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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소녀' 임춘애, 20년만에 털어 놓은 '그때' 이야기

마장골서생 2008. 8. 9. 16:57

'라면 소녀' 임춘애, 20년만에 털어 놓은 '그때' 이야기

▲ 육상스타 임춘애(39)씨의 달리기는 끝나지 않았다. 임씨는 국민 영웅에서 칼국수집 사장으로 변신했다. 그녀는 올림픽에 출전한 후배들에게 "메달 색에 집착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라면 소녀’라는 별명을 달고 뛰었던 육상선수 임춘애.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에 삐쩍 마른 체격. 라면 밖에 먹지 못한 탓일 것이라는 생각에 온 국민의 연민을 샀던 그 소녀는 지금 국수집 사장이 됐다. 올해 나이 39세. 결혼도 했고 아들·딸도 생겼다.

 

임춘애는 1986년 아시안게임에서 세 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것도 비인기종목인 육상 중장거리 부문에서. 사람들은 육상 불모지에 별이 떴다고 흥분했다. 결승선을 힘겹게 통과한 소녀의 우승 소감은 전설처럼 전해져온다. “라면 먹으면서 운동했어요. 우유 마시는 친구가 부러웠구요.” 국민들은 안타까움과 기쁨에 눈물을 흘렸다.

 

1988년 서울올림픽 개막식. 소녀는 다시 잠실운동장에 섰다. 이번엔 올림픽 성화 최종 봉송자. 국민들은 타오르는 성화와 날아오르는 비둘기를 보면서 감격했다. 그렇게 소녀는 가난과 성공의 아이콘이 됐다. 임춘애는 20년 만에 털어 놓았다. “모든 것이 우연과 행운 덕분이죠.” 그녀의 오르막과 내리막에 관한 긴 이야기를 들었다. 1986년 아시안게임 대표선수 발탁은 얼굴도 모르던 세도가의 추천 덕이었다. ‘라면 소녀’라는 별명은 어떤 언론사의 오보 덕이었다. 올림픽 성화 최종 봉송자 선정은 일본 언론의 개막식 기밀 유출 사건 덕이었다.

 

은퇴 후엔 동경했던 축구스타 대신 그의 친구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문득 빗나간 윌리엄 텔의 화살이 소녀의 삶을 관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과녁을 살짝살짝 빗나갔던 화살의 궤적이 궁금해졌다.

 

▲ 육상스타 임춘애(39)씨의 달리기는 끝나지 않았다. 임씨는 국민 영웅에서 칼국수집 사장으로 변신했다. 그녀는 올림픽에 출전한 후배들에게 "메달 색에 집착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빗나간 화살 하나- 올림픽 성화 최종 봉송자의 비밀 2008년 베이징만 흥분한 게 아니다. 1988년 서울도 흥분에 들떠있었다. 아시아의 경제 강국으로 부상하던 한국은 올림픽을 통해 도약을 꿈꿨다. 개막식은 역대 올림픽 사상 가장 화려하고 신비로워야 했다. 개막식에 관한 모든 것은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졌다. 그런데, 아뿔싸. 개막식 3일을 남겨두고 일본 언론에 성화 최종봉송에 대한 내용이 상세히 보도됐다. 일장기를 달고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땄던 고(故) 손기정 옹. 그가 성화 최종봉송자라는 사실이 새나가버린 것이다. 일본 식민지 시대의 암울함을 벗고, 당당히 세계사의 주역이 되겠다는 메시지를 담으려 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일본 언론에서 미리 보도를 하다니. 서울올림픽 조직위원회는 들끓었다. 그날 저녁, 임춘애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김집 한국선수단 단장이다. “네가 최종 봉송자다.” 밤 11시에 잠실운동장으로 불려갔다. 손기정 옹이 들고 온 성화를 넘겨받아 마지막 봉송자로 달리는 연습을 딱 한번 했다. 그리고 개막식이 열렸다. 손기정 옹이 트랙 반을 돌고 그녀가 나머지 반을 뛰었다. 모든 이들이 기립박수를 보냈다. 성화는 UFO처럼 생긴 원반을 22m이상 타고 올라갔다. 임춘애의 심장은 터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추억한다. “너무도 영광스런 일이죠. 평생 간직하고 살아야죠. 하지만 그 시나리오가 막판에 바뀐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예요.”

