부도 원래 티베트족이 살던 영토였다. 이들 영토는 티베트족(짱족)이 사는 곳이란 뜻에서 ‘다짱취(大藏區)’라고 불렀다. 중국 전체 면적의 대략 4분의 1에 달한다.


중국 정부는 티베트를 중국 영토에 편입시키면서 티베트족의 세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일부 지역을 분리했다. 하지만 지난해 3월 소요사태 때는 시짱 티베트자치구뿐만 아니라 칭하이성을 비롯해 ‘다짱취’에 있던 티베트족도 같이 티베트의 분리독립을 주장하며 중국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이로 인해 중국 정부가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는 후문이다. 만약 티베트족의 분리독립이 실현되면 티베트자치구뿐만 아니라 자치구 인근의 일부 성(省)들도 연쇄적으로 떨어져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티베트의 종교, 라마교


모자색 따라 황모·홍모파 등 주요 4대 계파로 나눠

종파분쟁 치열… 중국에 무력점령 빌미 제공

 

 

지금은 중국과 주변국가의 힘 겨루기 마당으로 전락한 느낌이지만 티베트도 한때는 잘나간 적이 있었다. 토번족으로 불리던 당나라 때는 현재의 티베트자치구를 비롯해 칭하이성 일대까지를 군사적으로 석권했다. 토번 왕 ‘손챈 캄포’는 주변에 막강한 무력을 과시하며 당나라 한족 공주와 이웃 네팔의 공주를 동시에 아내로 얻었다.


몽골족이 중국을 지배하던 원나라 때는 군사적으로 우위에 있는 몽골족에 티베트 불교(라마교)라는 지배이념을 제공하기도 했다. 원나라의 실질적 지배를 받던 고려 왕들 가운데는 티베트 라마교 사원에서 귀양살이를 한 왕도 있다. ‘티베트’라는 말도 과거 몽골족을 비롯한 유목민들이 토번족을 부르던 ‘투보트(土伯特)’란 말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지금 중국에서 ‘티베트’란 말은 철저히 금기시된다.


라마교로 알려진 티베트 불교는 티베트족을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다. 인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티베트는 불교를 가장 빨리 받아들인 곳이다. 현재도 티베트에는 1700여개의 불교 사원과 종교 단체들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불교가 들어오면서 티베트는 종교지도자가 정치까지 관장하는 신정일치 체제로 변했다. 달라이 라마 역시 정치지도자이기 전에 엄연한 라마교 최대 계파인 거루파의 수장이다. 거루파는 노란 가사를 걸치고 노란 모자(황모)를 쓴다고 해서 ‘황모파’ ‘황교(黃敎)’로도 불린다. 티베트 불교인 라마교는 모자 색깔에 따라 △황모파 △홍모파 △흑모파 △백모파 등으로 구분한다. 티베트에 외세를 끌어들인 것도 이들 교파들의 세력다툼이 빌미가 됐다. 교파들이 자진해서 외세를 끌어들이며 티베트는 결정적으로 약화됐다.


중국 공산당 역시 1951년 티베트 무력점령의 명분으로 ‘종교’를 들었다. ‘부패한 종교의 압제로부터 농노(農奴)로 전락한 티베트 인민을 구한다’며 6000여개의 종교사원을 파괴했다. 지금도 중국은 티베트 점령을 ‘농노해방’ ‘민주개혁’으로 자찬하고, 달라이 라마를 비롯한 기존의 종교세력은 ‘농노주의자’ ‘민족분열주의자’로 비난한다. 올해부터는 1959년 발생한 티베트 무장봉기를 진압한 3월 28일을 ‘시짱 100만 농노 해방기념일’로 지정해 성대한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다.


반면 중국군의 무력점령과 함께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최고지도자에서 일개 소수민족의 대표로 격하됐다. 달라이 라마는 1959년 라싸를 탈출해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인도의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웠다. 당시 달라이 라마의 탈출과정에서 10만여명에 달하는 승려와 일반 시민들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이 티베트에 민감한 이유

덩샤오핑 등 최고 권력자들 티베트와 인연 깊어

시짱 총서기 출신 후진타오, 티베트 진압 공로로 발탁


중국이 티베트 문제에 유달리 민감한 이유는 중국의 역대 최고권력자들이 직접적으로 티베트 문제에 관여했기 때문이다. 티베트를 직접 무력 점령한 사람은 바로 중국의 최고권력자로 군림했던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鄧小平)이다. 티베트와 가까운 쓰촨성 출신인 덩샤오핑은 인민해방군을 이끌고 티베트를 포함해 쓰촨, 윈난, 구이저우 등 서남지역 일대를 평정했다. 티베트는 4만명의 병력과 물자 수송용 낙타 4만마리를 앞세운 덩샤오핑의 군대 앞에서 1개월 만에 완전히 장악됐다. 이후 덩샤오핑은 서남지역 인민해방군의 통수권을 장악했고 한때 마오쩌둥의 견제를 받는 ‘서남지역의 황제’로 군림했다.


후진타오 공산당 총서기 겸 국가주석도 티베트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후 주석은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시짱 자치구 공산당 총서기를 지내면서 티베트 문제를 직접 다뤘다. 고산병을 앓던 우징화(伍精華) 전임 티베트 서기의 뒤를 이은 후진타오는 시짱으로 오자마자 티베트어를 배우는 등 나름대로 티베트족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노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도 후진타오 총서기는 한족임에도 불구하고 티베트어를 능통하게 구사하고 티베트 전통 춤도 곧잘 춘다고 한다. 반면 1989년 티베트에서 대규모 소요사태가 터졌을 때는 계엄령을 선포하며 강경 유혈진압을 주도했다. 철모를 쓰고 시위진압을 진두지휘하는 후진타오의 모습이 당시 최고권력자인 덩샤오핑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는 후문이다. 이후 덩샤오핑은 그를 장쩌민 주석의 뒤를 이을 차기 지도자로 낙점하고 세상을 떴다.


