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월화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사다함의 매화'라고 하며 비밀리에 손에 넣은 것이 바로 "대명력"이라는 달력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명나라 때의 역법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개글이 있어 이를 바로잡는 것은 물론 역대 역법의 발달과정을 간단하게 알아보고자 한다.
고대의 역법
역법은 태양이나 달의 운동과 같은 천체의 천문학적 주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우리가 과거 오랜동안 사용한 역법은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이었다. 태음태양력은 달에 의한 삭망월과 태양에 의한 회귀년을 어떻게 결합시키느냐가 역법의 근본이 된다. 즉, 음력의 성분인 삭(朔)과 양력의 성분인 기(氣)를 기본 요소로 하여 기와 삭을 맞추는 것이 기본 원리이다. 중국의 역법은 해와 달에 의한 단순한 음양력(陰陽曆)으로부터 시작하지만 한(漢)나라의 태초력(太初曆) 이후부터는 음양력의 추산 뿐만아니라 일월식(日月食)의 추보(推步)와 오행성의 운행과 위치를 계산하는 방법등이 포함된 광범위한 내용의 천체력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 대(漢代)에 들어서 왕조의 교체에 따라 "정삭(定朔)을 고친다"라는 원리가 확립되었고 그 후 왕조의 교체에 따라 천명사상(天命思想)에 입각한 개력(改曆)이 행하여졌다. 개력의 주된 내용은 윤달을 넣는 방법인 치윤법(置閏法)과 크고 작은 달의 배치법 그리고 절기(節氣)와 삭을 정하는 방법과 1년이나 1달의 길이 등을 나타내는 천문 상수의 개정을 포함하고 있었고 개력의 과정을 통하여 역 계산의 방법과 천문 상수 값들이 점차 개량되고 정밀화하였다. 그리고 관측 기술의 발달에 따라 해와 달의 운동에 빠르고 느림의 현상이 있다는 사실과 황도와 백도의 교점이 이동하며 동지 때 태양의 위치도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등이 발견되면서 관측으로 얻은 값들을 처리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들이 고안되었다. 즉 중국의 역법은 정확한 관측과 이를 처리하는 계산 기술의 발달과정에서 변화하고 발전하였다.
고육력(古六曆)
전국시대(戰國時代)와 진대(秦代)에 만들어진 여섯가지의 역법을 일컫는다. 황제력(黃帝曆), 전욱력, 하력(夏曆), 은력(殷曆), 주력(周曆), 노력(魯曆)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6 가지의 역법은 모두 365와 1/4일을 1회귀년으로 정하였기에 "사분력(四分曆)" 이라고도 한다. 고육력은 29 와 499 / 940 일을 한 삭망월로 하고 19 년중에 7 개의 윤월을 두었다. 고육력의 각각은 모두 같지가 않은데, 주로 역원(曆元)과 세수(歲首 : 한 해의 첫 달)가 같지 않다. 각 역법에서 사용하는 세수는 각각 달라서 황제력, 주력, 노력은 건자월(建子月, 동지가 있는 달)을 세수로 하고, 하력은 건인월(建寅月, 동지 후 두 번째 달)을 세수로, 그리고 전욱력은 건해월(建亥月, 동지가 있는 달의 전 달)을 세수로 하였으며, 은력은 건축월(建丑月, 동지가 있는 달의 다음 달)을 세수로 하였다. 육력은 오래전부터 있었으며 그 중의 전욱력은 고고 발굴에 의해 일부분의 자료를 얻었다.
전욱력(顓頊曆)
중국 고육력중의 하나로 진(秦)대에 만들어졌다. 구체적인 제작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진의 통일 후에 사용되었다. 한(漢)은 진의 제도를 계승하여 기원전 104년 한무제 때 태초력(太初曆)을 반행하기 전까지 전욱력을 사용하였다. 1회귀년은 365와 1/4이고 1삭망월은 29와 449/940일이며 19년에 7개의 윤월을 두었고, 세종치윤(歲終置閏: 윤달을 한 해의 마지막말에 두는 치윤법)을 하며 건해(建亥)의 달, 즉 맹동지월(지금 하력의 10월에 해당)을 세수로 하며 입춘을 일년의 절기 시작의 기점(起点)으로 계산한다.
