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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황진이[黃眞伊, 1520?-1560?] - 차라리.. 평생 그리워 하며 살겠다.

마장골서생 2006. 11. 10. 18:15
   황진이- 차라리.. 평생 그리워 하며 살겠다.  



황진이 [黃眞伊, ?~?]  

조선시대의 시인 ·명기(名妓).  
별칭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 명월(明月)
활동분야  예술
출생지  개성
주요작품  《만월대 회고시》《박연폭포시》《봉별소양곡시》

일명 진랑(眞娘). 기명(妓名) 명월(明月). 개성(開城) 출생. 중종 때 진사(進士)의 서녀(庶女)로 태어났으나,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시(詩) ·서(書) ·음률(音律)에 뛰어났으며,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15세 무렵에 동네 총각이 자기를 연모하다가 상사병(相思病)으로 죽자 기계(妓界)에 투신, 문인(文人) ·석유(碩儒)들과 교유하며 탁월한 시재(詩才)와 용모로 그들을 매혹시켰다. 당시 10년 동안 수도(修道)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天馬山) 지족암(知足庵)의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하여 파계(破戒)시켰고, 당대의 대학자 서경덕(徐敬德)을 유혹하려 하였으나 실패한 뒤, 사제관계(師弟關係)를 맺었다.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며 난숙한 시작(詩作)을 통하여 독특한 애정관(愛情觀)을 표현했다. ‘동지달 기나긴 밤을 한허리를 둘에 내어’는 그의 가장 대표적 시조이다. 서경덕 ·박연폭포(朴淵瀑布)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작품으로 《만월대 회고시(滿月臺懷古詩)》《박연폭포시(朴淵瀑布詩)》《봉별소양곡시(奉別蘇陽谷詩)》《영초월시(?初月詩)》 등이 있다.
  
송도삼절 [松都三絶]  

송도(개성)의 서경덕(徐敬德)·황진이(黃眞伊)·박연폭포(朴淵瀑布)를 일컫는 말.  
개성 명기(名妓) 황진이가 당시 개성의 명사인 고승(高僧) 지족선사(知足禪師)와 명유(名儒) 서경덕을 유혹하였는데, 지족선사는 그녀의 유혹에 빠져 파계를 하였으나, 서경덕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으므로 후대인이 서경덕·황진이와 박연폭포의 절경을 한데 묶어 송도삼절이라 하였다

조선 최고의 기생 황진이  

조선시대에 수많은 기생이 그이름을 남겼으나 역시기생은 기생다운 행동을 해야기생 입니다.한남자에 매달려서 정절을 지킨다면 이미 기생이 아니고 여염집 부녀나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기생은역시 황진이처럼 고결하다는 선사도 넘보고 아름다운시도짓고 이렇게 기생다워야 기생인 겁니다.

황진이(1520?-1560?,개성)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개성(송악)의 기생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정확한 생존연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녀가 1520년대에 나서 1560년대쯤에 죽었을 것이라는 것만, 황진이와 사귄 사람들의 일화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황진이 어머니는 진현금이란 아전의 딸로서 그다지 미인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느날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데 마침 지나가던 황진사의 아들과 서로 반하였다. 둘은 정을 통하였지만 결혼은 할 수 없는 사이였다. 이후 진현금은 딸을 낳았는데, 바로 황진이다. 세월이 지날수록 황진이의 거침없는 성격과 미모는 돋보이기 시작했다. 황진이가 15세 되던해의 일화이다.황진이가 글을 읽고 있는데 지나가던 상여가 황진이의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황진이를 사모하다가 상사병으로 죽은 동네 총각의 상여였던 것이다.황진이가 소복을 입고 밖으로나가 자기 치마를 벗어 관을 덮어주며 슬프게 곡을 하였더니 그때서야 상여가 움직였다. 사람들은 이일로 인하여 그녀가 기생이되었다고도한다.

황진이는 첩의 딸로서 멸시를 받으며 규방에 묻혀 일생을 헛되이 보내기보다는 봉건적 윤리의 질곡 속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였다. 그 결심을 실천하자면 당시 그의 신분으로서는 불가능하였으므로 오직 길이라면 기생의 인생을 걷는 것이었다. 황진이는 부모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적에 입적하게 되었다. 황진이가 기생이 되자 각지의 내노라 하는 풍류객들이 그녀를 보기 위해 송도에 몰려들었다. 당시만 하여도 전국에 공식적으로 약 3만 명의 기생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개성에는 유명한 학자와 선승이 있었으니, 학자는 곧 화담 서경덕선생이요, 선승은 지족암에서 三十년동안을 면벽참선한 지족선사였다. 지족선사는 생불이라고 불릴 만큼 덕망이 높았다. 황진이는 평소에 두사람을 다 흠모하던 중 한번은 그 인물의 됨됨이를 시험하여 보려고 먼저 화담선생을 찾아가서 수학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조금도 난색이 없이 승낙하였다. 황진이는 얼마 동안 선생에게 공부를 하러 다니다가 하루는 밤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선생의 침실에서 같이 자며 공부하기를 청하니 선생은 또한 허락하였다. 그렇게 수년 동안을 한방에서 동거하는 중에 황진이는 별별 수단을 다 써서 선생을 유혹시키고자 하였으나 선생은 목불과 같이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황진이는 이미 여색의 경지를 넘어선 화담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히 말했다. “역시 선생님은 송도 3절의 하나이십니다.” 화담이 나머지 둘은 무엇이냐고 묻자 “하나는 박연폭포요, 다른 하나는 접니다”라고 당당히 답했다. 그 뒤로 이들 셋은 고려 왕도였던 송악에서 가장 빼어난 것으로 여겨졌다.

