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中國風景

오악(五嶽)의 중악(中岳) 숭산(嵩山)과 소림사(少林寺:Shaolinsi)

마장골서생 2009. 3. 5. 00:00

오악(五嶽)의 중악(中岳) 숭산(嵩山)과 소림사(少林寺:Shaolinsi)

 

 중국에서 Song Shan (중국간체: 嵩山; 병음; Sōng Shān)으로 알려진 숭산은, 도교 5대 명산의 하나로 중국 황하강의 남쪽 기슭의 하남(河南:Henan)省 서부(西部),등봉(登封)市 서북면(西北面) 위치하고 있다.

 최고봉은 어채산(御寨山)으로 해발 1,512m이다. 산 중에는 세 첨봉이 있는데 중간을 준극봉[峻極峰], 동쪽을 태실봉[太室峰], 서쪽을 소실봉[少室峰]이라고 한다.

 소실봉 북쪽 기슭의 소림사(少林寺:Shaolinsi)는 선불(彿;Chanfo)교의 탄생지이고, 오늘날 까지 중국에서 가장 많은 사리탑이 남아 있다.

 중악묘(中岳廟:Zhongyue)도 이곳에 있는데 도교의 가장 초기의 사원중 하나다. 근처의 중악학교는 고대중국의 4대 교육기관 중 하나다. 숭산과 그주변은 도교 그리고 특히 불교의 수도원으로 인기를 끌었다. 중악탑(中岳答)도 여기에 있다.

숭산 숭악사(嵩岳寺)에는 523년 북위(北魏)때 건축된 12각 15층의 숭악사탑(嵩岳寺塔)이 있다. 숭악사는 수당(隋唐)시대에 북종선(北宗禪)의 중심이었던 절인데, 이 벽돌식 탑은 중국에서 몇 게 되지 않는 온전한 6세기 탑의 하나이며 가장 초기의 것으로 알려진 다층 처마답이다. 당시에는 대부분 목재로 탑을 쌓았고 대부분은 소실되었다.

불교의 융성은 중국건축에 극적인 영향을 주었다. 6세기에, 불교는 급속하게 중국전체로 퍼져나갔다: 중국문화는 인도불교의 예배형태에 전통을 포함시키면서 조화되고 개조되었다.

 부처의 유골을 봉안하기 위해 건축된 숭악사탑은, 인도 사리탑의 중국버젼이다. 사리탑은 초기 유골 고분(古墳)으로 인도에서 탄생했다. 숭악사탑의 독특한 다변모양은 인도불교의 원형형태에 직각형태의 중국건축술의 조화를 최초로 시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탑의 주변부는 올라갈수록 줄어든다. 이것은 인도와 중앙아시아 불교의 동굴사원 기둥과 그후 중국의 원형 탑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 탑 모양이 인도불교가 원형임을 말해준다.

 

소림사는 도선(道宣:Dao-xuan)의 속고승전(續高僧傳: Xu seng chuan, AD645)에 의하면, 북위(北魏:Beiwei)의 효문제[(孝文帝:Xiao wen di)]가 중국 오악의 하나인 숭산의 서쪽 소실(少室:Shaoshi)산의 북쪽에 건축하였다. 양현지(楊衒之:Yang Xuanzhi)의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Luoyang Qielanji,  547) 그리고 이현(李賢 Li Xian)의 명일통지(明一統志:Ming Yitongzhi, 1461)의 기록 위치도 도선과 일치한다. 가경중수일통지(嘉慶重修一統志:Jiaqing Chongxiu Yitongzhi;1843)에 의하면 북위(北魏) 태화(太和:Taihe) 19年(497)에 지어졌다고 한다.

 

 (:Qing)의 둘째 황제 강희(康熙:Kangxi)제는 하남의 소림사를 후원하고 친히 사액(賜額)을 내려 오늘날에도 정문에 걸려있다.

527년 소림사에 온 인도승 보제달마(菩提達摩:Putidamo, Bodhidharma)가 소림사에서 무술을 소개했다고 하지만, 소림사의 대명사가 된 무(武)의 수련은 보제달마의 재직 이후 700년 까지는 소개 되지 않았다. 보제달마가 인도의 브라만계급의 일원으로 요가와 인도남부의 잡랍리말아도(卡拉里帕亞圖:Kalarippqyqttu)의 무도에 정통했지만, 전설의 쿵푸를 창조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소림사에 부임했을 때 수행에만 매달리기에는 대부분의 수도승이 부실해서 명상에 전념한 강한 육체를 유지할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달마동입구................

 

단비구법(斷臂求法)

달마의 제자가 되었을 때, 눈 속에서 왼팔을 절단하면서까지 구도(求道)의 성심을 보이고 인정을 받았다는 전설로 유명한데, 이것은 후에 <혜가단비(慧可斷臂)>라는 화제(畵題)가 되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빛을 돌이켜 거꾸로 비춘다'라는 뜻으로, 불교의 선종(禪宗)에서 언어나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 마음 속의 영성(靈性)을 직시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사람이 죽기 직전에 잠시 온전한 정신이 돌아오는 것을 비유하기도 한다.

 

안심법문(安心法門)

어느 날 혜가(慧可)가 달마에게

 ‘마음의 평화를 구할 수가 없습니다. 스승께서 마음의 평화를 주시기를 비옵니다’라고 부탁하자

달마는

‘그대의 그 불안한 마음을 내게 가져오라. 마음의 평화를 주리라’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혜가는 마음을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고 되물었다.

이에 달마는 ‘찾을 수 있다면 어찌 그것이 그대의 마음이겠는가? 나는 벌써 그대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었느니라‘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혜가가 크게 깨달았다. 스승에게 다시 그 가르침을 문자로 기록할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달마는 ‘나의 법은 마음으로써 마음에 전하느니라. 문자를 쓰지 않느니라(以心傳心 不立文字)’라고 말하였다

장(藏)자의 획이 빠진 것도 소림사의 고행을 표현한듯~

 

소림사는 파괴와 재건이 여러 번 반복되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732년 청대(淸代)에 반청운동의 혐의로 파괴된 것이다. 이런 파괴는 절을 빠져나온 승려들에 의해서 무공(武功)이 중국 전역으로 확대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런 이야기는 통상 영화의 무공 역사나 창작의 소재가 된다

1928년 석우삼(石友三:Shi Yousan) 장군은 장경각(藏經閣)의 많은 문서를 포함해 건물의 90%를 파괴했다. 1966년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사원을 포함한 종교교단이 목표가 되었다. 홍위병등이 공격할 때 절에 있던 5명의 수도승은 체포되어 그들을 비난한 죄를 시인하는 승복에 새기게 하였다. 수도승들은 구금된 후 그들에게 쓰레기를 던지는 거리를 통과해 걸으면서 공개적인 처벌을 받았다. 정부는 사원 내부의 불교신앙을 숙청하고 발붙이지 못하게 하였다. 

 

세계의 무림은 소림사와 토지를 보존하기 위해 기부를 하였고, 그 공로가 사원입구 근처의 돌에 새겨져 있다. 과거, 많은 사람들은 숭산에 그들 소유의 학교를 세워 소림사를 사유화 하려 하였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사실 이것을 법외로 간주했고, 학교를 근처 마을로 모두 옮겼다.

 어떤 법(法:Dharma) 모임은 중국 숭산 소림사에 주지 석영신(釋永信:Shi Yong Xin)을 공식장문으로 추대하는 회의를 1999년 8월 19과 20일에 개최했다. 그는 Xue Ting Fu Yu 이후 13대 방장이 되었다. 2006년 3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이 소림사를 방문한 첫 번째 외국 지도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