태초력(太初曆)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태초(太初) 1년(기원전 104년)부터 실시한 역법으로 등평(鄧平)이 처음 만들었다. 태초력의 1삭망월(朔望月)은 29와 43/81일, 1회귀년(回歸年)은 365와 385/1539일이다. {사기(史記)}의 [역서(曆書)]와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의하면, 한나라 초기 이래 답습해 쓰던 진(秦)나라의 전욱력을 사마천(司馬遷)과 낙하굉(落下[마을문 굉]) 등이 주도하여 태초력으로 개력했다 한다. 개력의 주요 내용은 10월을 세수(歲首)로 하였던 것을 정월 세수로 바꾼 것, 동지를 11월로 고정시킨 것, 중기(中氣)가 있는 달을 윤달로 하는 방법을 채택한 것 등을 들 수 있다. 태초력은 한나라 말기 유흠(劉歆)이 이를 다시 보수하여 삼통력(三統曆)이라고 이름하였으며 85년 후한(後漢)의 개력 때까지 188년 동안 쓰였다.
삼통력(三統曆)
전한(前漢) 수화(綬和) 2년(기원전 7년) 경학가이자 천문학자인 유흠(劉歆)이 태초력을 수정해서 만든 것이다. 역법 중에는 한편의 『춘추(春秋)』와 기타 고사를 설명하는 삼통력보(三統曆譜)가 있다. 삼통력과 삼통력보는 {한서(漢書)} [율력지(律曆志)]에 수록되어 있어 지금까지 이를 볼 수가 있으나 태초력은 잃어버렸다. 삼통력은 기본상 태초력의 수치를 채용했으나 28수(宿)와 동지점 위치등의 수치는 고쳤다. 그리고 천문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역(易)․계사전(繫辭傳)』중의 신비수치를 끌어들여 태초력의 기본 수치를 해석하는 등 삼통력의 신비함을 나타냈다. 삼통력은 전한의 경학가인 동중서(董仲舒)의 역사 순환론을 역법에 사용하였다. 이는 후세의 역법 개혁에 나쁜 영향을 가져왔다. 삼통력이 아직 시행되기 전에 유흠은 왕망 집단의 내부 모순으로 살해당했고 왕망 본인도 농민의기중에 사망했다. 그러나 삼통력의 내용이 바로 태초력이므로 태초력은 계속 후한의 원화(元和) 원년(84)까지 실시되었다 할 수 있다.
사분력(四分曆)
사분력은 흔히 1회귀년을 365와 1/4일로하고 1삭망월을 29와 499/940일로, 그리고 19년에 7개의 윤월을 둔 역법을 가리키나 구체적으로는 후한(後漢) 원화(元和) 2년(85)에 실시한 역법을 가리킨다. 고육력도 사분법을 사용하였기에 구분을 하기 위해 역사에는 고육력을 "고사분력"으로 칭하고, 사분력을 "후한사분력"으로 칭했다. 사분력은 동지점을 고사분력의 견우(牽牛) 초도(初度)의 위치에서 두(斗) 21과 1/4도로 고쳤고 황도도수로 해와 달의 운동과 위치를 계산하였다. 이는 오행성이 회합(會合)하는 주기 수치의 정확성을 높였고 또 실제 관측수치로 28수의 적도도수와 황도도수, 24절기의 태양위치와 혼단중성(昏旦中星: 새벽과 황혼시에 남중하는 별), 주야누각(晝夜漏刻: 물시계를 사용하기 위한 낮과 밤의 각수)과 구영장단(晷影長短, 그림자 길이의 길고 짧음)등의 중요수치를 얻었다. 사분력이 정한 수치는 모두 태초력보다 정확하고 삼국의 위(衛) 원제 함희(咸熙) 원년(263)까지 사용되었다.