 황진이는 이와 같이 서화담을 한번 시험하여 본 뒤에 다시 지족선사를 시험하여 보려고지족암을 찾아갔다. 황진이가 제자로서 수도하기를 청하니 지족선사는 여자는 원래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처음부터 절대 거절을 하였다. 황진이는 며칠 있다가 다시 소복 단장으로 청춘과부의 복색을 하고 지족암으로 가서 그 선사가 있는 바로 옆방에다 침소를 정하고 자기의 죽은 남편을 위하여 백일간 불공을 한다고 가칭하며 밤마다 불전에 가서 불공을 하는데 자기의 손으로 축원문을 지어서 청아한 그 좋은 목청으로 처량하게 읽으니 그야말로 천사의 노래와도 같고 선녀의 음률과도 같아서 아무 감각이 없는 석불이라도 놀랄만 하거늘 하물며 감정이 있는 사람으로서 그 누가 감히 귀를 기울이고 듣지 않을까 보냐. 이와 같이 며칠 동안을 계속하여 불공축원을 하니 노선사가 처음에는 무심하게 들었으나 하루 이틀 들을수록 자연히 마음에 감동이 생겨서 그 三十년 동안이나 잔뜩 감고 옆에 사람도 잘 보지 않던 눈을 번쩍 떠서 황진이의 태도를 한번보고 두 번 보니 보면 볼수록 선계의 정념은 점점 없어지고 사바의 욕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불과 며칠에 황진이와 서로 말을 붙이게 되니 황진이는 예의 그 능란한 교제술과 영롱한 수완으로 그 선사를 마음대로 놀리어서 최후에는 그만 파계를 하게 되니 지금가지 세상에서 쓰는 「망석중 놀리듯 한다」는 말이라든지 「십년공부 아미타불」이라는 말은 그 사실을 일러서 하는 말이다

「청산리벽계수야 쉬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이 시조는 황진이가 지은 시조로서 몇 백년이 된 지금까지도 세상에서 흔히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노래를 지은 출처에 있어서 또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숨어있다. 그때에 왕족중에서 벽계수 이은원이 있었다. 그는 황진이 소문을 듣고, 만일 내가 그 계집을 본다면 침혹은 커녕 천하 요망스러운 년이라고 당장에 호령을 하여 축출하겠다고 장담을 하였었다. 이야기를 들은 황진이는 그가 얼마나 고결한가 한번 시험에 보리라 하고 중간에 사람을 놓아 벽계수를 유인하여 만월대구경을 오게 하였는데 때는 마침 만추시절이라 중천에 월색이 교교하고 만산에 낙엽은 소소하여 누구나 감개한 회포가 일어날 즈음이었다. 황진이는 단장소복으로 숲속에 숨어 있다가 연연히 나와서 이씨의 말고삐를 휘여잡고 위에 적은 노래를 한곡조 부르니 이씨가 월하에서 그 어여쁜 자태를 보고 또 청아한 노래를 들으니 스스로 심신이 황홀하여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부지중에 말에서 떨어져서 창피를 당했다고 한다.

황진이의 연정 가운데 가장 짧았던 건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과 나눈 사랑. 두 사람은 애초 30일을 기한으로 애정생활에 들어갔다. 날을 채운 뒤 소세양이 떠나려 하자 황진이는 시 한 수로 발걸음을 잡아맸다.

“달빛 어린 마당에 오동잎은 지고/ 차거운 서리 속에 들국화는 노랗게 피어 있네/ 다락은 높아 하늘과 한 척 사이라/ 사람은 취하여 술잔을 거듭하네/ 물소리는 거문고 소리를 닮아 차가웁고/ 피리 부는 코끝에 매화 향기 가득하도다/ 내일 아침 이별한 뒤에는/ 우리들의 그리움은 푸른 물결과 같이 끝이 없으리라”

두 사람의 사랑이 그 뒤 얼마나 지속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건 황진이가 소세양과 헤어진 뒤에도 그리움에 찬 나날을 보낸 점이다.

서경덕이 죽고 난 후 황진이는 서경덕의 발걸음이 닿았던 곳을 두루 찾아다녔다고 한다. 금강산, 지리산, 속리산, 묘향산을 막론하고 그의 체취가 남아 있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았다. 나이도 서른을 훨씬 넘기고 있었다.

여러 곳을 두루 구경하고 집으로 돌아와 여독을 풀고 있는데, 담 밖에서 남자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듣자니 분명 서울의 풍류객 이사종이겠다 싶어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며칠을 함께 보냈다. 이사종이 함께 살자며 설득하자 황진이는 망설이다가 40세가 되는 6년 동안만이라고 다짐을 받았다. 6년이 지나자 이사종은 그녀를 붙잡았으나 황진이는 살림살이를 정리하고 송도로 돌아갔다.

황진이는 이와 같이 일생을 지내다가 사십 내외에 불행히 병에 걸려 죽었다. 그는 죽을 때에 집안 사람들에게 유언하되 『나는 평생에 여러 사람들과 같이 놀기를 좋아하였은 즉 고적한 산중에다 묻어주지 말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에다 묻어주며, 또 평생에 음률을 좋아하였은 즉 장사지낼 때에도 곡을 하지 말고 풍악을 잡혀서 장례를 지내달라』하였다. 그의 무덤은 몇 백년 전까지도 송도 대로변에 있었다. 천하의 호협 시인 백호 임제 같은 이는 평안도사로 부임하던 길에 일부러 제문을 지어가지고 그의 무덤에까지 가서 제를 지내 주었다가 그것이 언관에게 말썽거리가 되어 그 일로 좌천까지 된 일이 있었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www.hunii70.com.ne.kr/epis/jinei.htm  

 황진이사랑의 노래

먼저 황진이가 누구인지 알아보자. 황진이(黃眞伊). 그녀는 조선 중종 때의 송도(松都, 지금의 개성) 기생이다. 정사(正史)에 기록된 것이 없으니 당연히 그녀의 정확한 생몰년대는 모른다. 다만 여러 야사에 전하는 내용들을 종합하여 추정해 보면 중종 6년경에 태어나 중종 36-7년경에 죽었으니, 미인단명(美人短命)이란 말이 있듯이 그 나이는 겨우 30세 전후이다. 여러 야사에 전하는 황진이의 삶 중에 가장 흥미를 끄는 것은 지족선사(知足禪師)와의 관계, 그리고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의 사랑 이야기이다.

