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文史哲/中國歷史

1989년 6월 4일 천안문 사태

마장골서생 2009. 6. 19. 22:33

중국이나 우리나라 역사에서 한 사람의 죽음이 평지풍파를 몰고 오거나 정치 지형의 큰 변화를 몰고 온 경우는 비일비재(非一非再)하였다. 1989년 6월 4일 중국 인민해방군이 수도 북경 천안문 광장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을 무력으로 해산시킨 천안문사건이 촉발된 것도 그 해 4월 15일 그 전 해에 실각한 총서기 호요방(胡耀邦, 후야오방)이 사망하자, 그를 추모하고 복원시켜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 데 따른 것이라면, 우리가 일차 천안문사태로 알고 있는 1976년 4월의 사태는 그 해 1월 주은래(周恩來, 저우언라이) 총리가 사망한 이후에 벌어진 것이라는 데서, 정치지도자의 죽음은 한 사회의 정치지형 및 미래에 주요한 변수가 될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1976년 1월 주은래 총리가 사망하자 그 장례식에서 당시 부총리이던 등소평(鄧小平, 덩샤오핑)은 조사(弔辭)를 읽으면서 농업, 공업, 군사, 과학기술 등 분야에서 현대화를 이루겠다는 이른바 ‘4개의 현대화노선’을 계승할 것임을 다짐하는데, 이것이 문화혁명을 일으킨 강경보수파들의 반발을 불러와 등소평을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강화된다. 이에 주은래 총리와 등소평 부총리의 노선을 지지하던 젊은이 등 시민들이 청명절인 4월 4일에 천안문 광장에 모여 인민영웅기념탑에 헌화를 하면서 대규모 추모행사를 가진다. 그런데 다음날 이들이 바친 화환과 조화가 어느새 말끔히 치워진 것을 발견한 시민들이 분노하면서 시공안국의 선전차를 부수는 등 폭동화하기 시작해 시민들과 정부 사이의 대규모 충돌로 이어지게 된다.

 

중국 당국은 이들의 시위를 철저히 분쇄하고 관련자들을 엄중히 처벌하는 한편 4월 7일 당시 사태의 책임을 물어 등소평의 모든 지위를 박탈하고 그를 어느 한적한 지방으로 쫓아낸다. 그러나 이러한 1차 천안문 사태는 그 해 9월9일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상황이 급전돼, 등소평을 밀어내었던 4인방이 실각되고 정권은 등소평 손으로 돌아와. 결국 등소평은 1978년부터 중국의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로부터 불과 10년 남짓 지난 1989년 봄, 중국이 개혁개방정책으로 경제적인 발전을 지속해나가자 정치적으로도 개방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그 해 4월 15일에 중국 당을 대표하며 정치적 민주화를 꾀하다 그 전 해에 실각한 호요방(胡耀邦)이 사망하자,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호요방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민주화를 이루자는 시위가 대학가 등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5월 13일에는 노동자 ·지식인을 포함한 광범위한 시민을 대표하는 대학생 대표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연좌시위를 시작하자 그 주위에 모이는 학생들의 숫자가 크게 늘어나면서 중국정부를 당황하게 한다. 정부는 이들의 해산을 요구하며 학생들과 대화를 시작했지만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가운데, 당 총서기 조자양(趙紫陽,자오쯔양)이 모습을 보이지 않고 강경파가 전면에 나서더니 결국 6월3일 밤 군대가 수도 북경에 진입해 한밤 중에 해산을 시도해 이 과정에서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결국 군의 발포로 많은 시위대들이 죽거나 다친 가운데 시위대들은 해산당한다.