건상력(乾象曆)
달의 부등운동을 처음으로 역계산에 도입한 역법으로 후한(後漢)의 건안(建安) 11년(206) 유홍(劉洪)에 의해 완성되었다. 삼국의 오(吳)나라 황무(黃武) 2년(223)에 사용하기 시작하여 오나라 말년(280)까지 모두 58년 동안 사용되었다. 건상력은 365와 145/589일 = 365.2462일을 1회귀년과 29와 773/1457일 = 29.53054일을 1삭망월로 정하여 이전의 역법보다 정확했다. 한 근점월의 매일 실제 운행도수를 정하고 매일의 실제 운행도수와 평균 운행도수의 차를 열거했다. 또 후한(後漢)에 들어와서 달의 부등운동이 연구되어져 근지점에서 달의 운동속도가 가장 빨라지고 또 근지점 자체가 이동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 달의 궤도와 황도를 구별했고 이들의 교점이 이동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이러한 지식이 건상력에 도입되어 달의 근지점의 이동주기(8.9697년)와 황백도 교점의 역행(逆行) 주기(18.604년)등을 기록하였다.
경초력(景初曆)
위(魏)의 경초(景初) 원년(237) 양위(楊偉)에 의해 완성되었다. 유홍(劉洪)의 건상력에 기초를 두었는데, 건상력은 전욱력과 사분력에 비해 연월의 길이를 너무 감축시켰다 하여 경초력에서는 이 값을 약간 늘렸다. 건상력에서 비로소 달의 운행의 계산이 상세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이어받은 경초력에서는 일식계산에 현저한 진보가 있었다.
원가력(元嘉曆)
경초력이 천상과 맞지 않자 하승천(何承天)이 제작한 원가력으로 개력하여 원가(元嘉) 22년(445)부터 사용하였다. 원가력에서는 오성(五星)의 계산기점을 각각 달리하였고 조일법(調日法)을 도입하였다. 이것은 주로 한달의 길이를 계산할 때, 특히 그 날의 단수를 분수로 나타내는데 관측 값을 강약의 두 분수로 가둬놓고 이 강률(强率)과 약률(弱率)부터 점차로 관측 값에 가깝게 하는 방법이다.
대명력(大明曆)
남북조의 송(宋)나라 대명(大明) 6년(462)에 조충지에 의해 완성되었다. 1회귀년의 길이를 365.2428일로 정하였는데 이는 현대의 측정치와 약 0.0006일, 즉 일년에 52초의 차이가 난다. 이 값은 통천력(1199) 이전의 제일 좋은 수치이다. 대명력은 우선 세차(45년 11월이 1도 차이가 나고, 현대의 측정치는 70여년에 1도 차이가 난다)를 역법의 계산에 사용하여 역법 계산의 정확성을 높혔다. 이미 19년 7윤의 옛 치윤법을 버리고 조충지는 391년 144윤의 새로운 치윤법을 사용하여 이를 천상에 더 부합하도록 했고 교점월의 일수를 27.21223일로 정확하게 측정하였다 이 값은 현대의 27.21222일과 다만 1초의 차이가 있다. 목성(중국 고대는 "세성"으로 불렀다)의 공전주기는 12×84/85=11.858년으로 측정하여 현대의 측정치 11.862년과 아주 근접하다. 조충지의 생전에는 대명력을 실시하지 못했으나 훗날 그의 아들인 조항의 노력으로 그가 죽은 후 10년, 즉 양(梁)의 천감(天監) 9년(510)에 정식으로 시행되었고 80년간 사용되었다.
황극력(皇極曆)
수(隋)의 유작에 의해 604년에 제작되었다. 불행히도 시행되지는 못하였으나 정사(正史)인 『수서(隋書)』「율력지(律曆志)」에 실릴 정도로 중시되는 역법이다. 유작은 그의 황극력에 태양의 부등운동에 따라 빠르고 느림의 현상이 생기는 일행영축(日行盈縮)의 법을 고려하는 정기법(定氣法)과 676년에 249개의 윤달을 두는 파장법(破章法)을 채용하였고 조충지의 세차법(歲差法)을 채택하였다. 한편 교식(交食)과 오행성의 계산에 진보된 수치를 썼으며 계산 방면에 있어서는 가우스(Gauss) 보간법에 필적할만한 새로운 보간법을 창안하여 사용하였다.
대업력(大業曆)
수(隋)의 장위현(張胃玄)이 편찬하였다. 대업(大業) 4년(608)부터 시행되었으나 유작의 신랄한 지적을 받아 수명이 짧았다. 대명력을 따랐지만 북제(北齊)의 장자신(張子信)이 발견한 태양운행의 영축(盈縮, 빠르고 느림의 부등운동)을 도입하였다.