지족선사. 당시 송도 인근에는 아주 유명한 스님이었다. 면벽 10년의 묵언수행(默言修行). 그는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벽만을 바라보며 반쯤 감은 눈을 아래로 깔고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그렇게 수행하기를 10년.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을 그는 오로지 벽을 향하여 앉아 한 마디 말도 않은 채 정말이지 장승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송도에서 한창 이름을 날리던 황진이도 그의 명성을 들었다.

요즘처럼 비가 오락가락하는 여름날. 황진이의 장난기(?)가 발동했다. 왕실의 종친이라는 유학자 벽계수도 무너뜨린 그녀가 아닌가. 그녀는 홀로 지족선사가 수행하고 있다는 굴을 찾아간다. 마침 비가 내려 흠뻑 비에 젖었다. 겉옷을 벗어 들었다. 하얀 속옷 치마 저고리. 비에 젖은 옷은 그녀의 몸매를, 아니 알몸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벽을 향하여 앉은 지족의 옆에 살며시 다가간 황진이.(이 부분을 가장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는 소설이 최인호의 <황진이>이다) 결국 '끙'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지족은 황진이의 품에 무너져 내리고, 이 때 생긴 말이 '십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란다.

 다음은 서경덕. 조선 중종 때의 유명한 도학자이다. 1489년에 태어난 그는 18세 때에 <대학>을 배우다가 '격물치지(格物致知 사물의 이치를 연구하여 지식을 명확히 함, 혹은 자기 마음을 바로잡고 선천적인 좋은 지식을 갈고 닦음)'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 원리에 의지하여 학문을 연구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과거 시험에는 뜻이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명령으로 사마시(司馬試 생원과 진사를 뽑는 작은 규모의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했을 뿐 벼슬살이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오로지 도학에만 전념하였다. 집은 극히 가난하여 며칠 동안 굶주려도 태연자약하였으며, 제자들의 학문이 진취된 것을 볼 때에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평생을 산림 속에 은거하여 산 것을 볼 때에는 세상에 대한 뜻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정치의 잘못을 들을 때에는 개탄함을 금하지 못해 임금께 상소를 올려 잘못된 정치를 비판했다고 한다.

이 서경덕이 바로 송도 부근의 성거산(聖居山)에 은둔하고 있을 때였다. 자연히 그의 인물됨이 인근에 자자하게 소문이 났고, 그 소문을 황진이도 들은 모양이었다. 벽계수와 지족을 무너뜨린 기세를 몰아 황진이는 서경덕에게도 도전을 한 모양이었다. 지족에게 썼던 수법을 그대로 서경덕에게 옮겼다. 하얀 속치마 저고리, 그 위에 흘러내린 비. 비에 젖은 하얀 비단 속옷이 알몸에 밀착되어 가뜩이나 요염한 기녀의 몸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런 차림으로 계속 비를 맞으며 서경덕이 은거하고 있던 초당으로 들어갔다. 물론 서경덕 혼자 있는 집이었다.

그러나 서경덕은 지족과 달랐던 모양이었다. 조용히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은 오히려 황진이를 반갑게 맞이했고, 비에 젖은 몸을 말려야 한다며 아예 황진이의 옷을 홀딱 벗긴 모양이었다. 옷을 벗기고는 직접 물기를 닦아주는 서경덕의 자세에 오히려 황진이가 부끄러울 판이었다. 그래도 황진이는

"저도 사내인 것을……"
하며 은근히 오기를 가졌던 모양이었다. 황진이의 몸에서 물기를 다 닦아낸 서경덕은 마른 이부자리를 펴 황진이를 눕히고는 몸을 말리라고 했다. 그리고는 다시 꼿꼿한 자세로 글읽기를 계속했다. 날은 어두워졌고 이윽고 밤이 깊었다. 황진이가 잠을 잘 수 있겠는가. 삼경쯤 되자 이윽고 서경덕이 황진이 옆에 누웠다.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이내 가볍게 코까지 골며 편안하게 꿈나라로 가버리는 서경덕. 아침에 황진이가 눈을 떴을 때 서경덕은 이미 일어나 밥까지 차린 모양이었다. 대충 말린 옷을 입고는 부끄러워서라도 황진이는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며칠 후.
진이는 성거산을 다시 찾았다. 물론 의관을 제대로 갖추고 음식을 장만하여 서경덕을 찾아갔다. 역시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이 이번에도 반갑게 맞았고, 방 안에 들어선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큰절을 올리며 제자로 삼아달라는 뜻을 밝혔다. 빙그레 웃는 서경덕. 이 후의 일은 상상을 할 수 있다. 어느 야사에도 서경덕이 황진이와 놀아났다는 기록은 없다. 둘의 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오직 흠모 혹은 존경이라는 단어뿐이다.

