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사교합일의 작은 마을 청암고진
1840년 중국 대륙은 아편전쟁에 휩싸였다. 영국은 장강 하구를 봉쇄하고 함포의 화력을 앞세우고 청나라를 유린한다.
청나라가 무너진다. 그러나 민중들은 반발한다. 전쟁이 길어진다. 양국의 사상자가 늘어간다. 마침내 1842년 6월 영국군은 상하이를 점령한 뒤 난징으로 진격한다.
청나라는 버틸 힘이 없다. 결국 영국과 굴욕적이고 불평등한 난징 조약을 맺는다.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 광조우, 샤먼, 푸조우, 닝보, 상하이 등 5개 항구를 개항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영국과의 난징 조약에 이어 미국, 프랑스, 러시아 등 열강들은 줄줄이 청나라와 조약을 맺고 최혜국 대우를 받아가며 대륙 곳곳으로 침략의 손길을 뻗힌다.
군인이 들어오고, 민간인이 따라오고 시나브로 종교와 문화도 스며든다.
명나라 홍무(洪武) 10년(1378년), 군인들의 주둔지로 시작된 '척박한 땅' 구이저우의 작은 마을 '청암(靑岩)'도 서구 열강의 영향권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851년 청나라 함풍(咸豊) 원년, 청암에도 프랑스의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인 에띠엔 알브랜드(Etienne Albrand) 주교가 들어왔다. 천주교가 전해지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외래 종교를 배척하지 않았고 서서히 신도가 늘어났다.
1953년 알브랜드 주교가 갑작스레 병으로 죽자 루이스 파우리에(Louis Faurie) 주교가 다시 칭엔에 와서 성바오르 수도원을 열고 신부를 교육했다. 포교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문화적 충돌의 배후에서 정치적 충돌이 일어났다. 서양인들은 전승자로서 의기양양했고, 불법 교도들을 비호하면서 백성을 억압했다. 불평등했다.
백성들은 반감을 갖기 시작했고, '교회당을 불 지르고, 서양인들은 감옥으로 보내야 한다'고 외쳤다. 결국 '칭엔쟈오안(靑岩敎案)'이라 불린 파문이 일었다.
사고가 터진 것은 함풍 11년(1861년) 단오절. 마을 사람들은 '유백병(游百病)' 풍습에 따라 동네를 돌던 중 수도원 문 앞에서 충돌이 일어났다. 천주교도들이 자기 땅에서 민속 행사를 하는 것을 방해한다고 받아들인 마을 사람들은 관가를 찾아갔다. 칭엔의 주둔 사령관인 자오궈슈(趙國澍)가 동조했다. 관리를 보내 수도원을 훼손했고, 구이저우 제독 티엔싱슈(田興恕)도 장원란(張文瀾) 등 수사 5명을 죽였다.
사태가 커졌다. 프랑스 공사가 강력하게 항의했다. 청나라 정부는 은화 1만2000냥을 배상하고, 티엔싱슈은 신장으로 전보 조치했다. 자오궈슈도 말썽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지목돼 중징계, 재판을 받던 중 사망했지만 가족들은 감히 하소연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20년 뒤 칭엔이 발칵 뒤집혔다. 조씨 집안의 자손들이 성장해 이름을 떨쳤다.
광서 12년(1886년) 둘째 자오이싱(趙以炯)과 넷째 자오이구이(趙以奎)가 동시에 베이징에서 과거에 급제했다. 넷째는 '진사(進士)'가 됐고, 둘째는 '장원(狀元)'에 올랐다. 조씨 가문에는 '문괴(文魁)'란 편액이 내걸렸고, 지금도 '장원부(狀元府)'란 이름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이렇게 긴 세월, 아픈 사연을 안고 '사교합일(四敎合一)'의 다종교 마을로 진화한 곳이 바로 '청암고진'이다. 불교, 도교, 천주교, 기독교가 공존한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사찰과 묘당에는 향불이 끊이지 않고, 일요일이면 자연스럽게 예배당을 찾는 이들이 있다.
청암고진은 예로부터 '구사팔묘오각일궁(九寺八廟五閣一宮)'과 '팔좌패방(八座牌坊)'으로 유명하다.
북성문에서 시작하든, 남쪽의 '정광문(定廣門)'에서 시작하든 사통팔달 이어지는 돌길을 걷다보면 옛 마을의 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영상사(迎祥寺), 문창각(文昌閣), 만수궁(萬壽宮)과 장원부 등 고건축물들을 만난다.
정광문에 서면 '절효방(節孝坊)'과 '백세방(百歲坊)'이 한 눈에 들어온다. 본래 충효나 정절, 장수 등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패방이 8개였지만 지금은 3개 뿐이다.
남문 근처 언덕에 있는 것이 '주왕씨식부유씨절효방(周王氏?婦劉氏節孝坊)'과 '조리윤백세방(趙理倫百歲坊)'이고, 북문 쪽에는 '조채장백세방(趙彩章百歲坊)'이 남아 있다.
특히 '조리윤백세방'에는 쌍사자상, '절효방'에는 두 마리의 용을 섬세하게 다듬어 놓았다.
교회의 첨탑과 패방이 어우러진 마을 풍경은 묘한 느낌을 주기 마련이다.
정광문과 망루에 잇대어 쌓아올린 성벽에는 포대는 물론 총구를 만들어 놓았다. 이 곳이 600여년 전부터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보여준다.
골목마다, 거리마다 놓여진 돌맹이 사이엔 민간의 체취가 듬뿍 배어 있다.
카르스트 지형에서 채취한 석회암으로 길 바닥을 깔고, 담장을 쌓았다. 그 안에 전통 방식으로 술을 빗고, 먹거리를 만들고, 각종 민예품을 다듬는 한족과 소수민족 묘족의 손길이 살아 숨 쉰다.
청암 사람들은 두부를 즐긴다. 과자처럼 만들어 간식으로 먹기도 한다.
청암 사람들은 비록 작은 마을에서 살아가지만 공자를 존경하고, 도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믿고, 천주교를 신봉한다.
일찌감치 '공존의 아름다움'을 알고 오늘날까지 대대손손 살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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