무인원력(戊寅元曆)
부인균(傅仁均)에 의해 만들어져 무덕(武德) 2년(619)부터 사용된 역법이다. 기본상 장위현이 편찬한 대업력(大業曆)의 계산방법을 사용했다. 처음으로 정삭(定朔)을 채택하고 상원기년(上元紀年)을 사용하지 않는 2가지 개혁을 하였는데 모두 보수세력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정삭법(定朔法)은 월상(月相)과 역일이 잘 맞게 되고, 일월식의 예보에 도움이 되지만 큰 달이 4회 계속되기도 하고 작은 달이 3회 계속되기도 하는 단점이 있다. 무덕 9년(626) 최선위가 부름으로 무인원력을 교정하고 또 상원기년을 회복했다. 정관(貞觀) 18년(644)에 다음 해의 역보를 추산했는데 9월에서 12월까지 모두 대월(大月)인 것을 발견하여 사람들이 모두 문제를 삼자 정삭을 또 평삭으로 고쳤다.
인덕력(麟德曆)
무인력의 연사대월(連四大月, 4개월이 계속해서 큰 달이 드는 것)이 물의를 빚자 인덕(麟德) 2년(665) 이순풍(李淳風)이 고종에게 새로이 만든 역법을 진상하였으니 이것이 인덕력이다. 인덕력은 건봉(乾封) 원년(666)부터 개원(開元) 16년(728)까지 63년에 걸쳐 사용되었으며 일본에서는 의봉력(儀鳳曆)의 이름으로 사용되었다. 인덕력은 수(隋)나라 유작의 황극력(皇極曆)을 답습하여 약간의 증손을 가하여 제작되었다. 그믐날의 일식을 피하기 위하여 근삭지법(近朔之法)을 창시하였고, 고래로 사용하던 장부기원법을 폐지하고 모두 총법 1430을 분모로 통일하여 계산기술의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대연력(大衍曆)
승(僧) 일행(一行)에 의해 편찬되었다. 개원(開元) 13년(725)부터 편찬을 시작하였는데 개원 15년(727)에 초고가 완성되었다. 일행이 죽은 후 그의 계승자인 중서령 장설과 역관 진현경이 다음 해에 완성되었다. 대연력은 역수(易數)를 가지고 부회(府會)했기 때문에 후세로부터 비난을 면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이 점이 대연력의 매력이기도 했다. 개원 17년(729)부터 32년간 사용하였다. 내용은 평삭망(平朔望)과 평기(平氣)를 포함하여 72후, 태양과 달의 매일의 위치와 운동, 매일 관측한 별자리와 주야시각, 일식, 월식과 오행성의 위치등이 있다. 대연력은 처음으로 "정기(定氣)"의 개념을 제출했고 그것으로 태양운동표를 만들었다. 역법에 사용된 많은 수치는 당시 실제 관측한 값들을 사용하였다 당대(唐代)에 이미 존재한 기타 역법보다 정밀하고 비교적 앞서는 역법이었다. 개원 21년(733)에 일본에 전해져 근 100년간 사용되었다.
오기력(五紀曆)
762 년의 월식 예보가 적중하지 못하자 인덕력(麟德曆)과 대연력(大衍曆)의 양법을 절충하여 만든 오기력(五紀曆)을 시행하였다.
선선명력(宣明曆)
대연력(大衍曆) 이후 가장 훌륭한 역법이라고 칭하던 선명력은 당에서 목종(穆宗)의 장경 2년(822)부터 소종(昭宗)의 경복(景福) 원년(893)까지 71년간 시행되었다. 서묘(徐昴)에 의해 편찬된 선명력의 대략은『신당서(新唐書)』역지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즉 선명력은 장경 2년(822)의 천정동지(天正冬至: 역원이 되는 해의 동지)를 역원으로 하는데 이는 상원갑자(上元甲子)의 해로부터 7,070,138년이 되는 해이며, 일월오성의 칠요(七曜)는 28수(宿)의 적도수도(赤道宿度)가 허(虛) 9도 되는 곳을 계산의 기점으로 하였다. 선명력의 천문 상수는 모두 분(分)의 값으로 나타내고 있다. 선명력에서 1일(日)은 8400분(分) 이므로 천문 상수 값의 일수(日數)를 구하기 위해서는 상수 값을 1일의 분 값인 8400으로 나누어 주어야 한다. 이 값은 선명력에서 통법(統法)이라 하여 계산시에 분모로 사용한다. 선명력은 일식(日食)의 추보에 3차(差) 즉, 시차(時差)와 기차(氣差) 그리고 각차(刻差)를 고려하여 계산하였으며 절기의 계산에는 평기법을 그리고 삭의 계산에는 정삭법을 채택하였다.