황진이가 문득 서경덕에게 이렇게 말했다. <송도에는 꺾을 수 없는 것이 세 가지가 있사옵니다.> 서경덕이 황진이를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첫째가 박연폭포요, 둘째가 선생님이십니다.> 서경덕이 미소를 지으며 셋째를 물었다. <바로 저올시다.> 송도에 있는 것 중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세 가지 혹은 가장 뛰어난 세 가지. 송도삼절(松都三絶)은 그렇게 황진이의 입을 통해 만들어졌다. 서경덕도 동감이나 하는 듯이 소리없는 미소만 지었다고 한다.
서경덕이 아무리 도학자이고 뛰어난 사상가라고는 하나 당시의 신분으로 보면 양반이요, 그도 역시 사내다. 그러니 당연히 결혼을 했고 첩까지 두었다. 그리고 여자를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진이와의 관계는 왜 그렇게 아름답고 순수했을까. 이는 황진이도 마찬가지였다. 서경덕을 대하는 그녀의 자세는 스승을 대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오로지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었지 사내로서의 서경덕이 아니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성거산에 은거하여 살던 서경덕이 가끔은 황진이를 그리워했던 모양이다. 그가 남긴 시조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마음이 어린 후(後)니 하난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내 님 오리마난,
지난 닙 부난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마음이 어리석고 보니 하는 일마다 모두 어리석다, 만겹으로 구름이 둘러싸인 성거산에 어느 누가 나를 찾아오겠는가, 그런데도 불어오는 바람결에 떨어지는 낙엽소리를 듣고 혹시 그녀가 왔나 하는 마음에 방문을 열어본다. 대충 그런 뜻이다. 조선조의 벼슬아치나 유학자들이 임금을 생각하며 일반적으로 부르는 님이 아니다. 서경덕의 시조에서는 분명 여인을 그리는 남자의 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순수하고 가장 아름다운 현상이다. 서경덕이 이 시조를 부를 때에 누군가가(마당을 쓸던 하인일 수도 있고, 제자일 수도 있다) 들었던 모양이다. 그대로 황진이에게 전해졌다.

황진이는 어땠는가.
그녀 역시 비록 스승으로 서경덕을 모시고는 있지만 끔찍이도 그를 사모했던 모양이다.
서경덕이 부른 시조에 곧바로 화답한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야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난 닢 소래야 낸들 어이 하리오

 내가 언제 신의도없이 님을 속였겠는가, 절대 그런 일이 없다, 그런데 달 밝은 깊은 밤에 무기력하게 무엇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없다, 즉 허전하다, 가을 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까지 내가 어쩌겠는가. 이런 뜻이다. 분명 서경덕의 시조 종장에 대한 답이다. 나도 당신이 그리운 것을, 당신이 나를 그리며 나뭇잎 소리를 내 발걸음 소리로 착각하는 것까지 내가 어쩔 수 있겠는가, 뭐 그런 뜻이다. 그만큼 나도 당신이 보고 싶다는 말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들인가. 이렇게 아름다운 노래를 제쳐두고 교과서에는 황진이의 것으로 벽계수를 농락하는 내용의 시조가 실려 있다. 교과서 편찬자들의 심술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황진이의 사랑노래 몇 수를 더 들어보자.

청산(靑山)은 내 뜻이오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 못니저 우러 예어 가는고

흔히 산은 남성이요 물은 여성으로 해석한다. 황진이는 그것을 뒤집는다. 푸른산은 바로 자신이요 푸른 물이 님의 정이다. 님의 정이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고 해도 자신은 변하지 않고 있을 게란다. 그러니 님도 그 정을 못잊어 울며 지나간단다. 사랑도 이렇게 당당해야 하지 않을까.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情을) 나도 몰라 하노라

아, 내가 한 짓이라니, 그리워할 줄을 정말 몰랐단 말인가. 있어달라고 말했다면 님께서 가시지는 않았을 것을, 내가 갈테면 가라고 해놓고는 정말 님이 가버리자 이렇게 그리워할 줄을 진정 몰랐다. 요즘 쓰는 말로 여인의 자존심으로 한번 튕겨봤겠지. 그런데 정작 가버린 님을 그리워하면서 이렇게 그리워하고 있다니…… 얼마나 진솔한 노래인가. 한편, 이 노래를 들으면 황진이는 시조의 형식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 니 정형화되어 있는 시조의 형식 속에 자신의 생각을 자유자재로 배치해 놓는다. '제구태여'는 분명 종장에 연결될 내용이다. 그러나 중장의 마지막에 배치하여 그 감흥을 뒤집는다.

동짓(冬至)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버혀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너었다가
어룬님 오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시간과 공간을 자유자재로 조종하는 황진이의 모습을 이 시조에서 볼 수 있다.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 그 날의 밤 시간 중에 한 허리를 칼로 벤다. 그것을 봄바람처럼 따뜻한 이불 속에 넣어두었다가 님이 오신 밤이면 꺼낼 것이다. 님과 함께하는 밤이 얼마나 짧다는 생각이 들었겠는가. 그러니 가장 길다는 동지의 밤시간을 짤라 님과 함께하는 밤에 펼쳐 님과의 밤을 더욱 길게 만들겠다는 생각. 황진이다운 생각이다.

