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북미(東北米)
중국이 한국의 쌀 개방 재협상에 참가할 뜻을 통보함으로써 WTO협정에 따른 쌀 개방에 중국쌀의 유입이 불가피할 것 같다. 이 세상 사람들이 밀 다음으로 많이 먹는 곡식이 쌀이요, 쌀밥도 물기를 없앤 제습반(除濕飯) 문화권과 습기를 흡수시킨 흡습반(吸濕飯) 문화권으로 대별되는데, 전자가 대세를 차지하고 후자에 속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뿐이다.
그래서 내년에 개방되는 이러한 쌀수출을 노리고 미국 캘리포니아나 중국의 쌀 주산지인 동북 싼성(東北三省)에서 한국사람의 입맛에 맞는 흡습반미를 대량으로 경작해왔다. 중국 동북미가 질이나 맛이 국산쌀에 뒤지지 않는 데다 30%나 싸다 하니 유사 이래의 농업대란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셈이다.
쌀 미(米)자를 풀어보면 ‘八十八’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벼씨앗을 뿌려 거둘 때까지 여든여덟 번 손을 써야 한다는 번거롭기 그지없고 품을 많이 요구한다 해서 나온 해석이다. 아열대인 베트남에서 전통적인 벼농사를 짓는 것을 보면, 논만 골라 놓고 씨앗을 뿌려 다 익으면 거둬드리는― 세 번만 손을 쓰게 되는 것과 비교해봄 직하다.
쌀은 아열대작물이라 우리나라에서는 여름 한때만 자라는 부적한 작물이기에 기후에 쫓겨 그렇게 많은 손을 요구한 것이다.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北學議)’에 보면 삼국시대까지만 해도 한강 북쪽에는 논이 없었고 통일신라시대에 미작(米作) 북한계(北限界)인 강릉 회양사람들이 북상하면서 벼농사가 서서히 북상했지만 소출이 적고 너무 많은 노력을 요구했기로 임진강 이북에서는 소외당한 작물이다.
조선조에 들어 흉년으로 먹고살 길 없는 변경사람들이 월경해, 간도 등 중국 동북지방에 가 벼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이 중국 쌀농사의 시작이다. 조선조 후기 사신들의 연행길에 답동(畓洞)이라는 마을을 지나면서 월경 한인들이 벼농사 짓던 곳임을 적어 놓고 있다.
논을 뜻하는 답(畓)이라는 한자는 조선에서 만든 한자로 그 지명을 유지, 우리나라로부터 벼농사가 유입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그렇게 시작한 중국 동북미가 우리나라 논 전체면적의 두 배가 넘게 많아지고 드디어는 조상나라인 한국 벼농사를 위협하기에 이르렀으니 무상하다.
[조선닷컴 이규태코너]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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