 

 

  

1989년 6월 3일 필자는 중국의 수도 북경에 있었다. 당시 중국과 수교하기 전이었지만 KBS는 중국의 실크로드를 최초로 취재하기 위해 4명의 취재단을 파견해, 문명대(文明大) 전 동국대 박물관 장 등 4명의 동국대 교수들과 함께 약 한 달 동안 수도인 북경에서부터 당나라 대의 수도인 서안(西安,시안), 돈황(敦煌,뚠황), 투르판(吐魯蕃), 쿠차(庫車)를 지나 신강성(新彊省,신쟝성)의 수도 우르무치(烏魯木齊)에 이르는 5천 여 킬로의 답사와 취재를 마치고 막 북경에 돌아와 귀국을 앞 둔 때였다. 6월 3일 저녁 전취덕(全取德, 취앤쥐더) 북경오리구이 집에서 저녁을 하고 돌아오던 우리 회사식구 일행(몸이 안 좋은 필자를 제외한 세 명, 김주철 취재단장, 차병현 촬영감독, 강철원 촬영기자)은 수십 만 명이 모인 천안문 광장의 인파를 뚫고 거대한 인간터널을 구불구불 따라 들어가서 시위대 한가운데에 있던 시위지도부와 악수를 하기도 했다. 그들은 당시 ENG카메라를 갖고 있던 우리 일행을 외국언론인으로 보고 환대하는 호의를 베풀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인 통역이 현장에 따라가지 못해 우리 일행과의 만남은, 시위지도부의 활기찬 설명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악수 차원에 머물고 말았다. 다만 시민들 사이에서는 곧 군부의 진압이 있을 것이라는 우려 섞인 목소리들이 나기 시작했다.

 

 

그 일행들이 숙소인 캐피털 호텔(首都賓館)에 돌아와 피로와 주기(酒氣)로 쿨쿨 잠을 자고 있을 때인 자정 무렵부터 진압이 시작된 듯 총소리가 콩을 볶듯 요란하게 나기 시작했고,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던 필자가 창문을 열고 내다보니 수많은 인파들이 대로와 골목을 통해서 황급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이른바 천안문 사태의 현장이었다. 당시 한밤중이어서 광장 중심부를 가보기는 어려웠고, 가능한 대로 총소리가 날 때 마다 내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는데, 새벽 1시경, 2 시경, 4시 등 서너 차례 이런 과정이 이어지다가 6시 이후에는 사람들의 모습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는 아침 8시 경 우리가 있던 호텔 앞으로 중국군(인민해방군)이 도보로 진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앞으로 진군을 하면서도 옆이나 뒤에 경계의 눈초리를 감추지 않았다. 아마도 있을지 모를 시민들의 저항을 우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천안문사태로 얼마나 많은 시위군중들이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외부에서는 진실을 알지 못한다. 중국 정부측은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 군인들이 먼저 공격을 받아 피해가 커졌다며 죽거나 다친 병사들을 담은 사진집을 펴내기도 한다. 서방 언론들은 시위군중 수 천 명이 사망했다고 말한다. 가장 최근 발표된 미국 대사관의 당시 상황일지에 따르면 시간대 별로 군인들이 시위군중을 향해 때때로 조준사격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들은 6월4일 아침 숙소에서 멀리 가지는 못하고 그 주위를 돌아보았는데, 군데군데 시신들이 있었지만 이미 천안문광장은 청소가 되어 있어 참혹한 광경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외국특파원들은 우리가 있던 숙소가 아닌 베이징호텔(北京賓館)에 머물고 있다가, 거기서 창문을 통해 군인들의 진입광경을 취재,촬영하였다.  한국에 돌아와 있을 때인 1990년에 서울에서 만난 장철운(張鐵雲)이라고 하는 흑룡강성 출신의 한 공산당 간부(청년공산당인 공청단의 지역 간부)는 중국 군인들이 더 많이 죽었다며 이렇게 국민들로부터 많은 수난을 당한 정부가 없다고 말한다. 그 말의 진위는 확인할 수 없는 바, 어찌됐든 무력을 통한 해산과정에서 중국의 경찰이나 군인들의 사상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굳이 비교를 한다면 시위군중 측의 사상자가 훨씬 컸을 것임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으나, 다만 홍콩언론이나 서방측 언론들이 주장하는 만큼 사상자가 수천 명 수준은 아닐 것이라는 것이 당시 시내를 돌아 본 필자의 느낌이다. 그러나 당시 북경 시민들은, 중국의 군대인 인민해방군을 자신들의 해방군으로 인식하고 있던 차에, 자신들에게 총을 발포한 데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때의 그 사건(사태) 이후 정확히 2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사상자 숫자의 진위를 따지기는 어렵다. 그런데, 되돌아본다면 1차 천안문 사태 때에는 피해자였던 등소평이  왜 1989년의 2차 천안문 사태 때에는 유혈사태가 뻔한 무역진압을 결정했는가 하는 점이 궁금하다. 당시 등소평은 공식적으로는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을 맡고 있었지만 배후에서 중국 지도자들의 역할을 조정하며 중국을 이끌어왔다. 20년 전 천안문 사때 때에는 초기에는 조자양 등 급진적 개혁파의 입장을 용인했으나 결정적으로 이 시위사태를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군을 동원하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등소평이 군 동원을 주도했는지, 혹은 양상곤(楊尙昆,양상쿤)이나 이붕(李鵬, 리펑) 같은 강경파들의 주장에 따른 것인지는 확실히 드러나지는 않는다.