현재 티베트자치구의 공산당 서기 한족 장칭리(張慶黎·58) 역시 최고권력자의 최측근 그룹으로 분류된다. 1951년 산둥성에서 태어나 중앙당교를 나오고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 활동 경험도 갖고 있는 후진타오의 직계다. 특히 장 서기는 지난 2005년 말 시짱 자치구의 대리서기로 오기 전에는 중국의 또 다른 화약고인 신장 위구르자치구에서 당 부서기로 일하기도 했다. 때문에 “소수민족들을 다루는 노하우를 쌓았다”는 평을 듣는다. 지난해 3월 벌어진 대규모 소요사태(3·14 사태) 때도 ‘생과 사를 가르는 결전’ ‘단결은 복을 부르고, 분열은 화를 부른다’라며 강경대처를 주도했다. 일부에서는 “그의 강경대응이 티베트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소수민족 문제에 대처한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향후 당 중앙으로 진출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외세 개입



영·러, 과거 티베트 놓고 영토확장 전쟁

망명정부 허가한 인도는 중국과 무력충돌도


티베트 문제가 복잡하게 된 데는 외부세력의 개입도 한몫 했다. 중국 정부 역시 “외부세력이 이 지역의 분리독립 움직임을 부추긴다”고 판단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중 중국이 가장 염려하는 세력은 미국과 영국이다. 특히 영국에 대해서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과거 영국은 인도 주둔 영국군을 동원해 티베트를 무력침공하고 티베트를 실질적으로 점령했었다.


러시아의 남진으로부터 영국령 인도를 보호하기 위해 티베트에 친영 정권을 세운다는 것이 티베트 침공의 목표였다. 과거 러시아 역시 영국과 중앙아시아 영토확장 경쟁(소위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며 티베트 침공을 준비해 왔다는 것이 최근 관련 자료가 속속 공개되며 밝혀지고 있다. 미국도 달라이 라마와 티베트 인권문제를 지렛대로 삼아 대중 외교의 카드로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중국과 함께 ‘친디아(차이나+인디아)’로 불리며 정치·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는 인도 역시 티베트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있다. 1959년 인도 네루 정부는 달라이 라마가 이끄는 티베트 망명정부를 자국 영토 안에 세우는 것을 전격적으로 허가하면서 중국과 첨예한 대립각을 세운 바 있다.


또 인도는 영국 식민지시절인 1914년 인도 식민정부와 티베트가 체결한 맥마흔 라인(McMahon Line)을 근거로 티베트 영토 일부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지난 1962년에는 맥마흔 라인 인정 여부와 티베트 문제가 중첩되면서 중국군과 인도군 사이에 대규모 교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비록 중국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지만 티베트 국경 문제는 중국과 인도 사이에 언제든지 다시 폭발할 수 있는 뇌관으로 남아있다.

 

 

분리독립 가능할까



전문가들 “승려 주도의 독립운동은 한계”

인도·러시아 등 외부세력도 중국 눈치보기


티베트를 둘러싼 이런 복잡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중국 전문가들은 티베트의 분리독립 가능성에 대체로 회의적이다. 한 전문가는 “일반 시민이 아닌 승려들에 의해 주도되는 티베트 분리독립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티베트 독립 움직임을 평가절하했다. 더욱이 최근 중국은 경제력을 무기로 티베트에 대한 장악력을 더욱 높이고 있다.


지난 2006년에는 베이징과 티베트의 수도 라싸를 연결하는 칭짱철도를 개통시키면서 영향력을 더욱 강화했다. 칭짱철도를 달리는 열차에는 산소공급기가 달려 있다. 또 지난 7월 10일에는 수도 베이징과 티베트 라싸를 잇는 항공 직항노선도 새로 개설했다. 그 동안은 베이징에서 쓰촨성의 청두를 거쳐 라싸로 들어가는 경유편만 운행됐다. 때문에 티베트는 이제 이국적인 자연환경으로 인해 한족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관광지 가운데 하나로 변모하고 있다. 한족 관광객들이 몰려들면서 티베트인들도 중국어 배우기에 열을 올리고 있다. 


외부세력 역시 중국의 경제적 부상 이후 티베트 문제에 개입하기를 꺼리는 양상이다. 특히 티베트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인도는 개혁개방 정책을 편 1991년 이후 티베트를 둘러싸고 중국과 충돌을 벌이기보다 중국과의 경제적 유대를 유지하는 데 더욱 관심을 쏟고 있다. 실제 인도 경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인도산 철광석의 80% 이상은 모두 중국으로 수출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인도는 지난 2003년 중·인 정상회담 이후부터는 “티베트는 중국 영토의 일부”라고 인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때 티베트에 욕심을 냈던 러시아 역시 자국의 소수민족 문제로 골머리를 앓으며 소수민족 분리독립문제에 관해서는 중국 정부와 공동보조를 취하고 있다.


우리 정부 역시 중국의 심기를 건드릴 것을 우려해 티베트 문제에 대해서는 극도로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하고 있다. 중국 정부가 블랙리스트에 올린 달라이 라마의 한국 방문을 허가하지 않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 현재 우리나라 불교계 일부에서는 달라이 라마의 방한(訪韓)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역시 티베트 문제에 대해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측의 입장을 적극 옹호하고 있다. 지난해 3월 티베트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졌을 때 북한은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유혈사태는 티베트의 독립을 꾀하고 베이징올림픽을 파탄시키려는 불순분자들의 책동”이고 “티베트는 중국 영토의 불가분리한 부분”이라며 중국 정부의 입장을 적극 옹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