백호 임제가 과거에 급제하여 평양으로 벼슬살이 길을 가다 송도 어귀에서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술 한잔을 따르며 노래했다고 한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紅顔)은 어데두고 백골(白骨)만 묻혔나니
잔(盞) 잡아 권할 이 없을새 글로 설워하나이다

푸른 풀이 우거진 골짜기에 자는 것이냐 누워있는 것이냐, 어여쁜 얼굴은 어디 두고 하얀 뼈만 묻혀 있느냐, 술잔을 잡아 권할 그대가 없으니 어찌 아니 서럽겠느냐, 뭐 그런 내용이다. 물론 이 노래 때문에 평양에 도착하자마자 벼슬이 떨어졌다던가. 허허 웃었다던 임백호. 그 역시 서경덕과 마찬가지로 황진이를 알아본 인물이었다. 황진이의 시조들, 그 중에서도 사랑을 노래한 아름다운 시조들을 우리 젊은이들에게 꼭 읽히고 싶다.
정말이지 오늘 문득 황진이가 그립다


                           황진이(黃眞伊)

   황진이는 조선 중종 때 개성의 기생이다.
그러나 그녀의 정확한 생존연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녀가 1520년대에 나서 1560년대쯤에 죽었을 것이라는 것만 황진이와 사귄 사람들의 일화로부터 추측할 수 있다. 또 황진이의 출자(出自)가 황진사의 서녀라고 전해져 있지만, 그녀는 개성의 아전진(陳)가에서 기녀의 몸을 빌어 태어났다는 것과 그녀의 기명이 명월(明月)인 것만은, 종실 벽계수(碧溪守)와의 수응에서 확실한 것 같다. 당시만 하여도 전국에 공식적으로 약 3만 명의 기생이 있었다.
원칙의 불의 속에서 태어나 관원 남성들의 노리개 거리로 존재한 해어화(解語花)인 황진이가 왜 이렇게 유명하고 신화적(神話的) 조명까지 받아왔는가?

  그 원리는 간단하다. 당시, 사랑을 할 수 있는 장(場)은 기방(妓房)뿐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이 정신적인 세계에 머물지 않고 육감적(肉感的)인 것과 부합할 때, 그녀의 미모와 지성은 그런 전설을 불러일으킨 진원이 될 수 있다. 지금이야 그런 것을 초월 해서 전국민의 애인이 되었는데, 그 한몫은 황진이의 전설을 부연한 문인과 소설가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은 지금이나 예나 같은 심정이었던지, 황진이를 에워싼 인물로 야사(野史)에 전하는 것만, 철학자 서경덕(徐敬德), 재상 송순(宋純), 황진이와 동거했다는 종실(宗室),이언방(李彦邦), 재상 소세양(蘇世讓)등이 있고, 망신한 이로 지족선사( 知足禪師)가 있고, 진이의 사적을 기록한 이로서도 허균(許筠)과 이덕형(李德炯), 유몽인(柳夢寅)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백호( 白湖) 임제(林梯)는 황진이의 무덤에서 시조를 읊고 치제(致祭)했다 하여, 빈축을 사고 급기야 파직을 당한 것도 특기할 만 하다. 4백년 뒤, 이런 것을 많은 현대 문인들이 참여해서 다시 부연해서 황진이는 이제 기생으로서 전국민의 애인이 되었다. 황진이가 당시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해어화(解語花)로 존재했겠지만, 오늘날까지 숭앙을 받고 있는 것은 그녀의 문인(文人)다운 풍모, 즉 6수의 시조와 4수의 한시(漢詩)가 있기에 이를 받아들이는 조선 문치주의(文治主義) 전통이 지금도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

  시조야 기방의 가요니까 황진이가 손쉽게 지었다 치더라도 한시는 평측(平仄)을 맞춰야 하니까, 당시로서는 일정한 교양을 쌓아야 한다. 여기에서 황진사 딸이라는 전설이 나왔을 것이다. 그것은 황진이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고, 당시 사람들에게 사랑 받았을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더욱이 시조, "어뎌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로던가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난 졔 구태야 보내고 그리난 情(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병와가곡집>에서는 변칙적인 작법을 쓰고 있는 이 '졔구태야'의 용법 은 특기할 만하다. 그래서 몇 수 안되는 시조를 가지고 국문학사상 하나의 이정표(里程標)가 되어있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황진이를 육감적인 의미의 해어화로 파악할 수는 없다. 단지 그녀의 전설을 추체험(追體驗)하고 있는 것이다.

 ● 황진이(黃眞伊)의 작품 세계

  다정다감하면서 기예에 두루 능한 명기(名妓)였던 황진이는 시조를 통하여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주로 사랑에 관한 내용을 담은 그의 작품들은 사대부 시조에서는 생각할 수 없었던 표현을 갖춤으로써 관습화되어가던 시조에 활력을 불어 넣었다고 평가된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체념을 '靑山은 내 뜻'이라고 역설적인 자기 과시로 표현하거나. 왕족인 벽계수(碧溪守)를 벽계수(碧溪水)에 견주어 유혹할 수 있는 등의 재치는 황진이만이 할 수 있는 독보적인 것이다. 황진이의 시조에 이르러서야 기녀(妓女) 시조가 본격화되는 동시에 시조 문학이 높은 수준에 달했다고 할 수 있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munsu.new21.org/main.htm  

서경덕 [徐敬德, 1489~1546]  
 
조선 중기의 유학자·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
본관  당성
호  화담·복재
별칭  시호 문강
활동분야  문학
주요저서  《화담집》

본관 당성(唐城), 자 가구(可久), 호 화담(花潭)·복재(復齋), 시호 문강(文康)이며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의 아들이다. 화담이라는 호는 그가 송도의 화담에 거주했으므로 사람들이 존경하여 부른 것이다. 가세가 빈약하여 독학으로 공부를 하였고, 주로 산림에 은거하면서 문인을 양성하였으며,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조식(曺植)·성운(成運) 등 당대의 처사(處士)들과 지리산·속리산 등을 유람하면서 교유하였으며, 1544년 김안국(金安國)이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천거하였으나 출사하지 않았다. 학문경향은 궁리(窮理)와 격치(格致)를 중시하였으며, 선유의 학설을 널리 흡수하고 자신의 견해는 간략히 개진하였다. 또한 주돈이(周敦?)·소옹(邵雍)·장재(張載) 등 북송(北宋) 성리학자의 학문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단편 논저로는 〈원리설(原理說)〉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 네 편이 있는데, 이들 논저에는 '이(理)'보다는 '기(氣)'를 중시하는 주기철학의 입장이 정리되어 있다. 〈태허설〉에서는 우주의 근본원리를 태허 또는 선천(先天)이라 하고 태허에서 생성 발전된 만상(萬象)을 후천(後天)이라 하였으며, 〈귀신사생론〉에서는 인간의 죽음도 우주의 기에 환원된다는 사생일여(死生一如)를 주장하여 기의 불멸성을 강조하고, 불교의 인간 생명이 적멸한다는 논리를 배격하였다.