 

누가 그 결정을 주도했던 간에 등소평으로서는 제1차 천안문사태 때부터 추진하려 했던 중국의 현대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정치적인 안정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는 미국이나 유럽의 선진국들과 같은 수준의 정치적인 자유를 줄 수가 없다는 판단을 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자발적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한 서구와는 달리 그러한 과정이나 경험이 없기 때문에 곧바로 완전한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보았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노회(老獪)한 등소평은 자신의 발언집 등에서도 그런 정황을 속시원히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지명한 후계자들을 통해서 우선은 경제발전, 그리고 그 다음 사회발전과 정치발전이라는 전략을 밀고 나간 타입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결정은 당시에는 군대를 동원해 시민들의 요구를 유혈진압한 것으로 해서, 전세계로부터 민주화를 가로막는 폭압이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 중국이 그 때 보다 훨씬 빠르게 경제가 발전해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할 정도로까지 성장한 것을 보면, 그의 결정이 어느 정도 현실적인 당위성을 인정받는다고 할 것이다. 만약 당시에 중국정부가 시민들이 요구하는 수준의 민주화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중국으로서는 이를 통제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당시 10년을 막 넘긴 중국의 개혁개방은 오늘과 같은 경제적인 번영으로 곧바로 달려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겨우 20년으로 한 사람이나 나라의 정책결정을 완전히 평가하기는 어렵다. 중국이 정치적인 자유를 더 많이 확보했더라면 그동안의 중국인들의 인권유린이 그만큼 더 줄어들었을 것이고, 중국 정부나 현 체제 속에 내재되어 있는 부패의 사슬이나 민관유착, 경제의 비효율 등을 더 개선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그 주장이 맞거나 틀렸다고 평가할 근거는 없다. 다만 경제라는 것은 과감한 것보다는, 소용돌이 보다는, 안정을 더 좋아한다고 본다면 중국이 오늘날 같은 경제적인 성취를 근거로 해서 등소평이 20년 전 취한 무력에 의한 강경진압이란 선택이 적어도 중국의 현대사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당위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하겠다.

 

사실 20년 전 중국이 이렇게 세계를 놀라게 할 큰 경제로 발전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 것인가? 중국이 오늘날 세계 경제를 흔들 큰 손으로 성장하기까지 20년 전 천안문 사태는 큰 분수령이었고, 그 분수령을 중국은 안정적으로 넘어왔기에 오늘과 같은 성과가 있다고 본다면, 중국의 그런 경험이 앞으로 각 나라나 사회의 현상을 보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