숭현력(崇玄曆)
경복(景福) 2년(893) 변강(邊岡)에 의해 제작되어 14년간 시행되었다. 상감상승법(相減相乘法)을 채택하여 사용하였는데 이 방법은 변수를 χ로 할 때 χ(α -χ)로 나타내는 보간법이다.
구집력(九執曆)
구집력은 당대(唐代)에 번역된 인도의 천문서로 그리이스 천문학의 영향을 받았다. 구집(九執)이란 Sanskrit어 nava-graha의 음역으로 일월오성(日月五星)의 칠요(七曜)에 나후와 계도(計都)의 이은요(二隱曜)를 포함한 구요(九曜)를 뜻한다. 120권으로 된 대당개원점경(大唐開元占經)의 104권으로 전하는 구집력은 신당서(新唐書) 역지에 간단하게 소개되어있을 뿐 중국에서는 제대로 소개되지 않았었다. 구담싯달(瞿曇悉達)에 의해 편찬된 대당개원점경은 주로 점성술의 기술과 중국에서 받아들여진 다른 manic arts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구집력은 예외적으로 인도의 수학적 천문학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대당개원점경은 당나라 시대에는 대중들에게 개방되지 않았고 그 이후에도 비서(秘書)로서 감추어져 오다가 명나라 말기 정명선(程明善)에 의해 불상 속에서 발견되어 알려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아주 소수의 중국 학자들이 구집력을 볼 기회가 있었고 이 책을 연구한 사람은 오직 청(淸)의 고관광(顧觀光: 1798-1861)과 서유임(徐有壬) 뿐이었다고 한다.
숭천력(崇天曆)
송행고(宋行古)에 의해 제작되어 천성(天聖) 원년(1023)부터 42년간 시행되었다. 북송을 통해 가장 오래동안 사용된 역법이다. 상감상승의 법을 써서 적도도(赤道度)로부터 황도도(黃道度)를 구하는데, 응천력(應天曆), 건원력(建元曆), 의천력(儀天曆)의 역법에 비해 약간 정밀하게 되었다.
점천력(占天曆)
휘종때의 관천력(觀天曆)이 숭녕(崇寧) 2년 11월에 삭을 병자로 추산한 것이 착오가 있었기 때문에 요순보(姚舜輔)가 점천력을 만들어 11월의 삭을 정유로 고쳤다. 그러나 점천력이 사가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고증을 거치지 아니하였으므로 시행할 수 없다하여 다시 기원력을 만들도록 명령을 내렸고 또 점천력은 산실되었다.
기원력(紀元曆)
송(宋)을 대표하는 선력(善曆)으로 요순보(姚舜輔)에 의해 제작되어 숭령(崇寧) 5년에 시행되었다. 세차는 73년에 1도의 차로 계산하였고, 화성과 토성의 두 행성을 계산하는 방법이 비교적 정밀하였다. 또한 금성에서 태양까지의 원근으로써 해가 뜨고 지는 전후에 별의 도수를 측정해서 황도의 지점을 얻었는데 이것은 매우 독창적인 방법이었다.
통원력(統元曆)
남송 초기에는 기원력을 사용하였으나 소흥(紹興) 6년(1136)에 진득일(陳得一) 이 상납한 통원력을 반포 시행하였다. 그러나 사천감관(司天監官)은 여전히 기원법을 암용하여 추산하였다. 세차는 78년에 1도의 차이가 난다.