대표적 문인으로는 허엽(許曄)·박순(朴淳)·민순(閔純)·박지화(朴枝華)·서기(徐起)·한백겸(韓百謙)·이지함(李之函) 등이 있으며, 그의 학문은 남북분당기에 북인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황진이·박연폭포와 함께 개성을 대표한 송도3절(松都三絶)로 지칭되기도 하며,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일화는 시조작품으로도 전해질 만큼 유명하다. 노장사상으로 대표되는 도가사상(道家思想)에도 관심을 보여 도가의 행적을 기록한 《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그의 도가적인 성향이 소개되었다. 그의 학풍은 조선 전기의 사상계의 흐름이 주자성리학 일색만이 아니었던 분위기를 보여주며, 그의 문인들 중에서 양명학자나 노장사상에 경도된 인물이 나타나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의 주기철학을 유물론의 원류로 평가하여 그의 철학을 높이 평가한다.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과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으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있다.
  
 조선시대,고려시대 말기부터 받아 들여진 성리학이 조선시대에는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남자를 중요시 여기던 성리학의 영향으로 여자들의 위치는 점점 떨어졌다. 그 대표적인 예로 남존여비 사상(남자는 귀하고 여자는 천하다.) 삼종의 도(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결혼하고 나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따른다.)등이 있다. 이걸 보면 조선시대 여자들이 얼마나 천대 받았는지 알 수 있다. 여자들은 태어나면서 부터 차별대우를 받아 남자아이들은 글을 가르치고 여자 아이들은 바늘을 가르쳤다 한다. 또한 여자는 결혼하면 홍역을 하는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힘든 결혼생활을 했다. 한번 살펴보면은 남자는 여러 첩을 거느릴 수 있으나 여자는 질투를 하는 것조차 금기였다. 결혼하면 항상 남자의 말에 복종해야 하며 독수공방하기 일수 였다.뿐만 아니라 몸과 마음이 피곤하였으며 경제적 고통까지 격어야 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자살하는 여인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면 조선시대 기생의 삶은 어떠하였을지 알아보자(황진이가 기생이니 당연히 알아보는게 좋겠다.)
기생은 조선 8천중의 하나로 천민계급이다. 하지만 대하는 사람들은 고관대작이기때문에 여러 방면에 능통하여야 한다. 시, 산문, 노래, 가야금, 거문고, 그림, 춤등 고관 대작들을 대하기 위해서 매우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중에서도 그 실력이 아주 뛰어나 이름이 알려진 기생을 명기라고 했는데 쉽게 말하면 초 앨리트 기생이라고 할 수 있다. (황진이는 조선의 명기로 유명하다. 명기중의 명기 앨리트 중의 초 앨리트 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황진이에 대해서 알아보자.
본명은 진 기명은 명월이다. 조선 중기 개성(송도)의 명기로 유명하다.1520년대부터 ~ 1560년대쯤 살았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고 정확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황진이는 용모가 출중하고 예민하였으면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그의 어머니 진현금은 개성의 병부교 아래서 빨래를 하다가 황진이의 아버지 황진사를 만나서 그의 첩이 됐다고 한다.

황진이는 많은 남자를 쉽게말하면 후렸다. 그 명단을 공개해보자.
황진이가 10대일때부터 외모가 출중하여 여러사람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옆집 총각이 황진이를 짝사랑 하여 상사병에 걸렸다고 한다. 그런데 황진이의 어머니는 그 총각을 절대로 만날 수 없게 하여서 그 옆집 총각은 그만 상사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상여가 황진이의 집 앞을 지나다가 땅에 붙어서 움직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의 속저고리를 덮어주었더니 움직여서 갈 수 있었다고 한다. 황진이는 왜 자신때문에 그 나자가 죽었을까를 생각하며 기생이 됐다는 말이 있다.

두번째 남자는 개성 유수 송공이다. 대부인 연회석에 황진이를 초대 하였는데 그때 여러 사람들이 황진이의 빼어난 모습을 보고 반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황진이가 유명해 지게 된다. 황진이는 송공과 그전부터 함께 지낸 사이라고 한다.

세번째 남자는 선전관 이사종이다. 사신으로 송도를 지나다가 천사원 냇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 노래가 아주 출중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그 노래에 빠져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개성에 이사종이라는 사람이 노래를 잘 부른다는데 그사람인가 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알아보게 하였는데 정말 이사종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찾아가 서로 마음속에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는 이사종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여러밤을 함께 지냈다고 한다. 그러던중 마음에 들었는지 이사종에게 "내 마땅히 당신과 6년을 살아야 겠소"라고 말하고는 이사종에 집에 3년동안 먹고 살 돈을 가져 가서 살고 3년후 이사종을 자신의 집으로 대려와 살았으며 6년이 지난 후에는 깨끗이 헤어졌다고 한다. 이걸 보면 황진이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했으며 당당한 여자인지 알 수 있다.