 

빗나간 화살 둘-‘라면 소녀’의 비밀 임춘애는 초등학교 3학년에 육상을 시작했다. 6학년 당시 참여한 전국소년체전에서 600m 우승을 했다. 그 성적으로 중학교 육상부에 스카우트 됐다. 이어 역전경주대회 구간우승, 일본 주니어올림픽 육상경기선수권대회 1500m 우승, 비호기쟁탈 육상경기대회 800m 우승 등 각종 국내외 대회를 휩쓸었다. 한국전력에서 장학금이 나왔다. 1986년 아시안게임,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정부는 스포츠 영재 선발에 몰두했다. 전두환 대통령의 장인이 임춘애를 추천했다. 물론 얼굴 한번 본 적 없다. 그녀의 가능성을 높이 쳐 준 것이다. “태릉선수촌에선 찬밥 신세였어요. 정식 국가대표도 아닌데 선발됐으니. 무조건 메달을 따야 했어요.” 이를 악물고 연습했다. 코치는 소녀의 기록이 흡족하지 않으면 끝없이 트랙을 돌렸다. 아시안게임에서 800m, 1500m, 3000m 우승을 했다. 가냘픈 소녀가 아시아 정상에 서자 언론의 관심은 폭발했다.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신데렐라가 된 것이다. 어떤 언론사에서 ‘임춘애는 17년간 라면만 먹고 금메달을 땄다’는 기사를 냈다. 초등학교 합숙 훈련 때 외부에서 증정받은 라면을 간식으로 먹었다는 말이 와전된 것이다. 이후 지금까지 그녀의 별명은 ‘라면 소녀’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1억5000만원의 포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육상협회 규정상 은퇴까지 원금은 단 한 푼도 받을 수 없었다. 매달 이자만 받았다. 그래도 소문은 커져갔다. “라면 소녀가 재벌이 됐다네….” 1988년 올림픽은 세계의 벽을 실감한 대회였다. 이화여대 1학년에 재학 중인 그녀에게 국민들의 기대는 컸다. 기록은 여전했지만 예선에서 탈락했다. 세계기록과 아시아기록엔 현저한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주위의 시선은 차가웠다. “라면 먹던 애가 배가 불렀군. 아예 뛰질 못하는구나.” 올림픽 이후 골반뼈 이상이 발견됐다. 결국 임춘애는 대학 3학년, 은퇴를 선언했다.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기 어려웠던 탓이다.

 

▲ 육상스타 임춘애(39)씨의 남편 이상용(45)씨는 프로축구 선수 출신이다. 이씨는 "한국 대표팀이 이번 올림픽에서 꼭 메달을 딸 것"이라고 기대했다.

 

빗나간 화살 셋- 스타 아닌 평범한 시민의 삶 임춘애는 국가대표 축구선수 김주성의 열혈팬이다. 그녀는 자신의 우상을 보려고 축구장에 갔다가 남편 이상용(45)씨를 만났다. 김주성과 남편은 같은 프로축구단 소속. 그녀는 우상 대신 그의 친구를 선택했다. 그리고 이제 중학교 1학년인 딸과 초등학교 2학년인 남자 쌍둥이를 낳았다. 육상 트랙과 축구 경기장을 떠난 부부의 삶은 조용했다. 남편은 자동차 딜러로 일하기도 하고 가게도 열었다. 아내는 아기를 키웠다. “평범한 사람으로 사는 게 소원이었어요. 저는 앞에 나서는 걸 싫어해요. 때문에 아이들 키우는 게 즐거웠죠.” 생활전선에 선 부부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아이들이 자라자 임춘애는 남편을 돕기로 했다. 수입자동차 딜러도 했고 육상 동호회 코치도 했다. 수입자동차 딜러 시절엔 판매 일보다 인터뷰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뺏겼다. “억대의 차를 팔려니 수완은 좋아야지, 집은 엉망이지, 아이들은 울기만 하지, 결국 사표를 내고 말았어요.” 3년간 계속했던 동호회 코치직은 최근 내놓았다. 부부는 지난해 11월부터 칼국수집을 운영한다. 가게 이름은 ‘청학동 칼국수전문점’. 임춘애는 웃으면서 자랑했다. “용인 수지 근방의 테니스, 배드민턴, 축구팀에서 자주 찾아와요. 아직 요식업으로 성공신화를 이룬 건 아니지만 열심히 살고 있어요.” 인터뷰를 마치면서 베이징에 간 후배들에게 한마디 해달라고 했다. “메달을 따면 좋지만 무엇보다 자기 기록을 깨는데 집중하라고 말할래요. 올림픽은 자기 실력을 모두 발휘하는 게 중요한 거예요. 부담을 가지면 실력발휘가 어렵거든요.” 임춘애의 삶을 조금씩 비껴갔던 화살. 이번엔 정조준 되리라 기대하면서 국수집을 빠져 나왔다. 취재진 뒤로 남편은 배달준비에 분주했고, 아내는 학교 다녀온 아이들을 챙기러 나갈 준비에 바빴다.