통천력(統天曆)
송대(宋代) 경원(慶元) 5년(1199)에 사용한 역법이다. 양충보(陽忠輔)에 의해 만들어졌다. 통천력은 상원기년(上元紀年)을 사용하지 않고 29.530594일을 삭망월로하고 365.2425일을 1회귀년으로 했으며 지구가 태양을 따라 1주도는 실제 주기와 비교하여 다만 0.0003일(26초)이 많고 현재 국제적으로 사용하는 그레고리력의 1년의 길이와 완전히 일치하나 그레고리력은 1582년에 이르러서야 로마교황 그레고리 13세(Gregorius XIII)에 의해 시작하였으므로 이는 통천력보다 383년이 늦은 것이 된다. 통천력은 회귀년의 길이가 변화하는 것을 처음으로 역법에 적용하였는데 이는 천문학사상 중요한 발견이었다.
대명력(大明曆)
기원력(紀元曆)을 바탕으로 제작된 금의 역법으로 1127년 양급(楊級)에 의해 편찬되었다. 금은 1127년에 있었던 정강(靖康)의 변 때에 북송(北宋)의 수도를 공략하여 그곳에 있었던 역서와 천문 의기들을 모두 몰수하여 가져갔다. 금의 학자들은 이 천문 의기들을 사용하여 천문 관측을 하였고 북송으로부터 얻은 기원력을 바탕으로 금의 역법을 정비하였다. 이 역법이 양급에 의해 편찬된 대명력이다. 금에서는 1137년 양급의 대명력을 시행하기전까지 요의 역법인 가준(賈俊)의 대명력을 사용하고 있었고 원사(元史)의 유병충(劉秉忠) 전(傳)에도 금나라에서 제작된 두 종류의 대명력이 가준의 법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논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양급의 대명력이 기원력 뿐만 아니라 가준에 의한 대명력의 영향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중수대명력(重修大明曆)
양급(楊級)에 의해 편찬되었던 대명력(大明曆)에 다시 보수를 가하여 1180년에 새로이 제정한 금(金)의 역법으로 조지미(趙知微)에 의해 편찬되었다. 두 역법은 일법(日法)이 같고 조지미의 역을 중수대명력이라고 하는 사실로부터 중수대명력은 양급의 역을 보수 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1281년 수시력이 시행되기 전까지 원(元)에서 사용되었으며 수시력의 편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경오원력(庚午元曆)
요(遼)의 일족으로 천문역법에 능했던 야율초재(耶律礎材)가 1216년에 "서정경오원력(西征庚午元曆)을 편찬하여 태조 징기스칸에게 받쳤는데 이는 사마르칸드에 주재하던 태조가 중수대명력에 의한 월식의 추산이 잘못되어 예보가 맞지 않자 새로운 역을 제작하도록 명하였기 때문이었다. 경오원력은 중수대명력과 주요상수와 추산법이 같고 대명력의 오류를 정정함과 아울러 그 지역에 적합한 역법으로 편찬한 것으로서 원(元)에서는 극히 잠정적으로 시행되었다. 경오원력의 주목할 만한 점은 이차법(里差法)응 사용한 것이다. 이는 동일 현상이 지방에 따라 그 시각이 같지 않고 시간차가 생기는 것을 알고 이를 역법에 도입한 것으로 이차(里差)란 곧 경도차를 의미한다.
