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족은 기차가 낳고, 위구르인은 사람이 낳는다
▲ 피혁제품을 재활용해 팔러 나온 아이진러티 바자르의 상인들. 카슈가르 바자르에는 세상의 모든 상품을 다 내놓아 팔고 있다.
'한족은 기차가 낳고 위구르인은 사람이 낳는다.'
1999년 12월 신장(新疆)위구르자치구의 수도 우룸치(烏魯木齊)에서 카슈가르(喀什) 간 총길이 1446㎞ 난장(南疆)철도가 개통됐다. 철도 개통 전 우룸치에서 카슈가르에 가려면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야 하는 2박3일의 긴 여정이었다.
난장철도는 카슈가르 가는 시간을 단 하루로 단축시켰다. 비슷한 시기 최신 비행기로 바꾼 우룸치와 카슈가르 간 항공노선은 카슈가르의 대외 개방을 더욱 촉진시켰다.
문호가 활짝 열린 카슈가르에 밀려오는 이들이 있었으니 중국 내지에서 온 한족이었다. 한족은 10년 전만 해도 도시 인구의 5% 안팎이었지만 지금은 46만 도시민 중 20~30%를 차지한다. 여기에 도시 외곽에 사는 신장병단의 군인과 직계 가족 20만 명까지 합치면 한족의 인구 비율은 더 올라간다.
농촌 주민의 대다수가 위구르인이지만 도시에서는 한족이 일정한 세를 장악하고 있다. 이 때문에 위구르인들은 한족은 기차가 낳는다는 우스갯소리로 씁쓸한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
한족은 기차가 낳고 위구르인은 사람이 낳는다
한족의 증가는 카슈가르의 상권을 두 개로 나누었다. 두 상권은 물과 기름처럼 극히 이질적이다. 최근 떠오르는 황금상권은 카슈가르상업보행가(步行街)다. 상업보행가 상점 간판에서는 위구르어를 보기 힘들다. 온통 한자투성이고 상점 주인도 모두 한족이다. 깨끗한 쇼핑공간과 세련된 내부장식은 중국의 여느 대도시 상업거리 못지않다.
여성 의류점을 연 리리(여)는 "상업보행가 가게 주인들은 대부분 원저우(溫州), 광둥(廣東), 푸젠(福建) 등 동부 연해 출신이다"면서 "카슈가르 요지의 상권은 한족이 장악하고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런민시루(人民西路)에서 호텔을 경영하는 왕준(38)은 "카슈가르는 외지인이 사업하기 좋은 조건을 지녔다"고 말했다. 그는 "경제개발지역이라 사업 기회도 다양하고 세제 혜택도 많다"면서 "내지의 한족이 끊임없이 몰려와 사람 구하기도 쉽다"고 전했다.
전통적인 카슈가르 상권은 중시야(中西亞) 바자르 일대다. 바자르는 투르크어로 '시장'이란 뜻이다. 카슈가르 바자르는 이미 2천여 년 된 역사를 지닌 중앙아시아 최대 시장 중 하나다. 중시야 바자르의 발전은 곧 카슈가르의 역사와 맥을 같이해왔다.
▲ 전통적인 카슈가르 바자르와 자웅을 겨루는 카슈가르상업보행가. 관리회사와 입주한 상인 대다수가 한족이다.
지배자 바뀌었어도... 도시와 함께 성장해 온 카슈가르 바자르
아주 오래 전 카슈가르는 서역 36국의 하나였던 슐랍(疏勒)국의 수도였다. 슐랍은 기원 전 2세기에 왕국이 세워져 7세기까지 지속됐다. 슐랍에 처음 살던 민족은 오늘날처럼 위구르인이 아닌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인도유럽어 계통의 사람들이었다.
기원 후 2세기 인도로부터 불교가 들어와서 서역(西域) 국가로는 최초로 불교를 국교로 삼았다. 6세기 초 투르크 계열의 위구르인이 카슈가르에 들어오면서 슐랍의 주인이 뒤바뀌었다.
카슈가르는 슐랍국 때부터 실크로드 교역로의 중심지였다. 중국 내지에서 톈산(天山)남로를 통해 인도와 중앙아시아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카슈가르를 거쳐야 했다.