네번째 남자는 양곡 소세양이다. 그 남자는 "남자가 여색에 혹함은 남자가 아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황진이와 30일을 지내고 깨끗이 끝내겠다라고 큰소리 쳤다고 한다. 황진이와 30일을 지낸후 황진이가 송별소양곡을 불렀다. 그걸 듣고 소세양은 나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황진이와 함께 몇일을 더 살았다고 한다.

다섯번째 남자는 왕족 벽계수이다. 벽계수는 황진이가 명사가 아니면 만나주질 안아 고민하다가 친구인 이달에게 물어 꽤를 내어 황진이 집근처 정자에서 노래 한곡을 크게 부르고 황진이가 따라와서 돌아보지말고 앞만 보고 갔다고 한다. 그때 황진이가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오기 어려오니 명월이 망공산할제 쉬어간들 어떠리"라고 읊었다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벽계수가 뒤돌아 보다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명사가 아니라 풍유랑이라 라고 말하고 돌아가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 노래는 벽계수 낙마곡으로도 유명하다.

여섯번째 남자는 이생으로 황진이가 말년에 금강산 유랑을 하고 싶어 하여 동행을 청해서 함께 금강산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갈때 이생이 먹을것을 짊어지고 갔는데 여행도중 다 떨어져서 곳곳의 절을 돌아다니며 황진이가 몸을팔아 음식을 얻었다고 한다. 여행이 끝나고 헤어졌다고 한다.

일곱번째 남자는 지족선사로 그는 면벽수련 30년이라고 유명했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지족선사를 찾아가 유혹했다고 하는데 얼마나 용모가 빼어났던지 면벽수련 30년을 깨고 파계승이 되어 버렸다고 한다.

마지막 남자는 황진이가 정말로 사랑한 서경덕이었다. 황진이는 서경덕의 학문이 높음을 듣고 서경덕에게 가서 유혹하였으나 넘어오질 않았다. 여러가지 방법을 써보고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서경덕은 의연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황진이가 감탄하여 "지족선사는 30년 면벽수련에도 내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서경덕은 함께 오랜 시절을 지냈으나 끝까지 나에게 이르지 않았으니 진정 성인이다."라고 말해고 서경덕에게 제자로 받아줄것을 부탁했다. 그래서 제자가 됐고 황진이는 서경덕 황진이 박연폭포이 세개를 송도삼절이라고 불렀다한다.

 서경덕을 위해서 황진이는 많은 시를 지은 것으로 보인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에 흐르나니 옛 물이 있을손가
인걸도 이와 같아 가고 아니 오노매라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라
녹수는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이 그리워 울어 예어 가는가


한편 송세양을 그리워 하며 쓴 시라고 전해지는 것도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혀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시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어져 내 일이야 그릴줄을 모로더냐
있으라 하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

                                                       황진이 VS 허난설헌  

-황진이/ 님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사랑의 시인’

-허난설헌/ 여인의 한과 설움 토해낸 ‘고독의 시인’

황진이와 허난설헌은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시인으로 작품성이나 완성도에서 쌍벽을 이룬다. 두 시인 모두 길지 않은 삶을 살았다. 하 지만 판이하게 다른 환경과 삶의 행로를 걸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시세계는 독자성을 지녀 극명한 차이점을 보인다. 황진이는 남성에 대한 그리움과 자연을 읊었고, 허난설헌은 여인들의 한과 설움을 토 해냈다.

허난설헌은 1563년 명문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경상감사를 지낸 허엽이 아버지이고,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으로 유 명한 허균이 동생이다. 좋은 집안 출신인 데 비해 생애는 순탄치 않 았다. 결혼이 불행의 단초를 제공했다. 남편 김성립은 허난설헌이 성 에 안 찼는지 바람을 자주 피웠다. 벼슬길에 나간 뒤로는 바람기가 더욱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와 불화까지 겹쳤다. 의지할 곳을 잃어버린 허난설헌은 뒤뜰 초당 한켠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 하며 동경해 마지 않는 생활을 글로 옮겼다.

“이윽고 돋은 달이 호수로 비쳐드니/연 캐던 조각배는 밤으로만 돌 아오네/저 배야 기슭으로는 들지 마라/단잠 든 원앙이 놀라 날겠다”

남편의 외도로 서러워진 허난설헌의 마음을 그나마 달래주던 건 아 이들. 허난설헌은 강보에 싸인 그 아이들마저 하나하나 저승사자 품 에 안겨줬다. 자식 잃은 어미의 심정은 눈물조차 겉으로 드러내지 못 할 만큼 한스럽다.

“작년에 딸을 잃고/올해는 아들을 잃었네/슬프디 슬프게 땅에 묻으 니/두 무덤이 마주 서 있네/백양나무 숲에서는 쓸쓸한 바람이 일고/ 소나무 숲에서는 도깨비불이 번쩍이네/지전으로 너의 혼을 불러/무덤 위에 술을 붓는다/나는 안다, 너희 남매의 혼이/밤마다 서로 같이 노 는 것을/내 비록 뱃속에 또 한 아이 있지만 어찌 가히 잘 자라기를 바라겠는가/하염없이 황대의 노래를 부르고/피눈물 흘리며 슬픈 소리 삼킨다”

불행은 허난설헌 곁을 떠나지 않았다. 친정이 당쟁에 휘말려 풍비박 산 났다. 오빠 허봉은 함경북도 갑산으로, 동생 허균은 남쪽으로 귀 양을 갔다. 5년 만에 귀양에서 풀렸으나 곧바로 과음과 화병이 겹쳐 폐병으로 죽어간 허봉을 귀양지로 떠나보내는 마음을 이렇게 읊었다.