수시력(授時曆)
원대(元代)에 사용되었던 역법으로 왕순(王恂), 곽수경(郭守敬)과 허형(許衡)등에 의해 만들어졌다. 고어(古語)의 "경수민시(敬授民時)"에 의해 이름을 얻었다. 지원(至元) 1년(1276)부터 편찬을 시작하여 지원 17년 겨울에 완성이 되자 지원 18년(1281)부터 사용하였다. 수시력은 기원력에 바탕을 둔 중수대명력과 중수대명력에 보정을 가하여 만든 경오원력의 장점을 채용하였으며 동시에 적년(積年)과 일법(日法)을 폐지하고 1년의 길이에도 변화가 있음을 계산하는 소장법(消長法)은 통천력을 따랐다. 수시력을 만들기 위하여 곽수경등의 제작자들은 간의(簡儀)와 규표(圭表)등 10여가지 천문기구를 만들어 사천대(司天臺)를 건축하고 사해의 측정을 하였으며 대량의 천문관측과 천문측량 사업을 진행했다. 곽수경과 왕순등은 또 한대(漢代) 이래의 40여 가지의 역법을 분석하고 각 역법의 장점을 취하였고 자신들의 연구 성과를 첨가하였다. 그들은 수시력중에 초차법(招差法)을 사용하여 태양과 달 그리고 행성의 영축일(盈縮日: 평균 운행속도보다 빠르거나 느리게 움직이는 일수) 운행의 도수를 구했고 또한 호시할원술(弧矢割圓術)를 사용하여 황경, 황위와 적경, 적위지간의 환산을 했다. 수시력의 정확도는 아주 높았다. 365.2425일을 1회귀년으로 했고 29.530593일을 1삭망월로 했다. 이는 정식으로 상원기년(上元紀年)을 폐지하고 지원 17년(1280) 11월의 동지시각을 역원으로 했으며 모두 실측에 의한 수치를 사용하는등 기존 역법의 방법을 모두 바꾸어 사용했다. 명나라에서 사용한 대통력(大統曆)도 실제의 내용이 수시력에 속하고 다만 이름을 바꾸어 약간의 수정을 가했을 뿐이어서 두 역(曆)의 사용시간을 연속 계산하면 모두 364년이기 때문에 수시력은 중국 역사상 가장 오래 사용된 역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충선왕 때 최성지(崔誠之)가 드려와 시행하였는데, 1442년에 이르러 수시력과 대통력을 참고하여 칠전산내편(七政算內篇)을 편찬하면서 완전한 이해가 가능해졌고, 1653년 시헌력(時憲曆)으로 바꿀때까지 사용하였다.
대통력(大統曆)
명(明)나라 때의 역법. 명나라 건국 초에 태사원사(太史院使) 유기(劉基)가 무신대통력(戊申大統曆)을 만들고, 1370년에는 대통민력(大統民曆)이 나왔지만, 이는 모두 원(元)나라의 수시력(授時曆)에 따른 것이다. 1384년에 누각박사(漏刻博士) 원통(元統)이 수시력에 약간의 수정을 더하고, 그 해를 역의 기원으로 한 대통력법통궤(大統曆法統軌)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기에 전해져 1653년(효종 4) 시헌력(時憲曆)을 쓸 때까지 통용되었다.
숭정역서(崇禎曆書)
명대(明代) 천문역법의 총서이다. 서광계(徐光啓)가 주편했으나 서광계가 죽은 후 이천경(이천경)이 책임하였다. 숭정(崇禎) 2년(1629)부터 시작하여 숭정 7년(1634)에 완성했다. 전서는 모두 137권이다. (1)법원--천문학이론 (2)법수--천문표 (3)법산--천문학중 계산에 꼭 필요한 수학지식(주로 삼각법과 기하학) (4)법기--천문의기지식 (5)회통--중서각종 도량단위의 환산표이다. 주요 특징은 제곡(第谷, Tycho Brahe)의 우주체계를 사용하고 지리 개념을 인용하여 경위도의 개념 및 이와 관련된 측정계산 방법이다. 기하학과 구면 및 평면삼각법을 사용하였다. 엄격한 황도좌표계를 채용하여 적도부터 계산한 90도 위도제와 12차 계통의 경도제를 사용하였다. 역법상에는 철저하게 정삭, 정기를 사용하여 2번 동지간의 13개월중 그 한 해에 중기가 없는 달을 윤월로 했다. 역서가 편성된 다음 명나라 멸망될 때까지 정식 편력에 사용되지 못했다. 청나라 초기인 1628년 탕약망(湯若望, Adam Shall)에 의해 103권으로 삭감하여 또한 이름을 서양신법역서(西洋新法曆書)로 고쳤다.
역상고성(曆象考成)
하국종(何國宗)과 매각성(梅殼成)이 서양신법역서(西洋新法曆書)가 세월이 흘러 어긋나는 것이 잦자 강희(康熙) 황제의 칙명에 의해 1721년 새롭게 편찬한 천문역산서이다. 주로 티코브라헤(Tycho Brahe)의 천문학에 기초하면서 서양신법역서의 단점을 보완하였다. 이것은 다시 서양인 선교사 대진현(戴進賢)에 의해서 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編)으로 개정되었다.