7세기 중반 슐랍을 찾은 당나라 승려 현장은 < 대당서역기 > 에 "물이 풍부하고 문물이 넘쳐나는 땅"이라고 적었다. 한 세기 뒤 카슈가르를 방문한 혜초는 < 왕오천축국전 > 에 "불심이 깊은 스님이 사찰에서 설법하고 주민들의 인심은 넉넉하다"고 남겼다.
658년 당나라 군대는 슐랍국을 침입해 멸망시켰다. 당은 서역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고 카슈가르에는 소륵도독부를 두었다. 중국 역대 왕조에 의한 간접적인 지배는 이때 시작됐다.
오늘날 중국정부는 카슈가르에 대한 지배 역사를 후한대까지 거슬러 올려놓았다. 73년 후한 시대 장군인 반초가 서역 원정을 벌인 것을 그 기원으로 삼고 있는데 반초가 대군을 이끌고 카슈가르, 호탄(和田)까지 침입했지만, 서역 국가들을 멸망시키진 못했다. 중국정부가 추진하는 서북공정으로 벌어진 역사 왜곡이다.
지금과 같이 카슈가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은 위구르인이 슐랍국의 정권을 잡으면서부터다. 투르크어로 카슈가르는 '옥(玉)이 모이는 곳', 즉 상업 교류지를 뜻한다. 몽골제국의 지배를 받을 때는 '녹색 지붕의 건물'이라 불리며 번성하는 이슬람교도의 상업 도시였다.
그 뒤에도 카슈가르의 지배자는 여러 차례 바뀌었지만, 바자르는 변함없이 번성해왔다. 당나라 역사서에 따르면, 당시 카슈가르 바자르에는 멀리 로마, 터키, 바그다드 등지에서 상인이 와서 무역 거래를 했다. 우리 옛 문헌에도 상업 요지 카슈가르에 대한 기록은 자주 등장한다.
▲ 당나라 수레를 타고 일요 바자르를 한 일가족. 바자르가 상설 시장화 되면서 말과 당나귀의 도심 진입도 금지되었다.
▲ 위구르인의 주식 중 하나인 양고기를 자르는 상인. 양고기는 바자르에서 가장 많이 거래되는 육류다.
중국 사회주의 정책으로 초토화됐다가 30여 년 만에 부활했으나
세월의 풍상에도 줄곧 발전해왔던 카슈가르 바자르가 격변을 맞이한 것은 중국 사회주의정권이 신장을 점령하면서부터다. 1960년대 신장에서 시행된 획일적인 인민공사정책과 문화대혁명의 광풍은 바자르를 초토화시켰다.
주변국과 무역 거래가 금지되면서 카슈가르 바자르의 명성은 퇴색했다. 홍위병들은 바자르에서 이뤄지는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자본주의의 폐해라며 금지시켰다. 10년 문혁의 광란이 끝난 뒤 1980년대 초 바자르는 다시 들어섰다. 전통적인 바자르처럼 정해진 건축물 안이 아닌 벌판 위에 세워지는 비상설 시장이었다.
▲ 집에서 기르던 비둘기를 파는 위구르 남자들. 위구르인은 관상용과 식용으로 비둘기를 좋아한다.
1984년 거래되는 물품이 늘어나고 중앙아시아 국가와 무역이 재개되면서 카슈가르 바자르는 되살아났다. 도심에 백화점, 슈퍼마켓, 상점 등이 하나둘씩 들어섰지만, 바자르를 대체할 순 없었다.
1992년 중시야 바자르로 새 이름을 얻은 카슈가르 바자르는 도약의 계기를 맞이했다. 구 소련이 해체되고 대외개방이 가속화되면서 변방무역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중시야 바자르는 나날이 발전하면서 199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일요 시장의 교역 인원이 20만 명에 달했다.
2004년 중시야 바자르는 또 다른 전환점을 맞게 된다. 시정부가 1억 위안(한화 약 185억원)을 투자하여 비상설 시장이던 바자르를 상설 시장으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전체 면적 19.9㎥, 건축 면적 8.6㎥로 확대되어 처음에는 420개의 상점이 실내 시장에 입주했다.
오늘날 중시야 바자르의 자본금은 시정부가 30%, 개인 상인이 70%를 소유하고 있다. 바자르 일대에서 등록된 상인은 3천여 명인데, 25년간의 영업 허가권을 갖고 있다.