“강물은 가을 되어 잔잔하고/구름은 석양에 막혔구나/서릿바람에 기 러기 울고 가니/차마차마 떠나지 못하네”

황진이는 허난설헌과 달리 남자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에게 사랑을 쏟아부은 이들은 주로 사회적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었다. 황 진이의 연정 가운데 가장 짧았던 건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과 나눈 사랑. 두 사람은 애초 30일을 기한으로 애정생활에 들어갔다. 날을 채운 뒤 소세양이 떠나려 하자 황진이는 시 한 수로 발걸음을 잡아 맸다.

“달빛 어린 마당에 오동잎은 지고/차거운 서리 속에 들국화는 노랗 게 피어 있네/다락은 높아 하늘과 한 척 사이라/사람은 취하여 술잔 을 거듭하네/물소리는 거문고 소리를 닮아 차가웁고/피리 부는 코끝 에 매화 향기 가득하도다/내일 아침 이별한 뒤에는/우리들의 그리움 은 푸른 물결과 같이 끝이 없으리라”

두 사람의 사랑이 그 뒤 얼마나 지속됐는지는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건 황진이가 소세양과 헤어진 뒤에도 그리움에 찬 나날을 보낸 점이 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도려내어/춘풍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오른님 오시는 밤이거든 구비구비 펼치리라”

기다림의 극치를 노래하고 있다. 길고도 긴 겨울밤에 잠까지 설쳐가 며 님을 그리워하는 심정이 애틋하기 그지없다.

황진이는 뭇사내들을 시험하는 쪽으로 애정행각을 넓혔다. 그의 미모 와 자태, 재능에 내로라하던 사대부나 문사들도 속절없이 무너져내렸 다. 송도 근처 깊은 산속 암자에 생불이라 일컫는 거사가 살았다. 사 람들은 그를 지족선사(知足禪師)라 불렀다. 하지만 30년 동안 수도한 그의 법력도 황진이 앞에선 맥을 못췄다. 황진이의 유혹에 그는 결국 파계를 하고 말았다. 왕족이던 벽계수도 같은 꼴을 당했다. 송도에 와서 자신의 의젓함을 뽐내던 그는 황진이를 보고도 모른 척 스쳐 지나갔다. 황진이는 시 한 수를 읊조렸고, 벽계수는 밝은 달밤에 낭랑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 마라/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 려워라/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황진이 말대로 벽계수는 송도에 머물며 짙은 사랑을 맛봤다. 황진이 의 자신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당대 제일의 학자인 화담 서경덕 을 찾아나섰다. 화담은 황진이의 온갖 교태와 아양에 그저 웃음만 지 었다. 황진이는 이미 여색의 경지를 넘어선 화담 앞에 무릎을 꿇고 정중히 말했다. “역시 선생님은 송도 3절(松都 三絶)의 하나이십니 다.” 화담이 나머지 둘은 무엇이냐고 묻자 “하나는 박연폭포요, 다 른 하나는 접니다”라고 당당히 답했다. 그 뒤로 이들 셋은 고려 왕 도였던 송악에서 가장 빼어난 것으로 여겨졌다. 황진이는 박연폭포를 송도 3절 중 하나로 평가할 정도로 자연에 애 착을 가졌다. 여기저기 풍광이 뛰어난 곳을 찾아다니며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박연폭포에 대한 시상은 여장부의 면모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마치 박연폭포를 눈앞에 두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 큼 묘사가 사실적이기도 하다.

“한 가닥 긴 물구비가 골짜기 틈에서 뿜어져나와/흉흉한 물결은 백 길의 용늪을 이루고/거꾸로 쏟아져내리는 샘이 구름인가 싶다/성난 폭포 비꼈으니 흰 무지개 완연하다/우박과 천둥소리 마을까지 넘치 고/구슬방아에서 옥이 부서져 허공에 치솟는다/구경꾼들아 말하지 마 오 여산의 승경이 좋다고/알거라 해동의 제일은 이 천마산임을”

황진이가 명사들과 사랑을 탐닉하며 자연을 노래한 데 비해 허난설 헌은 여인들의 고된 삶에 눈을 돌렸다. 자신의 불행을 이타심 배양에 활용한 셈이다. 동병상린은 〈빈녀음(貧女吟)〉에 잘 드러나 있다.

“손에 가위를 잡느라/추운 밤 열 손가락이 어네/남들 위해 시집갈 옷 지으면서/해가 거듭 돌아와도 혼자만 지내네”

외로움에 몸서리 치는 작중 인물은 허난설헌의 내면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붉은 비단 너머로 등잔불 붉은데/꿈 깨보니 비단이불의 한켠이 비 었네/찬서리 옥초롱엔 앵무만 속삭이고/뜰 앞에 우수수 서풍에 오동 잎 지네”

고독과 외로움에 지쳐서일까. 허난설헌은 2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뭇남성을 사랑하고 울렸던 황진이도 30대 중반에 인생의 허 무함을 느꼈다. 스쳐 지나간 사랑의 추억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이 아니로다/주야로 흐르니 옛물이 있 을소냐/인걸도 물과 같아 다시 오지 아니 하더이다”

사람도 어차피 한 번은 죽는 것. 죽으면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인생살이를 황진이 역시 40도 채 안 된 나이에 마감했다.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한 삶인가? 무엇을 해야 행복을 얻을 것인가? 누구에게나 한 번쯤 찾아드는 의문이다. 황진이와 허난설헌, 두 여인 의 생애와 시세계는 이같은 문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내용출처 : [기타] 인터넷 :
http://www.khan.co.kr/newsmaker/culture_science/n432d07.htm
출처 : 이선생의 블로그
글쓴이 : 이선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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