역상고성후편(曆象考成後編)
역상고성후편은 예수회 선교사 쾨글러(Igatius Kogler, 중국명은 戴進賢)가 옹정제(雍正帝)의 칙명을 받아 케플러(Johannes Kepler)의 타원궤도설과 카시니(Cassini, 중국명은 喝西尼)의 관측치와 관측법을 도입해 1742년에 편찬한 역법서다. 보통 역상고성전편의 계산법을 신법(新法) 또는 매법(梅法)이라 부르며, 후편의 계산법을 구법(舊法), 대법(戴法) 또는 갈법(喝法)이라 부른다.
시헌력(時憲曆)
청대(淸代)에 사용한 역법이다. 명나라 숭정(崇禎) 1년(1644) 5월 청나라군대는 북경에 들어왔으며 독일 예수회선교사인 탕약망은 서광계등이 편저한 숭정역서를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수정을 거쳐 103권으로 압축하여 청나라 정부에 바쳤다. 청은 이를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서양신법역서라고 불렀고 또한 이를 근거로 만든 일용역서가 있어 시헌력이라고 불러 청나라 세조 순치(順治) 2년(1645)에 頒行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시헌력은 서양신법역서와 역상고성 그리고 역상고성 후편에 의한 세 가지의 추보 방법이 있었다.
회회력(回回曆)
명나라 홍무(洪武) 15년(1382)에 이충, 오백종(吳伯宗)에게 명하여 서역의 아라비아역을 번역하게 한 것으로 그 실제의 번역과 편찬은 아라비아 천문학자인 마사역흑(馬沙亦黑, Mashayihei)의 손에 의해 홍무 17년(1384)에 이루어졌다. 고대 그리스의 알마게스트(Almagest)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역법으로 원(元)나라 때 중국에 전래되어 명대(明代)까지 쓰였다. 일식과 월식의 추산법은 수시력보다 우수했다. 회회력은 윤월(閏月)을 쓰지 않는데 365일을 1세(歲)로 하고 1세를 12궁(宮)으로 해서 궁에 윤일(閏日)을 두었다. 모두 128년에 궁윤(宮閏) 31일을 두게 된다. 또한 354일을 1주(周)로 해서 1주(周)를 12월(月)로 하고 월(月)에 윤일(閏日)을 두었다. 모두 30년 동안에 월윤(月閏) 11일을 두었고, 1941년만에 궁(宮), 월(月), 일(日), 신(辰)이 다시 만나게 된다. 회회력의 계산 방법은 근본적으로 재래의 중국 역법과 다른 것이 많으며 기하학적인 방법과 방대한 관측자료에 의한 수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444년 이순지(李純之), 김담(金淡) 등이 칠정산외편을 편찬하면서 회회력이 도입되었다.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칠정산내편은 세종 26년(1444)에 편찬된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이다. 원(元)나라의 수시력을 기본으로 하면서 명(明)나라에서 편찬된 유기(劉基)의 대통력과 원통(元統)에 의해 수정된 대통력통궤(大統曆通軌)를 참고로 하였다. 수시력을 따라 지원(至元) 18년 신사(辛巳)를 역원(曆元)으로 했다. 과거를 상고(上考)할 적에는 100년마다 주천(周天)을 1초(秒)씩 줄이고, 세실(歲實, 1회귀년의 길이)은 1분(分)을 늘였다. 미래의 앞 날을 측험(測驗)할 때에는 100년마다 주천도는 1초 늘리고, 세실은 1분 줄였다. 또한 한양(漢陽)에서의 하지․동지때, 해 그림자의 실제 길이에 의거하여 매일의 일출입주야(日出入晝夜)의 시각을 구해 우리나라에서의 기준을 정해 썼다.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
칠정산외편은 명나라에서 편찬된 이슬람의 회회력을 연구 · 교정하여 만든 역법으로 칠정산내편과 함께 세종 26년(1444)에 편찬되었다. 명나라 역관(曆官)들의 주관하에 한역(漢譯)한 회회력법에 약간의 오류가 있음을 알게 되었으므로 세종은 이순지와 김담에게 명하여 회회력을 다시 교정하여 칠정산외편을 편찬하게 하였다.
출처 : 한국천문학사 http://ruby.kisti.re.kr/~anast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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