카슈가르 바자르의 상설 시장화는 양면의 날과도 같다. 중시야 바자르는 중앙아시아의 주요 무역시장으로 자리매김했다. 파키스탄, 타지크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지에서 온 상인은 중시야 바자르에서 중국 상품을 사서 자국으로 가져간다.
위구르인들은 교류의 장으로서 바자르를 잃어버렸다. 옛날부터 1주일에 한 번 바자르가 열리면 카슈가르 일대 모든 위구르인들은 만사 제쳐놓고 바자르로 몰렸다. 이들에게 바자르는 물건 매매 뿐만 아니라 이웃과 소통하고 한 주의 피로를 씻는 화합의 장터이자 쉼터였다. 그저 시장의 기능만 남아버린 중시야 바자르에 더 이상 전통 바자르의 역할과 의미를 부여하긴 힘들다.
▲ 자파알쿠치 도매시장에서 거래되는 수박과 멜론. 오아시스 도시 카슈가르는 과일의 천국이다.
▲ 한 노천 영화관에서 터키어로 방영되는 영화를 보는 위구르 아이들. 바자르는 한주의 피로를 씻는 쉼터다.
상업보행가와 중시야 바자르, 그리고 또다른 바자르의 탄생
중국의 여느 시장과 별 차이가 없는 중시야 바자르는 카슈가르 상업보행가와 힘겨운 경쟁을 벌이고 있다. 위구르인은 중앙아시아 상인과 언어 소통이 수월한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일부 위구르인이 중국 상품이 아닌 터키와 인도산 상품을 선호해 이웃 국가 무역상은 중시야 바자르를 더 즐겨 찾는다.
하지만 상업보행가는 연해 지방 공장에서 직수입된 값싼 상품을 무기로 위구르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상업보행가에서 만난 한 위구르 여성은 "여기는 최신 유행의 의류와 액세서리를 싸게 판다"며 "쇼핑 환경도 쾌적하고 쉴 공간도 많아 좋다"고 밝혔다.
정형화된 중시야 바자르를 뛰어넘어 옛 바자르의 의의와 풍취를 되살리는 공간이 생겨나고 있다. 중시야 바자르에서 2㎞ 떨어진 아이진러티 바자르가 대표적이다. 아이진러티는 금세기 들어 작은 일요 비상설 시장으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중시야 바자르 못지않게 성장했다.
▲ 지난 몇 년 사이 새로이 들어선 아이진러티 바자르. 중시야 바자르와 달리 일요일에만 장이 서는 비상설 시장이다.
아이진러티 바자르에는 시장을 정리 정돈하는 관리요원은 없지만 암묵적인 규칙에 따라 무리 없이 물품이 거래된다. 먹을거리에서 의류, 가재도구, 건축자재 등까지 일상생활에 필요한 모든 상품이 사고 팔린다.
카밀(34)은 "매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아이진러티 바자르를 찾는다"고 밝혔다. 그는 "중시야 바자르와 달리 에누리 폭이 크고 중고품이 많아 필요한 물품을 싸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집에서 기르던 비둘기를 팔러 나온 한족 궈젠량(48)은 "아이진러티 바자르에서는 상품 구매 뿐만 아니라 물물 교환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양은 "본래 바자르는 금전이 오가는 시장이기도 했지만 서로 남고 넘치는 물품을 교환하던 장소였다"며 "아이진러티는 카슈가르 일대에서 옛 바자르의 정취를 보여주는 몇 안 되는 곳"이라고 전했다.
카슈가르인들이 아이진러티 바자르를 찾는 것은 물건을 사고팔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바자르는 말, 당나귀, 삼륜차 등을 타고 먼 길을 달려온 친지 및 친구와 만나는 장소다. 아이진러티 옆 자파알쿠치 도매시장에서는 갓 수확한 각종 과일이 거래되어 바자르를 더욱 풍성케 한다. 노천 식당과 영화관은 바자르를 찾는 사람들의 쉼터다.
우룸치에 사는 야곱(27)은 "우룸치 국제 바자르는 지방정부가 관여하여 상설 시장으로 바뀌면서 위구르인만의 활달한 생명력을 잃어버렸다"면서 "카슈가르, 호탄, 악수(阿克蘇) 등 일부 지역에서 바자르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했다.
▲ 현대화 된 이슬람식 건축으로 정비된 우룸치 국제 바자르. 깨끗하고 세련됐지만 바자르 본연의 역할과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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